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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베트남, 중국 둘 다 공산 국가다.

대월의 승리!

이 문서는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중공 인민훼방군의 띵복을 야무지게 액션빔.
착짱죽짱의 증명.

개요[편집]

쉽더라고요. 프랑스, 미국 타자들을 상대하다가 짱깨 타자들과 상대하니깐 너무 쉬운 거에요

 
— 짱깨와의 경기에서 완봉으로 짱깨 타선을 꽁꽁 틀어막은 베트남 민병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중국이 베트남과 분쟁을 일으켜서 발생한 전쟁이다.

중공군이 베트남을 얕보다가 망신 당했다. 중뽕 오지기로 유명한 중무위키에서도 대중화의 승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무승부라고 딸딸이칠 정도다.

ㄴ 이젠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승리라고 적었더라.

물론 실제로는 무승부 정도가 아니라 정규군 투입해서 민병대한테 줘팸당한 대패이다.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중공베트남 사이에서 벌어진 국지전이다. 그런데 국지전이라기엔 규모가 크고 전면전이라기엔 규모가 소소하다.

한 줄 요약: 누구든 작은 월남을 건드리면 좆되는 거야

이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까지 미국과 씩씩대던 베트남은 점점 친미 성향으로 바뀐다. 사실 골수 소비에트뽕 맞은 월맹이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 미국과의 화해를 모색한 것이다.

ㄴ 지금은 미국보다도 중공과 더 사이가 안 좋을 지경이다. 특히 미국은 잠깐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지만 이 짱깨 새끼들은 수천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베트남을 식민화한 탐욕자들이라서 중공을 믿지 못한 구석도 있다.

현재는 베트남 정계가 친중 친미로 갈려 서로 정치 싸움하고 있다. 러시아 가서 간 건지 몰라도 중국 전승절 참가도 했다고 하더라.[1]

ㄴ 그냥 보여주기 식이지. 남중국해에서 베트남-중국 충돌이 넘 심해서 친해질 수가 없음.

ㄴ 베트남 공산당 중 원로들은 친중이라던데 세월이 약이라고 냉전 종식 이후로는 친서방 세력도 많음.

베트남 국방장관이 모택동 묘에 가서 참배 ㅇㅇ[2]

ㄴ 그냥 이젠 예전과는 달리 친미 성향이 세졌다고 봐야 됨. 이젠 완전 반미 무장이 아닌 점점 친미로 돌아가는 거지.

ㄴ 이건 솔까 짱깨 혈통이 은근 많이 퍼져있어서 생기는 일일 가능성도 있음.

초창기[편집]

요약하면 둘 사이는 좋았는데 갈등으로 관계 씹창이 나서 결국 중국이 개지랄해서 베트남으로 돌격하다가 소련의 힘으로 역관광 당해서 군사력 개좆됐다. 그러고는 소련이 아프간 침공했다가 중국에 보복 당했지만.

중국과 베트남은 원래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사이가 비교적 괜찮았다.

2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군 응딩이를 신나게 때려대던 게릴라 전술은 북베트남이 중공군한테 배워 온 기술이었고, 중국인들이 베트남 병사들을 훈련해준 적도 있었으며 베트남군도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식 교리를 프랑스군과 싸울 때 도입하였다. 민족주의자였던 호치민이 사회주의로 완전히 기울게 된 것도 바로 중국인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정도로 군사적 교류가 있는 정도로 양호한 사이었던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중국 군사 고문단이 활약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총사령관 보 응우옌 지압은 홍강 삼각주(紅河 三角洲) 평야 지대에서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웨이궈칭은 프랑스 공군과 기계화 부대에게 훨씬 불리한 북서쪽 산악지대에서 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호치민은 보 응우옌 지압 대신 웨이궈칭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북서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포위하였다.

중국 정부는 트럭으로 물자와 식량, 탄약을 주면서 포위망을 점점 압축하는데 일조하였다.

1954년 5월 7일 포위망 돌파에 실패한 프랑스군 1만6천여명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호치민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마오쩌둥 역시 호치민에게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를 약속하였다. 2억 달러가 제공되어 북베트남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중국은 약 20여 년 동안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정복할 때까지 대량의 식량과 무기를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1965년 ~ 67년만 해도 중국은 북베트남에 소총 50만정과 대포 1만1천문, 막대한 탄약과 포탄을 지원했다.

