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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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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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1900년부터 1909년까지의 연대.

19세기의 끝이자 20세기의 시작이다.

근대 산업제국 시대의 마지막 전성기.

대한제국[편집]

고종의 독재[편집]

공화파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한국 역사상 최대의 군주권을 싹 다 쓸어모은 고재앙은 벨기에, 덴마크, 청나라 등과 동등하게 수교를 맺고 군제를 개편했으며 근대식 문물을 대대적으로 설치하는 등 광무개혁을 이어나갔다. 한편 가톨릭 신자들이 제주도에서 패악질을 벌이자 이에 반발한 제주도민들이 신축민란을 일으켜 가톨릭 신자들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고종 정권은 황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친위 보부상들을 이용해 밀어버리고 독재를 벌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그레이트 게임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친영 국가인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해주기를 바랬고 일본도 제국주의적 행보를 지속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주무르고 있던 러시아를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군은 1903년 압록강의 용암포를 점령했다가 미국, 영국, 일본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으나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았고 결국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한국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마음껏 지랄을 떨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반도 한복판과 만주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러시아군은 발틱 함대까지 아프리카와 동남아를 돌아가며 동해로 진주시켰지만 일본의 공격에 의해 단숨에 격파당했고 러시아 내부도 혼란스러워지자 결국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놓은 상황이었고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 러시아가 발을 뺐으며, 일본은 한국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얻어냈다. 결국 러시아는 영국은커녕 일본에게도 발린다는 이미지가 단단히 박혔고, 이것으로 그레이트 게임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편집]

러일전쟁 도중에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친위대가 강제해산당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침탈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자기가 다 해먹기 위해 황권을 드래곤볼마냥 수집했던 고종은 결국 나라가 허수아비로 전락하자 아무 힘도 쓰지 못했고, 결국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을사오적이 조약 체결에 서명했으며 박제순은 도장까지 찍어 확인사살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들고일어나 일제의 만행에 항거했다.

고종의 옥새가 찍히지 않았기에 을사조약은 엄연히 무효였지만 일본은 이를 체결되었다고 판단,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일본의 한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초대 통감으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한편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성에 따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이 사실을 일본에게 들켜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했고 일본은 이완용을 통해 정미조약을 체결해 입법권과 행정권, 관리 임명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 해산당한 군인들은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그들은 전국의 의병들에 합류해 정미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기유각서를 체결해 사법권과 교도행정권을 박탈했다. 이후 남한 대토벌로 의병까지 토벌해 이제 대한제국은 조만간 일본에 의해 멸망할 일만 남게 되었다. 결국 보다못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국제[편집]

아시아[편집]

일본 제국[편집]

타이완까지 획득해 아시아의 새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해 영국의 러시아 견제 목표를 충족시켜주고 일본은 한국을 지배할 암묵적 동의를 얻었다. 한국과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 양국이 충돌했으며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군은 발틱 함대까지 이끌고 와 일본을 침공했으나 손쉽게 격파당하고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키며 세계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 러시아를 한국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한국에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해 실질적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고종을 퇴위시킨 다음 정미7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해 군권을 박탈했다. 이후 기유각서를 체결해 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권까지 강탈했다.

[편집]

의화단의 패악질을 진압하지 않은 청나라는 결국 해외 열강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미국, 일본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당했으며 이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까지 개입해 신축조약을 열강들과 맺어 배상금을 대량으로 뜯기고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을 인정해야 했으며 사실상 나라가 개작살이 났다.

이후 서태후 일당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광서신정을 실시하는데 먼저 헌법 편찬작업을 하는 독판정무처를 수립하고 1907년 의회인 자정원을 설치했으며 1908년 8월 최종적으로 헌법인 흠정헌법대강이 편찬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최초의 근대식 법률 체계와 정치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두 달 후 광서제가 독살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광서제를 여태껏 괴롭혀왔던 서태후도 자신의 패악질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회개성 유언을 남기고 광서제 사망 바로 다음 날 사망했다.

청나라의 왕위계승 규칙에 따라 순친왕의 아들인 선통제가 2살의 나이로 청나라 황제가 되었다. 전해지는 썰에 따르면 이때 순친왕이 즉위식을 지루해하며 칭얼거리는 선통제에게 울지 마라, 곧 끝난다(快完)라고 말했는데 곧 망한다(快亡)와 발음이 비슷했고 정말로 멸망을 앞두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편집]

국력이 쇠퇴하자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며 전 세계 이슬람 신도들의 모금으로 다마스쿠스와 메카를 이어 히자즈 철도를 놓았다. 압뒬하미트 2세의 독재정치는 갈수록 극에 달했으며 지하조직이었던 청년 튀르크당은 이를 끝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압뒬하미트 2세는 퇴위했으며 실권은 이스마일 엔베르가 장악했다.

한편 이맘때 그나마 속국으로 남겨두고 있었던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 왕국이 오스만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면서 발칸 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동맹국[편집]

독일 제국[편집]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으로 국제적으로 안 좋은 이미지가 박혔고 독일은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셈이 되었다. 반면 3B 정책을 펼쳐 오스만 제국과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독일이 오스만과 함께 동맹국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팽창 정책을 이어나가면서 내부적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주도로 제국을 이끄는 현 체제를 지지했으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소수민족에게도 자치권을 주어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페르디난트의 정책은 급진적이어서 소수민족들에게 호응을 얻었으나 정작 세르비아에서는 슬라브 민족 통합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이 사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아나키스트인 가에타노 브레시가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급급히 왕으로 즉위했다. 이 당시 이탈리아의 노동환경이 아주 열악해서 좌파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한편 의회의 우파 세력들은 식민지 전쟁을 주장했다. 중국의 의화단 전쟁에 참전해 톈진을 식민지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탈리아의 대외 영향력은 미미했다.

