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20년대

조무위키

개요[편집]

1920년부터 1929년까지의 연대. 2020년대 기준으로 정확히 1세기전이다.

세계는 전쟁의 여파로 각국끼리 경각심이 커진다. 이때 겉으로라도 평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다음 연대에 좆망하지만.

일본령 조선[편집]

일제의 문화 통치와 내부분열 조장[편집]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일을 다시 터지게 하기 싫었던 조선총독부에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했고, 일본 내의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국과 사이토 마코토의 리버럴한 성향이 겹쳐서 일제는 문화 통치를 통해 식민 지배의 강도를 완화하는 척 하면서 동시에 친일파들을 늘리기 위한 민족의 내부분열을 조장하는 통치 방법을 고안했다.

  • 문관이 조선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실제로는 단 한 명의 문관 총독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이토 마코토를 제외한 모든 총독이 육군 출신이었다.
  • 조선 태형령을 폐지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꿨으나, 그 대신 경찰 수를 대폭 늘린 후 사복경찰을 잠입시키면서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한국어 언론을 허용했으나 검열제가 강화되어 언론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 지방자치 참정권을 부여하는 척 했으나 실질적으로 부군면 의회는 금수저들만이 낄 수 있었으며 그마저도 실권이 없고 자문만 하는데다가 의견조차 반영이 잘 되지 않는 기관이었다.

이 외에도 교육 기회를 여는 척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돈이 없는 조선인들은 교육을 받기 매우 힘들었고 회사 설립의 자유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자본에 한국 자본이 잠식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수가 매우 늘어났고 일제의 통치는 더욱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숨통이 놓였기 때문에 많은 문학 작품이 등장하고 조선 전통의 문화가 서양의 문화와 융합될 수 있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한 작품들도 많았고, 나운규 감독이 만든 아리랑은 현재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내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선 내에서의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이 와해되면서 국내와 잠시 단절되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당시 임정은 외교독립, 무장독립, 실력 양성 독립의 3가지 방법을 기초로 여러 의견이 갈리고 있었는데 이를 융합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국민 대표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운동 조직이 분열되었으며 임정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에서 탄핵당하고 대통령제 대신 국무령 제도를 도입하면서 임정은 이동녕과 김구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편집]

3.1 운동 이후 조선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간도, 연해주 일대로 이주했는데,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이후 만주 진출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진압하고 싶어했다. 결국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처음으로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만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훈춘 사건이라는 희대의 미친 자작극을 벌여 자국민인 일본인을 만주 마적을 이용해 학살했는데,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보냈고 잠복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기타 부대들이 일본군을 공격하며 청산리 대첩이 일어났고 독립군이 승리..했는데, 이 전투의 결과가 과장되었다는 설도 존재하니 걸러서 읽도록 하자.

더 부들부들거리던 일본군은 간도 학살을 벌여 민간인들까지 죽여댔고 내전 중이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로 이동한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볼셰비키들에게 학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기타 만주 독립운동가들은 3부를 수립해 조직을 정비했으나 일본이 만주 봉천군벌과 조약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이 위축되었다.

조선 내에서의 독립운동[편집]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이 조선 내에서 많은 무장 투쟁을 벌이며 일본의 골머리를 썩였는데, 대표적으로 김상옥 열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고 나석주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쪽바리들을 대국적으로 사살하면서 순국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조선 내에서 조선 민족의 힘을 양성하자는 운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물산 장려 운동을 펼쳤으나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실패했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경우 일제가 국립대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사실상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1926년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군주인 순종이 사망하자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으로 3.1 운동 때처럼 시위를 일으키려고 했고 이를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나 이번에는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금방 진압되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1927년에 신간회를 결성해 심지어 일본에게까지 허가를 받을 정도로 대성장했으나, 내부분열과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1931년 해산된다.

1929년 일본 학생과 한국 학생 간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광주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외에도 1923년 신안 암태도에서 소작민들이 투쟁을 했으며 1929년 원산에서 노동자 탄압을 계기로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는 일본의 노동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국제[편집]

승전국[편집]

미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 이후 국제 연맹이 수립되었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합 가입을 주장했으나 의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윌슨 대통령은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국제 연맹 가입 주장 연설을 했으나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에서 뇌경색으로 실신했다. 이후 아무도 모르게 그 아내인 이디스 윌슨이 대통령직을 계승했는데, 당시에는 대통령직 계승 법칙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정작 이디스 본인은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지만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되어 여성의 투표권이 전국적으로 허용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금주법이라는 악법이 존재했는데, 새로 취임한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정작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는 정치를 존나 못했고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나라를 말아먹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마무리지어 공식적으로 영국급의 해군력을 갖게 되었고 당시 해군이 급속도로 성장해가던 일본을 잠시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하딩은 임기 2년차에 사망했고 당시 잠을 자고 있던 캘빈 쿨리지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쿨리지 대통령은 부패 공무원들을 축출함으로써 재선에 성공했고 재선 이후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부통령 찰스 도스가 제안한 도스 안을 수용해 독일의 전쟁 배상금을 감경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기도 했다.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가 바로 이 시기이며 엄청난 문화 성장기를 겪고 있었다. 세계 문화의 패권을 이때 미국이 완전히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시장 방임주의가 극에 달하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보수적인 성향도 매우 강해져서 인종차별 단체 KKK가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좌파들에 대한 반감도 매우 심했다.