베트남전쟁 중에 중국이 제공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 금액을 모두 합하면 약 2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미국이 남베트남에 쓴 돈의 10% 이상이었다.

또한 남부에서 활동 중인 베트콩에 대해서도 약 6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제공했다.

그래서 1963년 5월 중국의 권력자인 류사오치가 방문하였을 때 호치민은 "베트남과 중국은 동지 겸 형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을 공격할 때 "중국후근부대(中國後勤部隊)" 이라고 불리는 중국인 의용부대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도왔다.

사실 전투 부대 파견 논의도 있었는데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싸움은 맡을테니 중국인들이 전쟁에 필요한 과학기술을 지원해달라고 해서

중국인들은 주로 후방에서 도로와 철도 건설, 비행장과 진지 공사, 통신 선로 구축 등을 지원하고 미국의 폭격을 계산해 대항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국은 1971년 7월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했으며 그 중에서 1100여명이 전사하였다.

특히 약 2만명으로 구성된 제2지대 고사포 부대는 북베트남 방공망의 중추였고 미 공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 외에도 곳곳에 공장을 건설하고 식량과 의약품, 심지어 비누, 치약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상 용품도 제공하였다.

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 건설도 중국이 맡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표면적인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의외로 중국이 베트남 통일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 일이 있고 스탈린 사후 공산주의 노선이 분화되고 중소간 분쟁이 있은 후 베트남이 친소노선을 타자 중월관계는 급격히 악화된다.

(사실 마오쩌둥은 농민들과 관계가 깊어서 그런가 은근 평화주의자에 민족 분쟁에도 공정했으며 전쟁이 발발하지만 않으면 거의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6.25 때도 미국이 자신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진짜 넘어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월남전 이후[편집]

비록 통일전쟁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무력으로 통일해서 그런가 무식한 마오쩌둥은 그걸 가지고 베트남에 존나 지랄했고

그에 따라 점점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게 된 북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에 접근했다.

베트남에 무관심했던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무력 개입하고 베트남이 ㅅㅌㅊ로 저항하자 베트남의 가치를 재평가했고 1965년부터 본격적인 원조에 나섰다.

1964년까지만 해도 중국에 비하여 미미했던 소련의 원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중국을 두배 이상으로 압도하였다.

북베트남 역시 외교의 축을 중국에서 소련으로 옮겼고 하노이와 모스크바를 오가는 횟수가 하노이와 베이징을 오가는 횟수보다 훨씬 많았다.

내역을 보면 이해가 가는데, 소련의 원조는 주로 전차와 대포, 미사일, 군함 등 현대식 중화기와 산업 기계류인 반면,

중국의 원조는 고작 식량과 트럭, 소총과 같은 허접한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은 중공 고문단 말만 듣고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가 정권 개십창날 뻔했고 그대로 시행했으면 중공은 아몰랑하고 소련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버리고 난 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먹혔을 것이다. 같은 시각엔 응오딘지엠이 토지개혁이 잘나갔었거든. 시위를 겨우 몰아낸 호치민은 자아비판하고 이때부터 반중성향이 점점 강해진다는 거지.


그 결과 북베트남은 첨단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에게 받은 전차와 전투기로 공군을 창설하고 기갑부대를 편성하는 등 현대적인 군대로 거듭났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자 갑자기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공을 부풀리고 중국의 지원을 폄하하기 시작했으며 당연히 통수를 맞은 중국은 심하게 빡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베트남에 비교적 우호적인 류사오치가 몰락하였고 류사오치를 대신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쥔 린바오는 베트남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홍위병들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철도를 파괴하고 소련의 원조 물자를 약탈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실상은 의지 문제보다 중국이 무능력했기에 발생한 일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이 존나 후진 것들만 주고 있다며 온갖 카더라를 퍼뜨리며 불만을 품었다.

전쟁 도중에도 베트남 공산당은 그런 의심을 해서 중국의 조언을 잘 따르지 않기 시작했고 결국 중국의 만류를 무시하고 "구정대공세(뗏 공세Tet Offensive)"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베트콩들은 1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내었고 기대했던 남베트남인들의 봉기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대실패였다.

중국의 조언가들은 북베트남이 적이 충분히 혼란에 빠지기 전에 너무 일찍 공세로 전환했다면서 비판하였다. 근데 북베트남은 엿이나 먹으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양국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중국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평가가 크게 떨어져서 원조도 크게 삭감하였다.

