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 사이 발발한 전쟁

개요[편집]

인도애들은 힌두 민족주의(?)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서구 무기빨로 주변국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제 그 칼이 북상하게 되는데..?

내용[편집]

사실 여긴 오히려 군부가 중국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인도는 지들을 식민지배하던 포르투갈의 영토를 무력으로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놈들이 중국을 개바를 수 있다고 여겼다. 군부의 반대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 과학기술자들이 의외로 존나게 노오오오오력하여 후달리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충 인프라랑 무기를 만들기는 했는데 그것들이 ㅅㅌㅊ는 아니여도 어느 정도 ㅍㅌㅊ치기만 해도 중국군이 상당히 무장한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였다. 그리고 그럼 역시 마찬가지로 병신이지만(그러나 중국군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던) 인도군이 좆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부 역시 민좆주의에 불타는 파이어맨들이 있었고 티베트를 인도의 영토로 보고 야심에 불타는 인도 제국주의자 성님들도 많았으며 많은 인도인들이 티베트를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넣자고 주장하여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인도 군부도 "에이, 설마 저새끼들이 히말라야 넘는 게 가능이나 하겠어?"라고 은근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티베트 정도나 먹고 여차저차해서 땅만 좀 먹으면 중국도 전력을 많이 동원하여 싸우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도 충분했는데, 과거 행적만 보자면 중국은 인도 성님들이 무력으로 부탄 동쪽에 있는 타왕을 점령하고 티베트인 관료들을 쫓아낸 후 자국령이라고 합병해도 인도군의 전력에 겁을 먹고 아가리나 가끔 좀 털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인도가 부탄과 네팔 사이에 있는 약 2천여 ㎢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할 때도 유감 표명만 하고 인도의 비위를 건들지 않았다. 인도가 히말라야 산맥 이남은 전적으로 전부 인도의 세력권이라고 주장하고 네팔과 부탄을 위협하며 시킴 왕국에 군대를 보내어 점령하고 그들의 보호국화하는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주는 동안 중국은 아주 무력했다. 인도가 시킴 국왕 팔덴 된둡 남걀을 강제로 폐위시킨 후 인도의 손에 의한 투표로 완전히 복속시키는 동안 쫓겨난 시킴 국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세자 왕추크 텐진 남걀은 중국에도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인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이 당시에는 미국과 파키스탄이 동맹국이었다. 중국으로서는 자력으로 인도를 견제하는 수단밖에서는 없었다. 그러니 망설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판도는 인도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며 노골적으로 티베트를 지지하자 달라지게 된다.)

거기다 중인전쟁 때는 중국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쩌둥이가 워낙 병신이라 대약진 운동에 의해 인구 5%가 직접적으로 사망했고 나머지 인구도 좆됐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국은 자멸할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반면 인도는 4만5천명의 병력과 항모 "빌크란트Vikrant"를 비롯한 해공군을 동원하여 고아를 포위한 후 포르투갈을 압도적으로 개바른 직후였다.

자신감 넘치는 인도 성님들이 진격함에 따라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누가 먼저 선빵을 쳤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롱쥐(Longju)라는 국경 마을에서 양국군대의 초소끼리 총격전이 발생하고 중국군이 인도군의 초소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콩카(KongKa)라는 곳에서도 인도군이 중국군과 재차 충돌하여 9명이 사망하였다. 남카 추(Namka chu)라는 곳에서는 인도군이 중국군을 압박하다 인도군 5명, 중국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인도는 이러한 충돌이 중국의 잘못이라고 중국을 엄청나게 비난했다. 중국은 ㅅㅂ, 그럼 니들이 군대를 빼던가. 왜 자꾸 북상하고 지랄이야라며 반박했다.

지들이 북상을 시도하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빡친 인도는 소련과 협정을 맺고 15억 루피에 달하는 원조를 얻고 온카르 작전(Onkar Operation)을 수립하여 병력을 증강하는 둥 대놓고 전쟁 준비를 했다.

그걸 보고 중국은 애미뒤진 새끼라 욕을 하였고 당연히 쩌둥이도 "ㅅㅂ, 이건 빼박 전쟁각이다."라며 공산당 지도부를 소집하고 인도와의 전쟁을 결정하였다.

사실 중국 내부에선 나름의 첩자를 통해 판단한 바로는 인도가 티베트를 명분으로 중국 내부까지도 침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인도 애새끼들 지금도 국뽕이 심하지만 과거에는 더 심했다. 이 기회에 중국 먹고 미래에 잠재력 세계 일위국 건설 같은 망상하는 미치광이들도 있었다.)

