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8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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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880년부터 1889년까지의 연대.

조선[편집]

여하튼 국제 사회에 뛰어든 조선은 1881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고 일본에는 조사시찰단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개화 정책을 펼쳤다. 웬 짱깨가 친중 친일 친미 반러를 강조하며 조선의 외교관계를 전망한 도서인 조선책략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논란이 많았는데, 특히 이 책에서 주장하던 저 멀리 있는 나라인 미국과 친해지자는 친미 여론이 급격히 퍼지면서 결국 조선 정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미국과의 첫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외 외교를 위해 태극기가 제작되기도 했다.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도 수교를 맺었다.

한편 구식 군대를 대체할 신식 군대 별기군이 등장해 구식 군인들의 입지가 줄었으며 민자영 개 씨발련이 여흥 민씨 세도를 펼치면서 온갖 수탈을 벌이고 군인들을 개 취급하자 군인들이 죽창을 들고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집권자로 추대하며 조선에 주둔한 쪽바리 군인들부터 조지고 짱깨 똥꼬를 빨던 민비년도 거의 조질 뻔 했으나 민비가 튀어 청에 러브콜을 보내고 청나라에서 짱깨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짱깨들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을 요구했으며 이것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나랏일도 제 멋대로 할 수 없는 청나라의 반식민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일본도 숟가락을 얹어 제물포 조약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배상금을 뜯어냈으며 일본군을 다시 주둔시켰다.

이후 개화파들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와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는데 친일 성향을 가진 급진개화파가 청나라가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싸우던 도중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개혁 정강을 발표해 3일 간 집권했으나 하필이면 주도한 놈들이 친일주의자들인지라. 결국 청나라의 개입으로 망했고 와중 뜬금없이 개꿀은 일본이 빨게 되었다.

이때 영국도 러시아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거문도를 강제점령했으나 정작 당시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상당히 신사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887년 거문도가 다시 조선으로 반환되자 주민들은 2년어치 세금폭탄을 때려맞았다. 명불허전 헬조선이다.

1880년대에는 조선 최초의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고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개원했으며 근대식 학교인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이 설립되었다. 1887년 경복궁에 최초의 전등이 켜지기도 했다.

아시아[편집]

일본 제국[편집]

내부 혼란을 수습한 일본 제국은 1885년부터 내각제를 실시하며 초대 총리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얼마 후 나가사키에서 청나라의 수병을 지역 주민들이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도 동시에 천황의 막강한 권력을 인정하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메이지 덴노의 정치 개입은 이때부터 급감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하며 조선과 청나라의 일에 개입하기도 했다.

한편 1889년 화투 회사인 임천당이 설립되었다.

[편집]

1881년 동태후가 사망하며 청나라의 실권은 서태후가 장악해버렸다. 베트남에 대한 지배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으나 쳐발렸고 베트남을 프랑스령으로 넘겨주게 되자 청나라는 해군을 양성하며 북양함대를 증강했다. 이때 위세를 과시하다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함대를 적으로 여겨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본과의 사이도 나빠졌다.

한편 청나라도 외세 문물만 받아들였다고 벌써 열강이 된 줄 망상하고 있었는데 특히 조선의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을 반식민지로 만들기도 했다. 양무운동은 이때까지도 지속되었고 중국 최초의 철도도 개통되었다. 하지만 개혁파 내부의 갈등과 보수주의자들의 방해, 개혁 자체의 문제점과 적극적이지 못한 정책으로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편집]

압뒬하미트 2세가 전제 공포정치를 벌였으며 많은 정적들을 숙청했다. 제국을 이슬람의 중심으로 여기며 오스만 외의 무슬림들을 지원하는 정책이 있었다. 청나라, 조선, 일본에도 이슬람 포교 사업을 벌였다. 외교적으로는 친독일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국력은 계속 추락하고 있었고 프랑스로부터 튀니지를, 영국으로부터 이집트를, 그리스로부터 여러 섬들을 뺏겼다. 이로 인해 오스만의 황권은 실추되었으며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늘어났다.

러시아 제국[편집]

알렉산드르 2세가 로리스멜리코프를 최고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앉혔고 그는 보수반동 정치를 펼쳤으나 얼마 후 대중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로리스멜리코프가 제안한 새 개혁 헌법은 몇몇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맘에 들지 않았고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폭탄 테러에서 자리를 피하지 않고 다친 사람들을 도와줬으나 그 과정에서 테러를 한번 더 당해 암살당했다.

결국 새로 차르로 즉위한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테러범들을 조졌으며 농노 해방령을 제외한 모든 개혁안을 철회시켜 더욱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가 처형당하는데,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형이었다.

세르게이 비테가 재상으로 임명되어 러시아의 공업화를 추진했으며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고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일단 독일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독일에서 게르만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러시아에서는 슬라브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사이가 조금씩 나빠졌다.