1969년도 원조 금액은 전년에 비하여 20%가 줄었고 1970년에는 50%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북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도 모두 철수하였다.

1969년 9월 2일 친중적이던 호치민이 사망하고 반중파인 레 주언이 주도권을 쥐면서 중국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베트남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중국에서는 친베트남파 세력의 조언을 들어 1971년부터 다시 원조를 대폭 늘렸다. 미국에게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닉슨은 방중 이후 미군의 철수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카더라를 대폭 지지했던 베트남 공산당은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중국이 닉슨을 상대로 베트남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카드로 베트남 문제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 라고 지랄했다.

그래서 니가 뭔데 미국과 우리 문제를 논하냐?고 통수를 때렸다.


당연히 중국 지도부는 역시 제대로 통수를 맞은 셈이니 존나 빡쳤으나 일단은 그래도 북베트남를 달래기 위하여 원조 금액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72년 2월 21일 하노이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구정 연회를 열고 북베트남 인사들을 초대했지만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중국 지도자들 역시 이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뜬금없이 뻘소리를 지껄이며 남베트남을 즉각 침공하려는 북베트남을 저지했고

남베트남에 대한 통합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해야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북베트남은 중국이 베트남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197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한 레 주언이 81억 위안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요구했지만 저우언라이는 ㅅㅂ 이 새끼는 제대로 미친건가? 하고 25억 위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중국은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반면, 소련은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제공한 10억 달러에 달하는 유상 차관을 탕감해 주었으며 추가로 10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였다.

그러자 북베트남에서는 옛날에 먹은 적이 있는 영토를 가지고 지랄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나왔으며

중국에 그 영토들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까지 전달되자 중국은 맞불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개빡쳤다.

더구나 마오쩌둥은 농민 새끼라 그런지 중국은 항상 외세의 침략에 놓여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망상하는 병신이었다.

그가 한국전쟁에 무력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이 지랄하니까 그 병신은 이제 소련이 베트남을 이용해 자신들을 침공하는 것은 아닌지 망상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태도도 그런 망상병에 불을 질렀다. 양국은 영토에 국경선을 긋는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1974년 8월 통킹만의 해상 경계를 놓고 중국과 북베트남 사이에서 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만 고집하다가 결국 결렬되었다.

(베트남에도 양심이 없는 새끼들이 많았다. 걍 일정 지역 중국인들도 사실은 베트남인이라며 지랄하고 다니는 병신들의 영향이 상당했다.)

레 주언은 "베트남은 두개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기아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반동분자들이다" 라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소련 덕분이라고 칭송하면서 중국의 도움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75년 9월에는 레 주언을 단장으로 하는 베트남 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도 보복조치로 베트남에 있는 자국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켰고

(북베트남에서는 일부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뻘소리로 유혹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FUCK이었다.) 모든 경제 협력과 원조를 중단시켰다.

대신 베트남과 대립하고 있던 캄보디아와 경제 협정을 체결하고 10억 달러의 원조를 주었다.


베트남 지도부에서 친중파들은 쫓겨났고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4인방을 제압하면서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농업적 사고가 강했던 베트남에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있던 마오쩌둥 이상으로 베트남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의 도발에 강경 대응을 하기로 했다. 1974년부터 시작된 국경 분쟁은 점점 증가하였고

1975년에는 439회, 1976년에는 986회, 1977년에는 752회에 달했다. 중국은 1978년 한해 동안 베트남이 약 1천회 이상의 무력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도 같은 기간 중국이 2천회가 넘는 무력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이 화교들을 조질 때 화교들과 협력할 것을 외치기는 했지만 은근히 배신자들로도 보고 있던 중국은 강력히 나서지 않았지만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소련은 중국을 자신의 개로 만들기 위해 베트남에게 대량의 최신 무기를 제공하고

극동 함대의 일부를 남하시켜 베트남과 가까운 공해상에 배치하는 등 대중 포위망을 강화하고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별로 따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승인하고 상당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였다.


그러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람 1명이 베트남 사람 30명과 맞먹는다며 호기를 부렸지만

기껏해야 중국제 경화기로 무장한 폴 포트의 군대는 소련제 중전차와 미그 전투기, UH-1 헬기, 중포를 앞세운 베트남 군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77년 12월 베트남군 8개 사단 6만명이 국경을 돌파하여 30 km 정도 진격하였다.