물론 네루는 후에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고 이건 모두 중국의 잘못이다고 주장했지만 어쨌거나 마오쩌둥은 보고를 받더니 인도인들이 티베트를 넘어 계속 진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대외적 요인이 중국에 좋지 않은 것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소련은 "필요하다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원조하겠다"라면서 인도의 편에 붙었고 미국 역시 인도의 편이었다.

인도 정부는 중국은 고립되었고 실패로 인하여 굉장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에 굳이 가치가 크지도 않은 쓸모없는 영토를 위해서 굳이 전쟁까지 불사하지는 않으리라 낙관했다.

하지만 중국은 2년 뒤에 핵보유국이 되는데(인도는 중국보다 10년 후에 됨), 인도가 만약 필요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티베트를 넘는다면 프로토타입의 핵과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인도 북부를 최대한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이 압박(중국과 소련의 분쟁은 유명하고 미국도 국공내전 때 군대를 동원해 직접적으로 공산당과 싸웠다.)하고 있는 가운데 여기서 치명적인 대패를 당한다면 그들은 어차피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최소한 마오쩌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의 생각보다도 더 많은 병력이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중국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휘부의 각오 역시 차이가 있었다.

인도 장교들은 이걸 무슨 소풍가는 기분으로 생각한 반면 중국 장교들은 결사의 각오로 인도군을 격퇴하고자 하였다.

역시 누가 먼저 선빵을 쳤는가는 의문이지만 확실히 분명한 것은 약 30여명의 인도군이 테롱쭝(Terong Rdzong)이라는 마을을 점령하고 진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연히 다른 마을들도 점령하고 초소를 세웠다. 선빵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는 분명하게 약 5백여㎢ 정도의 영토를 먼저 확보하였다. 인도는 이것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사건 직후 중국은 인도에 말로 항의하는 둥 그때까지도 인도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더 이상 인도의 진격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정 선을 정하고 직간접적으로 이걸 넘으면 전쟁임 이렇게 경고를 날렸다. 저우언라이는 뉴델리를 방문하여 네루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는 인도가 먹은 걸 어느 정도 인정할테니 양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을 서로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아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국경선에서 멀리 물러나자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자신감이 ㅆㅅㅌㅊ던 네루는 엿이나 먹으라고 했다.

"중국인과 인고 도인은 형제"라던 네루는 그 시점에서는 이제 분명하게 중국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인도의 동부 국경 지대의 동부 사령부 산하에는 구르카 대대, 시크 대대 등 용맹성으로 이름을 떨치는 부대가 많았고 심지어 제4사단은 인도군 최강 부대로 손꼽히는 정예 부대였다. 진실이야 어쨌든 용맹하고 강력하다는 부대가 많았다. 그에 비하여 티베트 주둔군으로 선봉에 설 중국군은 그저 그랬다. 그러니 인도가 중국군을 좆바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일단 지들은 더 강한 것 같고 자기들의 최강 부대를 보냈는데 상대는 걍 지방 잡군이었다.