하지만 쿨리지 대통령 임기 종료 이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아직도 원인이 규명되지 못한 수많은 복합적 요소가 얽히고 얽혀 1929년 10월 24일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했고, 이와 동시에 미국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면서 대공황의 시대가 열려버렸다.

일본 제국[편집]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모두 강탈한 후 승전국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리버럴한 분위기가 퍼지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열렸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하고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출범한 후 추밀원 귀족의원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자 국민들은 호헌운동을 벌였다. 이와 함께 호헌3파 연정이 출범하며 기요우라 내각을 누르고 총선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며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출범했다.

이 시기에는 각종 사회주의 정당이 결성될 수 있었고 비밀리에 일본 공산당까지 창당되었다. 1925년 일본 사상 최초로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어 25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런 리버럴한 분위기를 이끌었던 가토 다카아키 총리는 정작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을 억압했다. 물론 일본 치안유지법의 애매모호한 조항 때문에 제정 초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자주 쓰이지는 못했다.

다이쇼 덴노 사후 쇼와 덴노가 즉위하며 장장 1989년까지 63년 동안 이어지는 쇼와 시대가 열렸는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가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잠시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의 양당 구도가 이어졌으나 잦은 분열 때문에 정우회에서 민정당으로 정권이 넘어왔고, 민정당 또한 내부분열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일본 관동군은 중국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을 암살하고 조금씩 중국 침략을 시도한다.

기술적으로는 1927년 도쿄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했다. 일본의 문화도 이 시기에 융성해지고 자유로운 풍조가 널리 퍼져서 아직도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다이쇼 로망으로 우아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화민국[편집]

호법전쟁이 흐지부지 끝난 후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 군벌이 세 팀으로 갈라져나갔는데, 이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장쭤린이 이들을 중재하려 했으나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화해 시도는 전부 파국으로 돌아갔고 안휘 군벌과 직예-봉천군벌 연합 간에 안직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직예-봉천군벌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5.4 운동 이후 광둥성으로 돌아온 쑨원장제스는 제2차 호법운동을 광둥 군벌 천중밍과 함께 펼쳤으나 쑨원이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다가 천중밍과 사이가 나빠져 영풍함 사건을 통해 쑨원을 축출했다. 한편 5.4 운동 이후의 분위기에 따라 창당된 중국 공산당과 당시 자주 일어나던 노동 운동들을 지켜보던 국민당 측에서는 소련에 커넥션을 시도하기도 한다.

1923년 북양정부에서 부정선거 사건이 일어나자 쑨원은 호법운동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이 손을 잡아 혁명을 이루려는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1925년 국민당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두 번에 걸쳐 광둥의 천중밍을 공격했으며 도중에 쑨원은 사망하고 장제스가 당권을 이어받았으며, 두 번의 원정이 성공하면서 국민당이 광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직예군벌과 봉천군벌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손봉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북양정부를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틈타 1926년 국민당이 북벌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1927년 3월 24일 난징에서 반외국인 폭동이 일어나면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논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결국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국민당이 공산당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우한 국민정부 대신 난징 국민정부가 새로 수립되었다.

이때 일본도 위기감을 느껴 산둥성에 군대를 보내 내정간섭을 시도했다. 7월 13일 국공결렬이 일어나고 우한 국민정부가 장제스에 대한 공세에 들어간데다가 북양군벌까지 역습하자 장제스가 남방으로 패퇴했고 공직에서 하야했다. 얼마 후 우한과 난징 간 통합 협상이 진행되자 일본군도 철수했고 북벌도 중단되었다.

이후 상계 군벌의 탕성즈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간에 당계전쟁이 일어났고 국민당 특위가 승리하면서 탕성즈 세력이 몰락했다. 이 틈을 타 장제스가 복귀해 왕징웨이가 합작했고, 장제스가 국민당 공직에 복직되며 북벌이 재개되었다.