민족주의자 캄보디아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1978년 12월 25일 18개 사단 및 15개 독립 여단, 1개 비행사단 등 20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다시 침공하여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폴 포트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소위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말로는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정복자나 다름없었고 헹 삼린 정권은 사실상 베트남의 괴뢰 정권으로 모든 정책은 베트남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으며 캄보디아 전역에서 "베트남화"가 시행되었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반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군은 힘으로 반발을 눌렀지만 결국 1982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89년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위협을 통해 영향력을 투사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베트남이 무력으로 캄보디아를 도발하자 1978년 9월부터 중국 지도부는 베트남에 직간접적으로 경고를 보낸 바가 있었다.

덩샤오핑은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태국 수상과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에게 만약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다면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물론 베트남 사람들은 민족주의 감정에 의해 중국을 겁쟁이라 조롱하고 있었고 중국이 전쟁을 걸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남아 순방에 이어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미중 수교를 체결하는 자리에서 카터 대통령에게 경고를 무시한 베트남을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후의 개전과 함께 중국 정부는 "베트남이 그동안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중국 영토를 침범하여 중국 국경수비대원과 국경 주변의 주민들을 습격하였다.

국경수비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온전히 정의의 행동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베트남 역시 중국이 기습적으로 침략을 개시했으며

"베트남 국민들은 정의의 자위권을 행사하여 침략자들을 단호히 격퇴할 수 밖에 없다" 라고 발표하였다.

서로 자신들이 피해자이며 정의 또한 자신들에게 있다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식이었다.

소련의 참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인 중국인들은 만약 소련이 참전한다면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의했고

중국은 1979년 2월 11일에 베트남 침공을 결정했다.


공격일은 2월 17일이었다. 베트남은 4월부터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가는데, 중공군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리라는 것은 베트남으로서도 사실만 보자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중국 정부가 존나게도 계속 경고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의 침공을 소련이 묵인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이 보기에는 겁쟁이인 중국이 그런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캄보디아 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도 소련을 은근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의지를 과대평가한 반면, 중국의 의지는 과소평가한 셈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능력과 의지를 오판했던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6.25와는 다르게 수도와 거리가 멀어 베트남 침공에 회의를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군인들이나 해양을 더 중시하여 전투 의지가 별로 없었던 군인들도 있었다.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어 땅따먹기에 적극적인 군인들은 문화대혁명 때 상당히 제거된 시점이었다.

또한 베트남은 좆같은 정글 산악지대라 병참에서 매우 열악한 중공군으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정글 지역에 살던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애초에 중국 한족들 자체가 정글을 그리 선호하지 않아서 정글 자체를 존나게 개발해서 사는 편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석대로 베트남군에 가장 치명적인 시점에서 공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중공군 자체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민병대에게도 질적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무장이든 훈련 상태든 죄다 병신이었다.(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충격적이게도 군대의 훈련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신 교육만 받았다.)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은 3방향에서 국경을 일제히 돌파하였다. 주력은 6개 사단이 투입된 카오방 방면이었다.

그리고 조공으로 랑손과 라오카이 방면에 각각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작전은 어디까지나 지상에 국한되었고 해공군은 초계 외에 직접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용기는 있었으나 밑바닥 출신이라 군사적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던 쉬스여우(许世友) 상장이었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군사학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부르게 된다. 중국의 문제점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10년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근대적 교육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군사령관들은

특히 지식인들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어 그들에게 유독 악독했던 양아치 무리들에게 끌려나와 온갖 수모를 당하거나 재기불능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문혁의 여파는 특히 군대의 교육과 훈련을 맡은 군사 학교들에 심한 타격을 입혔다.

중국 전체 125개 군사학교 중에서 82개가 폐쇄되었고 대부분의 교관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투옥되거나 쫓겨났다.

이로 인하여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교수진이 붕괴되었고 교육 설비와 기자재, 귀중한 전쟁 자료들도 태반이 불태워지거나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부들은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훈련 또한 정치 사상 교육에만 주력하고 실전 훈련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경제적 파괴에 의해 중국의 무기와 장비 또한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졌다. 카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중국 공군이 보유한 약 5천여대에 달하는 항공기 중에서 4100여대가 전투기였으나

대부분 Mig-15/17/19와 같은 구식 전투기였고 레이더가 없고 적외선 유도 미사일을 장비하지 않아 공중전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공군력에 의한 도움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전차 역시 20년도 더 전에 개발된 T-54/55를 베이스로 한 59식, 69식같은 구식으로