쩌둥가 전쟁을 결심하기 한달 전에 네루는 국경지대에서 선제 공격을 실시하여 중국군을 개박살내라고 지시했다. 인도군 수뇌부는 "레그혼 작전(Operation Leghorn)"을 수립하여 공격은 달비(John Dalvi) 준장이 지휘하는 제7여단이 맡았다. 이들은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전진하여 맥마흔 이남에 남아 있던 중국군 전초 거점들을 모두 제압하였다. 비록 인도는 중국이 먼저 선빵을 쳤다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들이 먼저 점령까지 하기는 했다. 중국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전투를 회피한 채 황급히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고 인도군은 중국군을 졸라 비웃었다. 인도의 수뇌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미리 서로 공을 챙기는 둥 아주 개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에게 인도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중국의 결단이 대단한 것 같고 중국이 정말 어마어마한 공격을 인도에 퍼붓을 수도 있을 것 같자 흐루시초프는 만약 중국과 인도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면 소련은 중국의 편에 서겠다고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외교적 결과가 아깝긴 했지만 완전히 좆될 수도 있는 놈을 편으로 삼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인도의 통수를 때린 것이다. 물론 인도를 완전 버린 것은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개입하기도 했다. 단지 중국을 이 이상 압박했다가는 막장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여 물러난 것이다. 대신 그 대가로 소련을 지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린뱌오는 인도군이 멍청하게 자화자찬이나 하면서 대대적인 공세에 대한 준비를 전혀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티베트 주둔군 + 근처의 사단을 합쳐 약 3만 5천명을 가지고 가차없이 기습적 공격을 감행했다. 인도군 제7여단이 방어하는 전초 거점에서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공을 앞에 둔 전초 작전인 셈이었다. 중국군은 800여명의 대대를 가지고 공격을 퍼붓었다. 약 4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인도군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거점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인도군의 손실은 전사 6명에 부상자 11명에 불과한 반면, 중국군은 전사자, 부상자 합하여 약 200여명에 달했다. 중국 수뇌부는 "아, 씨발, 진짜. 마데인 차이나 노답이네."를 외치며 대등한 조건에서 붙기보다는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결국 중국군은 광대한 전선에 걸쳐서 공격을 감행했고 야전 전화선이 죄다 무력화되고 후방 사령부와의 통신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인도군은 자연히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군의 야간 기습 공격이 대대적으로 실행되었고 인도군은 잠이나 자고 있다 좆됐다. 6.25 전쟁에서도 그랬지만 중국 보병들의 기동력은 통상적인 이론 이상이었다. 그들은 그물처럼 순식간에 인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해발 4천m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포위된 채 보급을 받지 못했던 인도군은 식량과 심지어 식수까지 바닥이 난데다 많은 병사들이 동사하였다. 인도 공군의 능력은 병신이라 중공군 포위 속에서 물자 전달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중국군의 선발대는 겨우 1만명 정도로 인도군보다 오히려 적었음에도 정교한 포위를 통해 수학적으로는 오히려 전선에서의 숫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들은 포위된 인도군을 격퇴할 생각이 아니라 양익을 뚫은 후 적의 최일선을 돌파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인도 장교들은 아무 생각없이 포위가 되었으니 원군을 기다리며 방어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후퇴를 하면 중국군의 공격에 오히려 그들이 괴멸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군의 능력이 형편없어서 자신들이 방어를 하다 보면 그들도 결국 지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방어만 하는 동안 중국인들은 훨씬 강력한 포위 공격를 구축하고 있었다. 오히려 후속 부대가 히말라야를 넘어 계속 도착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로 중국군의 전력이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결국 최전선을 맡고 있던 인도군 제7여단은 중국군의 맹공을 받게 되었다. 그들 3천 명은 인도군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부대이다. 하지만 인도군의 상상 이상의 하루만에 전멸했다. 여단장 존 달비 준장도 포로가 되었다. 인도군 제4사단 사령부는 인도군이 포위되어 맹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한 채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인도 사령관들은 큰소리 빵빵치다 막상 질 것 같으니까 쩌는 도망 실력을 보여준다.) 중국군은 그들을 놓아주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굳이 애를 쓰며 추격하지는 않았다. 인도군 제114여단도 중국군의 공격을 받자말자 붕괴되었다. 이들은 싸우는 대신 도망치거나 투항하였다. 사실 중국군의 작전이 너무 성공적으로 성사되어 싸워도 그냥 발리는 판국이었다. 중국군은 10월 24일까지 인도군의 전초 거점 43곳을 모두 점령하였고 인도군을 제거한 후 진격을 멈추었다. 멈춘 이유가 있었는데, 전체적인 인도군이 처참하게 박살나는 동안 와롱(Walong)에 있던 시크 제4대대는 그들을 성급히 공격하던 중국군 2개 대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중국군은 이틀 만에 200여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었다. 중국 지휘관들은 다시금 중국군의 공격력 부족을 인식하고 군대를 잠시 재정비했다. 그리고 곧 중국군은 도처에서 인도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시크대대로부터의 패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타왕(Tawang)이 함락되었다.


