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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蔡秉德
생년월일 1916년 4월 17일
국적 일본 제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시
학력 평안남도 평양 종로보통학교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포병학교
일본 육군공병학교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대한민국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직업 좆본군(최종계급 소좌), 북괴군

군마갤러왈 '그 참모총장'이자 참모총장조무사.

전쟁중에 할 줄 아는게 총기관리 엌ㅋㅋㅋㅋ

6.25 전쟁이전[편집]

1916년 평양 이향리 5-21번지[1]에서 채관수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장인어른은 좆본군 중좌를 지낸 백홍석이었다.

좆본육사예과에 입학, 1935년에 예과를 졸업했다. 이후 규슈 사세보 중포연대 사관후보생으로 6개월복무, 1935년 9월 육사에 입학해 1937년 49기로 졸업했다. 좆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해 사세보 군항지키는 중포장교로 일했다.

1940년 좆본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병기학교 교관을 임하고 오사카 육군 조병창 공장장 + 병기행정부 부원을 거쳤다. 이때 좆본군 참모육성 과정인 육군대학교 입교 기회가 주어졌지만 오사카 조병창장과 싸우다 조병창장을 줘패버려서 취소당했다 엌ㅋㅋㅋ

태평양전쟁말에 경기도 부평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으며 근무도중인 1945년 3월 여운형 슨상님의 건국동맹세력에게 유사시 무기를 대주기로 약속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박헌영의 트롤링으로 좆망행 청룡열차에 탑승하고...

해방이후 장사를 하다가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1946년 1월 15일, 졸업후 정위로 임관하고 그날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 + 1보급 부대장, 부대 사령관, 후방부대 사령관, 제4연대장을 지냈다.

그 국방장관의 추천으로 1948년 8월 통위부 참모총장, 1948년 8월 16일 국방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2월 육군준장으로 승진했다. 1949년 2월 소장으로 승진했다.

1949년 5월 국방부 기구 간소화로 국방부 참모총장제[2]가 폐지되고 국방부장관이 통합지휘함에 따라 그 국방장관의 추천으로 1949년 5월 9일 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 그래도 총참모장 재직중에는 천조국이 계속 무기원조 안해줄거야 하면서 으름장놓고 나라 경제는 허벌창인 현실에서 부대증설, 군사학교증설, 심심하면 터지는 북괴의 대남유격대 토벌등 할건 다했다. 런승만과 그 국방장관이랑 짝짜꿍하고 머가리없이 헛소리한건 있다만. 하지만 1949년 10월 남북교역사건과 1사단장 김석원과의 불화때문에 해임, 예편되었다가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했고 1950년 4월 말에 육군총참모장 + 육해공군총사령관이 되었다.

6.25 전쟁[편집]

실전경험없는 병기장교가 참모총장으로서 뭘할 수 있겠나?싶지만 이새끼도 신성모랑 맞다이를 뜰만한 상병신 + 고도의 간첩인것은 확실했다.

5월 1일에 북괴 동향이 심상찮다고 실시한 전군비상경계령을 6월 23일에 해제해버리고 정보국에서 북괴새끼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내고 6월 23일 6사단이 주둔한 춘천에서 모진교사건까지 터졌음에도 그냥 상큼하게 씹고 장병들한테 줄돈이랑 밥이랑 무기없다고 병력의 반을 휴가보내는 병신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심지어 북괴새끼들이 25일 새벽 4시 불법 남침을 해서 개성이 공격당했을때도 라디오로 미군지원그딴거 제끼고 일주일만 주면 백두산까지 간다 ^오^드립치기까지 했다. [1]

무울론 북괴새끼들이 쳐들어오니까 휴가보낸 병력을 복귀시키는등 어째 수습을 했지만 제대로 뭉친 병력이 없어서인지 육군사관학교 1기, 2기 사관생도들을 의정부 전투에 꼬라박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지휘관 꿈나무들이 갈려나갔다.