같은 시기 소련은 전자 기기와 무장, 속력에서 훨씬 우수한 Mi-23/25/27 전투기와 T-64/72 전차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연구개발 능력을 굉장히 상실하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중국 공군이 보유한 가장 최신 전투기는 Mig-21의 카피판인 J-7이었지만 숫자가 80대에 불과했고

베트남 공군은 그 J-7보다 훨씬 우수한 Mig-21bis를 운용하는 등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상급 제대가 하급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수적인 지휘 통신 장비나 기동작전에 필요한 차량 등도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굳이 하드웨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관련 지식을 있는 지휘관들이 부족하여 병참능력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어, 보급을 제대로 수행할 수도 없었다.

최일선 부대는 수십km 후방에 있는 보급소까지 사람과 우마에 의지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식량과 탄약을 부지런히 실어날라야 했다.

중국군의 전반적인 수준은 30여년 전의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때와 다를 것이 없었으며 소프트웨어를 고려하면 오히려 더 퇴보했다.


물론 하드웨어도 막장이었다. 중국 보병의 방탄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심지어 많은 병사들은 야전모조차 지급받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보병의 주력 무기였던 56식 반자동 보총은 시대에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반면, 베트남군은 AK-47이나 M-16같은 빠른 연사가 가능한 돌격 소총으로 무장하여 화력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물론 중국 역시 AK-47 소총을 카피한 56식 자동보총이나 56식 반자동보총을 개량한 63식 자동보총이 있었으나

문혁으로 군수산업이 마비되면서 충분한 수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능력상 품질도 상당히 의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베트남은 수많은 지하 갱도와 참호, 토치카가 구축되었으며 과거 미군과 프랑스군을 괴롭혔던 온갖 부비트랩, 지뢰, 함정 따위가 곳곳 설치된 채

중국의 공격을 기다릴 정도로 악명높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길도 매우 협소하여 전투는 고사하고 부대를 이동하는데도 대단히 불리하였고 중국도 중월전쟁 도중 공격을 가했다가 끔찍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베트남은 비록 민병대였지만 중국보다 더 나은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여 방어선이 상당히 강력하였다.

베트남의 지휘관들은 소련군 군사고문단에 의하여 훈련되었고 소련제 T-54/55/62와 미제 M-48 등 더 나은 전차를 가지고 있어

만약 중국군이 베트남군의 최일선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평야지대로 진출했다면 베트남군 기갑부대에게 괴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또한 베트남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서 막강한 방공망과 해안방어망을 갖추고 있어 중국 해공군이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중국군의 작전 지휘를 맡은 쉬스여우, 양더즈 두 사령관은 군벌내전기부터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고 지식도 거의 없었다. 오직 용기만을 발휘하여 사령관이 된 인물들이었다.

전개[편집]

전쟁 초반기는 타이밍 러쉬를 감행한 중국군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국경 지대의 베트남군은 깜놀해서 전투를 회피하고 후퇴했고 중국군은 덕분에 베트남군의 전초 기지들을 손쉽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곧 시작되었다. 해발 1천m가 넘는 산악지대는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도로도 형편없는데다 중국군의 통신망이 부실하여 지휘도 여의치 않았다.

좁은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중국군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베트남군은 북부 산악지대의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국경에서 160 km 떨어진 하노이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소련과 중국에서 원조받은 무기와 남베트남군에게 획득한 미제 무기로 무장하였고 무기와 장비, 탄약이 풍부하였다.

AK-47 소총과 M-16 소총, 105mm M101 야포, 155mm M114 곡사포, M113 장갑차, M41 경전차, M48 중전차, UH-1 헬기 등을 대량으로 갖추어 화력과 기동성이 중국군을 압도하였으며

소련제 RPG-7 대전차 로켓포는 중국군 기갑부대를 고철로 만들었다.

중국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역량은 바닥을 기어서 무작정 진짜 인해전술을 감행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선봉 부대가 벌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군사학교들을 장악하고 우수한 교관들을 쫓아내거나 감옥에 넣어버린 결과였다.