동맹국[편집]

독일 제국[편집]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사회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였으며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했다. 또한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탄자니아, 나미비아, 미크로네시아 식민지 등을 개척했다.

1882년 5월 20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체결해 프랑스를 국제왕따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또한 베를린 회의를 통해 아프리카를 유럽 열강들이 사전에 분할했으며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식민지를 깊숙히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8년 카이저 빌헬름 1세가 죽자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3달 만에 사망하고 그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카이저로 즉위해 세계 정책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진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이권을 우선시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큰 갈등을 빚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1882년 5월 20일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특히 같은 게르만의 독일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남들이 베를린 회담으로 아프리카 땅따먹기를 할 때 지중해에 가로막힌 오스트리아는 아프리카에 발도 못 들이는 신세가 되어 대신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국민들은 전통이 길게 이어져내려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지지하고 존경을 표했으며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자유분방한 문화도 형성되었다.

한편 1889년 4월 20일 이중제국의 도시 중 하나인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알로이스 히틀러클라라 히틀러의 아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1882년 5월 20일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 오스트리아와 삼국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대외 식민지 개척에 나서 1882년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에티오피아로부터 넘겨받고 1889년에는 영국령 소말릴랜드 남부를 공격해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편집]

쥘 그레비 대통령이 쥘 페리를 국회의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정교분리 정책을 펼쳐 가톨릭 교육을 폐지하고 무상 의무교육을 도입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다시 맞다이를 뜰 정도의 군대를 양성했고 베를린 회담을 통해 아프리카 식민지를 대규모 확장했다. 또한 청나라를 쳐들어가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시킨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완전히 편입했다.

영국[편집]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해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더 확장했는데 오스만으로부터 이집트를 뜯어내기도 했고 조선의 거문도를 강점하기도 했다. 정작 주민들은 영국군을 조선군보다 더 좋아했다고 한다. 보어전쟁을 일으켰으나 네덜란드계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쳐발리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출간했고 코난 도일이 첫 셜록 홈즈 시리즈 작품인 주홍색 연구를 출간했으며 사회적으로는 혼란스러웠는데 잭 더 리퍼라는 미친놈이 연쇄살인을 벌여 사회 분위기가 어두웠다. 그리고 하층민들이 많이 양성되면서 신체적 조건이 부족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군인 징집도 힘들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주도형 복지의 시초격이 되는 하층민 지원 정책을 펼쳤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 제국에서는 영국의 어용 정당인 인도 국민 회의가 창설되었으나 훗날 이 정당은 인도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다.

에스파냐 왕국[편집]

망해가던 스페인을 살려놓은 알폰소 12세가 사망하고 당시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태아 알폰소 13세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6개월 후 출생해 정식 즉위했고 자식을 지나치게 아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을 받아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아메리카[편집]

미국[편집]

자유방임주의가 심해져 거대 기업 집단인 트러스트의 독점 문제도 심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산업화는 크게 이루어져 고층 건물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서기도 했으나 빈부격차도 심해지고 중소기업의 성장이 힘들었다. 조선을 개화시켰으며 팽창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러더퍼드 D. 헤이스 임기 종료 이후 제임스 A. 가필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부패 공직자 일소 정책을 펼쳤으나 부패 공직자들은 자기들 덕에 선거에서 이겼으면서 배은망덕하다는 주장을 했고 결국 가필드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체스터 A. 아서가 취임했다.

그는 엽관제와 매관매직을 금지시키고 행정고시를 실시해 공직 진출을 합당한 방법으로 하도록 했다. 그리고 관세율을 인하시켰으며 미 해군을 강화시키려 노력했고 세계 표준시 국제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때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듬해 조선에서 보빙사가 찾아왔는데 조선 선비들은 아서를 미국의 군주로 여기며 절을 했다고 한다.

차기 대선에서는 여태껏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겨왔기에 또 이길 줄 알고 민주당 대선 후보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과부 스캔들을 조롱하는 선거운동을 했으나 클리블랜드는 스캔들을 쿨하게 인정해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얻었고 결국 역풍이 불어 민주당의 클리블랜드가 간신히 당선되었다. 그는 공직자 부패 척결을 이어나갔으며 관세를 낮추고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노동자 문제가 불거져 노동자들이 대대적 폭동을 벌인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났는데, 비록 폭동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노동자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어 오늘날 노동절의 시초가 되었다.

차기 대선에서는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재출마하고 공화당에서는 벤저민 해리슨이 출마했는데 이번에는 간발의 차이로 공화당의 해리슨이 승리했다.

남미[편집]

볼리비아, 페루, 칠레간의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 일어났다.

1880년대생[편집]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가 모두 나온 세대.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시대를 살아 광복까지 맞이한다.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 여운형, 야틀러(1889-1945), 장제스(1887-197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