협상국[편집]

러시아 제국[편집]

니콜라이 2세가 자유주의 세력의 뒤통수를 후려친 뒤에도 여전히 대가리 깨져도 차르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1905년 1월 22일 일요일에 차르에게 완곡하게 민생을 살펴달라는 시위를 벌였으나, 되려 군인들에 의해 대학살을 당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으로 민심은 완전히 차르에게 돌아서버렸다. 포템킨 함에서도 수병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에 분노해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일전쟁에서 한낱 일본 따위에게도 쳐발리는 일이 일어나버려서 그레이트 게임은 허무하게 종식되었다.

이후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평생 원수였던 영국과 어느 정도 뜻을 함께하게 되는데, 마침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영국과 함께 페르시아를 지배하기로 하고 1907년에 영러협상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한편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가진 상태로 태어난 바람에 황후가 치료자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리고리 라스푸틴이라는 괴승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척 했고, 이 이후로 라스푸틴은 차르 부부의 총애를 받아 비선실세가 되었다.

프랑스[편집]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에밀 졸라의 폭로로 인해 재조명되었으며 1906년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드레퓌스가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후 이 사건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던 가톨릭 세력은 큰 비난을 직면하게 되었고 1905년 정교분리법이 통과되면서 오늘날 프랑스 이념의 기본 가치 중 하나인 라이시테가 대두되었다.

한편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을 이어나가면서 세계 2위 수준의 식민제국이 되었다. 영국과는 식민지 부분에서는 경쟁했으나 외교적으로는 독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1904년 영불협상을 체결해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편집]

영토를 확장해 남극까지 진출하면서 세계 모든 대륙에 영토를 가진 세계 최강 국가로 올라섰다. 세계적인 전성기를 구가했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아들인 에드워드 7세가 영국 왕(이자 인도 제국 황제)으로 즉위했다. 이 시대는 빅토리아 시대와 구분해 에드워드 시대로 불리며 전체적으로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외교적으로 여태껏 고립정책을 취해왔던 영국은 독일의 세계 정책에 대항해 동맹을 찾을 필요가 있었고 결국 1904년 숙적이던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1907년 그레이트 게임의 적이었던 러시아와 영러협상을 체결하면서 삼국 협상 체제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팽창이 꽤 심각한 위협이 되었기에 아예 영국 의회는 영국의 해군력을 세계 2위, 3위의 합보다도 더 높아야만 한다는 해군법을 제정하면서 대대적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에스파냐 왕국[편집]

1902년 알폰소 13세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며 내각을 자주 교체해 국민들에게 큰 불만을 사기도 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와 결혼한 날에 암살 미수를 당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암살당할 뻔했다. 1909년 안토니오 마우라 내각이 붕괴해 의회 제도에 큰 허점이 생겼다. 또한 가톨릭 교회 개혁 문제와 산업화 문제, 노동자 문제가 산적해 있었으나 모로코를 식민지화시키는 데만 급급해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봉기가 터졌다.

한편 옆동네인 포르투갈에서도 공화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카를루스 1세를 몰아내고 마누엘 2세가 즉위해 공화주의자들이 득세했다.

미국[편집]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가 재선에 성공했으나 아나키스트 레온 촐고스에게 암살당하고 대통령 직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승계되었다.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을 재해석해 미국의 대외 팽창을 지지하는 독트린으로 왜곡했고 미국의 세계경찰론을 대두시켜 제국주의 행보를 보였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유럽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유럽인에서 더 진보한 미국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옳다는 사회진화론이 대두했다. 이때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해 일본이 필리핀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용인했다. 이때 한국에서 밀사로써 이승만이 파견되었고 한국 중립론을 받아들여달라고 했으나 묵살당했다.

또한 프랑스가 파나마 운하를 짓다가 실패하고 튀었는데, 이것을 미국이 받아먹어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를 강제 분리독립시키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이어나갔다. 필리핀에서는 미국에 반대한 독립전쟁이 일어났으나 진압당했고 이맘때 하와이가 공식적으로 미국으로 편입되었다. 주가 되려면 몇십 년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한편 당시 패악질을 심각하게 부리고 있던 대기업들을 반독점법으로 모조리 때려잡아 대기업들의 트러스트를 약화시켰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했으며 그 대신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나갔다. 하지만 1907년 미국에서 엄청난 경제불황이 찾아왔고 말년에 임기 레임덕이 왔다. 결국 1909년을 끝으로 2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으나, 훗날 3선 시도를 하다가 크게 깨지게 된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면서 인류는 땅, 바다 말고 3번째 공간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문화의 중심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고 있었는데, 미국은 드넓은 영토와 개방적인 사상으로 많은 이민자들을 포용했기 때문이다. 산업화도 미국이 점점 영국을 앞지르고 있었다.

문화[편집]

세계 문화는 미국과 영국이 주도했으며 각국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을 수용하다 보니 유럽 전통의 클래식 음악 대신 세계 각지의 음악들이 융합되어 블루스, 재즈 등등의 흑인 음악과 대중음악이 등장했다.

1895년 등장한 영화는 1902년 개봉한 달나라 여행을 시작으로 시나리오 영화라는 장르로 재탄생했으며 아직 흑백 무성의 단계이기는 했으나 본격적인 영화 문화의 시작이 되었다.

1896년부터 시작된 근대 올림픽은 1900년대에 들어 각국의 엑스포와 얽히면서 국가 홍보용 행사로 악용되기도 했다. 또한 축구와 같은 스포츠들이 19세기 후반처럼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과학 영역에서는 1903년 비행기가 발명되어 항공 시대를 열었으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특수 상대성 이론을 들고 나와 물리학계를 뒤흔들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0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