베트남군 지휘부는 중국군에 대하여 "숫자만 많을 뿐 기동력이 약하고 구식 무기와 장비를 보유한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이며 전쟁 경험도 없다"라고 조롱했고 중국군 수뇌부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 사령관들은 용기 하나만으로 사령관까지 된 인물들이라 바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무덥고 습한 날씨와 수시로 스콜, 정글과 벌레가 중국군을 괴롭히고 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중국군을 무쌍으로 격퇴했지만 그들은 악으로, 깡으로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중국군은 광대한 밀림을 맨손까지 대량으로 동원하여 일일이 제거하면서 전선으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험준한 지형과 울창한 정글조차 그들의 깡과 인해전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베트남군은 곳곳에 지뢰를 매설하고 박격포와 로켓포를 쏘아대면서 중국군을 교란시켰지만 중국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베트남군을 점차 뒤로 밀어내었다.

동당이 개전 6일만에 결국 함락되었다. 동당의 방어를 맡고 있었던 베트남군 제3사단 제12연대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베트남군 제316사단이 동당 탈환에 나섰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치면서 실패하였다.

또한 25일에는 중국군 제42군이 까오방성의 성도인 까오방(高平)을 점령하고 베트남군 제346사단을 격파하였다.

베트남 지휘부는 절로 어익후, 씨발이란 말이 나왔다.

중국군의 다음 목표는 동당 남쪽 14 km 떨어진 란쏜(諒山)이었다.

란쏜은 교통의 요충지이며 만약 이곳이 함락된다면 중국군은 단숨에 남하하여 수도 하노이를 위협할 참이었다.

하지만 중국군이 악과 깡, 그리고 인해전술로 베트남군을 밀어붙이며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피로 피를 씻는 등 손실은 막심했다.

베트남군은 중국군의 대부대가 나타나면 결전을 회피하고 정글과 지하갱도, 험준한 산속으로 재빨리 숨었다. 중국군은 소프트 능력이 병신이 되어 대항할 방법 자체를 몰랐다.

좆같게도 밤만 되면 베트남군이 존나 기습을 가했으며 중국군은 뻐킹 악과 깡을 강조하며 뻐기고는 있었지만 좆같은 게릴라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손실이 예상 외로 늘어나자 경악한 중국 지도부는 쉬스여우를 경질하고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던 부사령관 양더즈로 교체하였다.

양더즈는 다른 전선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모든 전력을 랑쏜에 집중시켰다.

2월 27일 새벽 6시 중국군 제42군과 제50군, 제55군 등 6개 사단에 달하는 대병력이 랑쏜 외곽을 포위하고 베트남군 진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또한 랑쏜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고 베트남군의 구원부대가 랑쏜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하지만 이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베트남군 제3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중국군의 일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군은 3월 1일 오전 9시, 19개 포병연대 306문에 달하는 대규모 포병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30분 동안 1만발에 달하는 포탄을 쏟아부었다.

랑쏜 시가지와 베트남군의 진지가 큰 타격을 받고 거의 모든 통신 선로가 두절되었다.

그러자 베트남군 지도부는 급히 제327사단을 랑쏜으로 증원하는 한편, 제1군단(제308사단, 제312사단, 제320사단)과 제5사단 등 최정예부대와 기갑부대를 하노이 주변에 집결시켜 랑쏜이 함락될 경우에 대비하였다.

물론 까봐야 알겠지만 이들은 중국군이 온다면 그냥 좆바를 수 있을 것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전력이 강했다.

한편, 소련은 의외로 중국군이 상당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존나게 공세를 가하자 스베르도로브(sverdlov) 순양함을 비롯한 13척으로 편성된 기동 함대를 남중국해로 출동시켰다.

또한 하노이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고 중국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의 개입이 가시화되자 미국은 올ㅋ 곧 공산주의 오랑캐 두 새끼가 맞짱 뜨겠네를 외치며 태평양함대를 출동시키고 남중국해에 정찰기를 파견하여 소련 함대의 동태를 살피는 등

상황은 점점 일촉즉발이 되고 있었다.

중국군은 랑쏜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는 한편, 주변의 베트남군 거점을 차례로 제압해 나갔다.

베트남군은 여러 고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중국군의 미친 깡과 숫자에 점점 밀려났다.

3월 3일 랑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303고지가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랑쏜 함락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베트남군 지도부는 애미뒤진 중국군에 질려 수비대에게 랑쏜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5일 중국군 제54군 제127사단과 제129사단이 랑쏜 시내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랑쏜은 마치 유령 도시마냥 텅 비어 있었다. 이미 베트남군과 주민들이 모두 철수한 것이다.

