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

파나마에 있는 운하. 대서양태평양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길이는 82km

역사[편집]

아즈텍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건의로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 5세가 만들어볼 생각은 해봤지만, 오스만 제국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돈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1880년 수에즈 운하를 완공한 바 있는 프랑스의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가 처음으로 건설을 시도했으나, 인부 21,900명 가량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참사만 남기고 실패했다. 이 실패로 레셉스는 파산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레셉스의 참담한 실패로 파나마 대신 니카라과에 운하를 지어야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카리브 해에 있는 마르티니크 섬에서 몽펠레 화산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이 말은 쑥 들어갔다.

결국 이 운하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미국이 나서서 1900년대 초부터 건설을 시작, 1914년 8월 15일에 완공한다.

미국은 프랑스가 실패한 까닭이 모기 때문이었음을 알아내고, 공사 지역 내의 건물에는 살충제를 뿌려댔고, 모기가 알을 깔 수 있는 고인물들에 모조리 석유를 갖다부었다. 심지어 성당에 있는 성수까지도 엎어버릴 정도로 철저했다. 프랑스가 건설할 당시엔 말라리아의 매개체가 개미라고 여겨서 숙소 침대 다리마다 그릇에 물을 담아놓는 헛수고로 오히려 모기를 더욱 불려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미국도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아서 5,600명 가량의 인부가 죽었다.

소유권[편집]

원래 파나마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콜롬비아의 한 지방이었다. 그래서 건설 당시 미국은 원래 콜롬비아를 상대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콜롬비아가 '돈 더 내놔'라고 패기를 부리며 거부하자 방침을 바꿔 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독립시켜버렸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 미국은 그 대가로 파나마 운하 일대의 모든 권리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파나마도 서서히 운하를 되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9년 11월 3일 파나마 독립기념일에 반미시위가 일어났으나 미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하지만 1969년 1월 9일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미국이 손 쓸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난리가 났고, 미국을 비판하는 국제여론이 커지자 미국은 1979년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조차지를 모두 파나마에 돌려주었고, 1999년에는 파나마 운하도 반환했다.

통행료[편집]

당연하지만 배의 크기와 화물 적재량, 승객 수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평균적으로는 약 54,000달러라고 한다.

가장 적은 통행료를 받은 경우는 1989년 미국의 리처드 핼리버튼이 운하를 수영으로 통과하면서 낸 39센트.

기타 운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