근데 서울이 털릴 위기상황에서도 '전면공격은 아닌거같고 이주하랑 김삼룡 잡을려고 저지랄인듯요?'같은 헛소리도 했다. 그리고 26일에는 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여론도 안좋아졌는데 예전처럼 서울을 사수하는데 명령만 있으면 나흘안에 평양간다 ^오^드립을 또했다.

물론 서울이 털리니까 빤쓰런^^ 이후 한강이북에서 어떻게든 버티던 장병들의 제대로된 철수같은 건 생각안하고 한강다리를 끊어버린다.[3]

빡친 맥아더성님은 바로 도쿄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분노를 참아내면서 '이 개판이 된 한강방어선은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죠?'라고 질문했다. 이에 채병덕이 200만 남한 청년 캐삭빵하면 됩니다! 라고 쳐지껄이니까 일단 예의상으로 훠훠훠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하고 런승만이랑 독대할때 대놓고 화내면서 경질을 요구했다. 그래서 6월 30일 해임, 경남지구편성군사령관[4]으로 나가리 쳐먹었다.

이후 채병덕이 싼똥은 김홍일장군님이 치우면서 북괴군의 남진을 막게 되었다.

본인은 남해안으로 들어오던 방호산등의 북괴군을 막기 위해 출동했다가 7월 27일 하동고개에서 방호산씹쌔끼가 지휘하던 6사단의 매복에 걸려서 전사했다.

근데 아군한테 트롤짓 하는게 어디서 많이 본 돼지새끼가 연상된다.

평가[편집]

6.25 전쟁 초창기의 대표똥별로 악명이 높아 사관생도들은 간첩이라 부르면서 싫어하는등 악평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가 좆본군시절 경력덕에 군수행정만큼은 매우 뛰어난 성과를 보였고 이때문에 참모총장이 아닌 군수행정만 맡았으면 이렇게 욕을 안먹었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비록 친일파였지만 그나마 잘한 게 하나 있다면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채병덕이 관리하던 무기고에 뇌물을 주고 무기를 빼돌리는 짓을 일삼았고 채병덕은 이를 열심히 막았다. 이게 왜 잘한 거냐 하면 채병덕이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알고도 상부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때 채병덕이 상부에 보고했더라면 일본군 차원에서 대대적인 독립운동가 학살을 자행했을 것이다.

사실 이 양반이 친일파란 것도 그냥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것 뿐이지 어디가서 함부로 덴노 헤이카 반자이나 외처대는 찐따는 아니였다.

결론적으로는 평시에 유능했으나 전시에는 무능했던 사람이다. 사실 초창기 머한은 개판5전이라서 뭘 할수가 없긴했다. 특히 경제난으로 군병력을 제대로 돌리지 못했고 본인 조차 과분한 위치에 있다며 정일권한테 전권을 넘길려고 했다. 이범석 이후 2대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신성모는 국군이 진격을하면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라는 정신나간 발언(당시 국군 경찰은 국내 치안을 잡기도 힘들어 했다)을 하면서 미국이 지원을 꺼려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신성모에 이 발언으로 북한은 소련과 중공한테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거기다 북한군 기갑전력이 보고 이상으로 증평되고 있었고 육군은 2개사단을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으로 빤쓰런친 빨치산 잡으려고 후방 배치를 해놨다 거기다 6.25전쟁전 3.8선 근처에서 북한과 국지전하면서 남아있던 장비마저 말아먹으면서 열세였던 전력이 더 열세로 떨어진다


각주

  1. 現 북괴령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서쪽근교일대
  2. 국방부 참모총장이 육군, 해군을 통합지휘하는 방식이었다.
  3. 1964년 한강다리 폭파지시는 채병덕이 내렸다는 말이 나왔고 실제로 채병덕 지시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채병덕이 아닌 이범석이 지시했단 썰도 존재한다. 채병덕 지시설 못지 않게 신성모 지시설도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 신성모 지시설은 신빙성이 큰 게 이 신성모라는 새끼는 이승만이 선장 한 번 했다고 국방장관 시켜준 위인이라서다.
  4. 말이좋아 사령관이지 실제로는 대대하나밖에 지휘를 못하는 대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