랑쏜 전투는 중월전쟁 중 최대의 격전이었다. 중국군은 증원부대까지 합하여 4개 군 12개 사단이 투입되었고 베트남군 역시 제3사단을 비롯한 4개 사단, 1개 포병 연대 및 민병대가 투입되었다.

베트남측은 여기서 중국군의 손실이 2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였고 중국 역시 베트남군의 손실이 1만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중국군의 손실은 매우 컸지만 랑쏜의 함락으로 베트남의 최일선 방어선은 무너졌다. 랑쏜 35 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베트남 제1군구 사령부가 후방으로 철수하였고 수도 하노이도 혼란에 빠졌다.

또한 베트남 지도부는 그제서야 전국에 총동원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일단 소련, 미국 성님들이 출동하니까 슬슬 개쫄았고 중국 지도부는 "충분히 응징하였다"라면서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현지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또한 베트남 정부에 협상을 제안하였다. 중국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베트남도 3월 8일 "중공군이 더 이상 전쟁범죄행위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평화 열망의 표시로 중공군의 안전철수를 보장한다. 추격전을 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하였다. 베트남도 은근 중국군 새끼들의 그 무식한 깡(사실 이새끼들 6.25 전재 때 미군의 어마어마한 폭탄에도 불구하고 존나 끈질기게 버티고 아주 지랄발광을 했다.)에 기가 질렸고 그래서 중국군이 알아서 꺼지기를 원했다.

이로서 전쟁은 끝났다. 중국군은 3월 16일까지 베트남 영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베트남군도 약속대로 추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나게 삽질이나 하고 허탕이나 친 중국군은 결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특히 지휘관들이 개무식하기는 했지만 호전성(?)은 있어서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점령지역에 있는 철도와 도로, 베트남군의 진지, 주요 산업 시설을

풀 한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식으로 철저하게 분풀이를 해서 파괴하였다.

소련도 중국 새끼가 발광하는 걸 보고 베트남에 세우던 깜라인만의 해군기지를 흐지부지시켰다. 훗날 중국이 소련이 아프간 침공했을때 무자헤딘에 지원하는 걸로 보복을 했단다.



서방 학자들은 쌍방 모두 각각 약 2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본다.

결과[편집]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자기가 승전국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짱깨들의 주장은 정신승리용 개소리이고, 누가 봐도 베트남의 승리이다.

좆무위키는 워낙 중뽕 좆선족들이 넘치는 동네라서 초반에 중국이 방어선을 좀 돌파했으니 무승부라고 짖어대지만 씨발 그렇게 따지면 초반 방어선 돌파 수준을 넘어 아예 단박에 수도까지 회쳐버린 독소전쟁과 임진왜란은 각각 독일과 일본의 승리겠네? 1차대전 때 연합군은 프랑스 영내에서만 전쟁하고 독일 영토는 한 발짝도 못 밟았으니 1차대전은 독일의 승리고?

#영어 위키 백과에서도 누구의 승리라고 안 적고 '현상유지, 양국 모두 승리 주장'이라고 적힌 걸 보면 꺼무가 친중이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런데 뭐 어쨌든 간에 베트남 민병대한테 쩔쩔 맨 중공군이 병신임은 전세계적으로 입증되었다.

이후 중공군은 자신들의 후진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걸프전 때 이라크가 일방적으로 미군한테 털리는 것을 보자 큰 충격을 받은 중국은 재빨리 무기의 현대화에 착수한다.

북한이 이 전쟁에서 중국 편들었는데 빡친 베트남은 한국인 인질 이대용은 북송은커녕 일석이조로 한국과 수교할 겸 풀어줬다고 한다.

이대용이 누구냐고?? 6.25 때 인민군들 다 씨를 말릴 정도로 조져버리라고 한 놈이라 베트남이 중국과 전쟁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대용이 전향 핑계로 북송되어서 바로 즉결처분이다.

이후[편집]

베트남은 이 전투로 90년대까지 중국과 사이가 안 좋아진다. 고지전은 무려 92년까지 벌어졌으며 군단급 병력이 투입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냉전의 종식 이후로 서로 무역 문민 교류 등으로 친해지려고 했다가 2015년 남중국해 사태로 사이가 안 좋아지고 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중공이 북괴적화통일을 반대하게 된다. 북괴도 적화통일했다가 저 꼬라지 나면 골치가 아픈 건 둘째 치고 조선족이 빤쓰런해서 정말 ㅈ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