타왕은 꽤 요충지였고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머문 도시로 정치적 의미가 컸다. 타왕의 함락과 함께 중국군은 다시 재정비를 위해 전진을 멈추었지만 맥마흔 라인 선상에 구축된 수십여개에 달하는 인도군의 전초 거점은 모두 중국군의 손에 넘어왔다. 인도군에서는 육군이 자꾸 패전하니까 해공군을 총동원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제 경항모 "빌크란트(Vikrant)"와 중순양함 "델리(INS Delhi)" 등 23척의 주력함을 보유한 인도 해군은 외형적으로 당시 아시아 최강이었다. 중국 해군은 허접한 소형 선박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고 도저히 바다에서 인도 해군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인도 해군은 중국 해안 도시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만약 진짜 위협으로만 끝나게 된다면 인도는 그들의 위협적인 패 중 하나를 대단한 결과도 없이 소비하게 되는 셈이었다. 사실 인도 해군은 외형은 그럴 듯했지만 내실은 몰랐다. 그리고 인도인들은 중국군이 인도 영토를 계속 점령함에 따라 국뽕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그들의 해군이 그들 생각보다 형편없는 수준일까봐 두려웠다. 공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군의 어마어마한 폭격도 버티고 병력이 계속 집결하고 있는 중국군이 인도 공군의 공격을 받고 나서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중국에는 확실히 인도에 투입했던 병력보다 외형적으로 무장이 더 강하고 숫자도 더 많은 병력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는 서로 총력전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만약 인도가 전력을 더 투입하게 된다면 중국도 전력을 더 투입하여 정말 총력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중국 역시 호전파도 있었지만 인도의 외형적인 전력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던 신중파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군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네루에게 서한을 보내어 쌍방의 군대를 국경에서 20km씩 후퇴시키고 국경 문제를 평화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네루는 거절하였다. 인도인들은 기존의 엄청난 야심적 망상은 버렸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 전쟁에 대해서만큼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감이 많이 하락하여 인도 정부는 급히 2개 사단 9개 여단 등 3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증원하고 스스로의 비동맹 원칙을 깨고 외국에도 대대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영국, 이스라엘을 빠르게 무기와 군수품을 보냈고 미국도 원조 물자를 보냈다. 심지어 잘하면 예전처럼 소련에게도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다.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소련이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세계적 긴장도가 높아짐에 따라 분열하기도 했던 2세계는 다시 결속하기 시작했다. 중인전쟁의 중국군도 이런 분위기와 네루의 거절에 힘을 입어 호전파들이 희망대로 전력이 계속 강화되고 있었다. 소강 상태가 된 전투는 인도군의 반격으로 재개되었다. 비록 1세계의 지원을 받고 강화되기는 했지만 인도군에 딱히 대단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순히 강화된 전력을 이용하여 네루의 생일 선물로 승전보를 알려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전력 역시 강화되었고 인도의 시시한 공격은 중국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인도군의 공격은 중국군의 조직적인 반격에 부딪쳐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격퇴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중인전쟁 동안 인도군의 유일한 공세 작전이었다. 인도군은 이후로 중국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공격할 틈이 없었다. 중국군은 인도군을 격퇴한 즉시 공격에 나섰다. 약 2만명의 병력이 남하하여 인도군 제4 가르왈 소총 대대를 격파하고 인도군의 보급 거점인 세라(SeLa)와 봄디라(Bomdi La)를 점령했다. 심지어 전에 패전했던 와롱마저 함락시켰다. 인도군 제4군단장 하르박쉬 싱 중장은 중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비행기를 타고 도망쳤다. 호전파들의 의견을 따르는 중국군은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세를 지속했고 곧 봄딜라(Bomdila)마저 함락되어 인도의 제62여단이 포위 섬멸당하였다. 제62여단장 호샤르 싱(Hoshiar Singh) 준장은 중국군의 우회 공격 작전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후퇴하려 했지만 중국군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없었다. 겁쟁이인지 아니면 그나마 똑똑한 것인지 인도의 일부 지휘관들은 독단으로 후퇴하여 전력을 지키긴 했다. 하르박쉬 싱 중장도 제4사단의 철수를 지시하는 한편, 후방에 있던 제48여단을 구원부대로 급히 투입했지만 이들은 바로 중국군 제11사단에게 격퇴당했다. 또한 인도군 제4사단은 철수하는 도중 사방에서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토막토막난 채 괴멸했으며 병력 자체가 상당히 증발했다. 호샤르 싱 준장 역시 부탄 국경으로 도망치다가 중국 수색대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했다. 중국군은 인도군 전차 10대와 차량 400여대, 야포 170문을 노획하였다. 자무나(Jamuna) 강 이북에서 인도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붕괴된 채 병사들은 소부대로 흩어져 정신없이 패주하며 알아서 소멸되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쪽의 악사이친에서도 중국군의 공격으로 11월 20일 요충지인 추술(Chushul)이 함락되고 제114여단이 전멸하였다.


뉴델리에서는 인도군의 승전보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정치인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인도 장군들은 비참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와롱이 함락되었습니다! 세라가 함락되었습니다! 봄딜라가 함락되었습니다! 제4사단을 비록한 인도의 주력이 전멸 및 해체되었습니다!" 그런 소식들이 전해지자 인도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병력은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제대로 된 전력으로 보기 힘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애초에 당시에는 인도군이 지금보다도 더 막장이라 남은 수비대는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부터 의문이었다. 아리아인들이 지배한 이래로 인도 북부는 인도의 중심이었지만 겁에 질린 인도에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고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무작정 도망쳤다. 이런 상황이라면 중국군이 아루차날 프라데시 전역을 석권하고 자무나 강을 도하하여 아삼 지방까지 침공하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수도 뉴델리도 위태로웠고 인도에게는 더 이상 이들을 저지할 역량이 없었다. 네루는 급히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내어 미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은 인도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미군, 영국은 대량의 지원을 하는 한편, 인도 정부의 정식 요청이 있으면 군대를 보내어 무력 개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미, 영 등 서방 진영이 인도에 대한 군사 원조에 나서자 인도인들은 용기를 되찾았고 지원병들이 몰려들었다. 인도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들은 서방제 무기로 무장한 후 최전선으로 항하였다. 네루 역시 용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중국군은 전진을 멈추고 전쟁을 그만하겠다고 기습적으로 선언했다. 인도의 도발로 반격전쟁을 실시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후방 20km까지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모든 포로와 노획한 무기의 반환도 약속했다. 중국의 깜짝 발표는 인도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호전파들의 손을 들어주다 그만 싸우자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진심으로? 중국 내부의 호전파들은 인도 민족들과 낙후된 인도 사회를 이용하여 점령지에서 다른 민족 국가들을 세우거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중국은 단지 그럴 시간을 벌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중국군은 빠르게 철수하여 사라졌다. 또한 4천여명의 포로와 노획 무기도 인도군에 반환되었다. 인도군이 되돌려 받은 무기는 대포 150여문, 기관총 220여정, 소총 2500여정, 포탄 2만발, 차량 120여대, 전차 2대, 실탄 200만발에 달했다.


중국의 급작스러운 휴전 제안에 네루는 국민들 앞에서는 "중국군의 철수가 결코 전쟁의 종결은 아니다."라면서 중국의 휴전 제안에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를 겪었던 인도군 수뇌부는 중국군이 알아서 물러나는 이상 굳이 싸울 의지가 없었다. 애초에 중국군을 아주 약체로 생각하고 전쟁을 결의한 그들은 중국군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도 총력전으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중국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선제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강경파들은 중국과의 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지만 말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군대를 보내어 맥마흔 라인을 회복하거나 서부 지방의 악사이친을 점령한 중국군을 쫓아낼 용기가 없었다. 심지어 티베트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중국을 자극할 용기도 사라졌다. 강경파인 군인들 역시 충돌을 회피하였고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던 영토들마저 도로 다 뱉었다. 중인전쟁 중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기간은 10여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그 십여일 동안 인도군을 물리치며 150km를 진격하였으며 약 9만㎢에 달하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석권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정예군을 손쉽게 상대하고 심지어 완벽하게 전멸시키거나 해체시키기까지 하였고 사상자도 8,000명에 가깝거나 혹은 더 능가할 수도 있었다. 인도 정부는 또한 스리랑카를 통하여 밀서를 보내 "더 이상 맥마흔 라인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네루는 스스로 "전쟁 준비가 부족했다"고 반성하였으며 다우레트 싱 중장은 네루에 대하여 "이 어리석은 행동은 지성을 상실한 무모한 도박이었다"라고 혹평하였다. 당시에도 중국은 마오쩌둥이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일부 과학기술자들이 노오오오력을 했기 때문에 분명히 어느 정도의 전쟁 수행 능력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전쟁 전 지나칠 정도로 중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시하였다. 심지어 제대로 된 근거없이 중국군을 엄청난 겁쟁이라 비웃는 분위기가 만연했었다.(이에 대해 제7여단장 달비 준장은 "중국군 병사들이 몸을 굴려서 지뢰밭을 통과하고 가슴으로 총구를 막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예측이 아닌 기대를 가지고 싸웠고 자신들의 망상과 다른 현실을 보자 빠르게 붕괴되었다.


결과[편집]

강대국의 자리를 노리던 인도의 팽창 저지 및 위상 좆망화.

이거 보고 바퀴스탄이 자신감 충전해서 인도한테 개겼다가 덩치빨에 쳐맞고 찌그러졌다.

그리고 방글라데시한테 우리 대신 중국이 너네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드립을 쳤다가 분리독립 당한다.

바퀴스탄 새끼들은 인도성님께 맨날 얻어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