이 틈을 타 일본이 다시 중국의 지난을 침공해 점령하면서 침략 계획을 드러내고 있었고 장제스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했지만 일단은 북벌에 집중하기로 했다. 장제스는 베이징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동북 지방으로 물러난 장쭤린이 일본 관동군의 기차 폭파 사건으로 암살당하자 동북 지방의 실권자가 된 장쉐량이 국민당에 복종하기로 하면서 1928년 12월 29일 최종적으로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했다.

한편 여태껏 중국 국민당을 공격하면서 산에서 홀로 투쟁하던 마오쩌둥의 중공은 강서로 이동했고, 중국을 통일한 국민당은 내분이 일어나 장제스 한 명을 몰락시키기 위해 국민당 합류 군벌들을 모아 장제스에 대항하며 반장전쟁이 발발했다. 소련도 장쉐량의 중동로 회수 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공했다.

러시아 공화국→소련[편집]

볼셰비키의 역습으로 백군의 전러시아 정부가 역관광을 당하고 멸망하며 백군은 바이칼 호 일대, 연해주, 캄차카 반도, 콜라 반도 등지로 몰렸다.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실상 러시아를 통일하게 되고 남은 백군을 소탕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 영국 해군, 일본군 등이 개입질을 하며 연해주에서 백군을 지원했으나 대부분 볼셰비키군에게 깨진 후 철수했으며 일본은 끝까지 버티다가 볼셰비키의 트랴피친 부대에 의해 일본인 민간인들까지 학살당했다. 트랴피친 부대는 전쟁범죄 혐의로 볼셰비키에 의해 숙청당했다.

바이칼 일대부터 연해주까지에는 극동 공화국이라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괴뢰국이 수립되었다. 이들은 극동 지방의 잔재한 백군들을 토벌하는 것을 도왔다.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또한 미친 행각을 벌이다 적군에 체포되어 총살형당했고 외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으로써 분리독립되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위성국이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핀란드를 이기는 데는 실패했고 그들과는 전쟁을 마무리지으며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스. 부하라, 호라즘 소비에트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됨과 동시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은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었고 이슬람계 바스마시 반군 등이 여전히 설쳤으며 1923년 이후 남은 백군은 시베리아 극동의 페필랴예프 군단이었으나 6월 16일 토벌당하고 마지막 남은 니콜라예프의 군단도 1924년 12월에 소멸, 야쿠트-퉁구스 반군은 1925년 5월 토벌당했다. 그 이후에도 퉁구스 계열 반군은 1931년까지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은 1924년에 이미 철수했다.

한편 1921년 사실상 내전이 소비에트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을 때 전국이 개작살이 난 상태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며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이르다고 판단, 임시방편으로 자본주의적 정책인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다. 이 정책 덕분에 소련의 경제는 회복되어갔고 서양과도 선을 그어 대공황의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는 것은 막아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빈부격차는 커져만 가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도 생겨났으나, 당연히 골수 빨갱이들로 구성된 소련에서는 이들을 탄압했다.

1918년 암살미수 사건 이후 쇠약해진 레닌은 1924년 사망했고, 그는 평소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해나가는 모습을 경계하며 스탈린을 숙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레닌 사후에 알다시피 스탈린이 집권했다.

그는 라이벌인 레프 트로츠키를 몰아내기 위해 트로츠키의 사상인 전세계 공산화론을 반대하며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했다. 얼마 후 트로츠키는 권력 싸움에서 패배했고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초기 스탈린의 영향력은 트로츠키에 비해 훨씬 딸렸기에 트로이카 체제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삼두정치의 다른 두 명인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는 분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했고 스탈린이 그들을 숙청할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같이 숙청당했다.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소련의 모든 행정력을 산업화에 쏟아부었다. 1929년에는 중국에서 중동로 사건이 일어나자 만주를 침공해 승리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장군 바실리 블류헤르는 훗날 1937~38년 대숙청 시즌에 숙청당한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는 사실상 얻은 것이 없었고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확산되어가던 도중 베니토 무솔리니가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규합해 전투 파쇼당을 창설했고 이를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재개편한 후 친위대 검은 셔츠단을 조직해 지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의회까지 진출했으며 좌파들을 때려잡은 후 로마로 진군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재가를 받으며 이탈리아의 집권 정당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을 즉시 숙청하고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되어 반대 의사를 표하는 좌파들과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고 백색테러를 저질렀다. 한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연기질을 하면서 리비아 식민지의 이슬람교도들을 존중하고 무솔리니 본인은 무슬림들로부터 이슬람의 수호자마냥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자국민을 깎아내리고 이슬람을 본받으면서 파시스트로써 자라나라는 클리셰의 양판소들을 양산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자는 스파치오 비탈레로 불리우는 망상이 조금씩 구상되기 시작했다. 한편 1929년 교황 비오 11세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 내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위치한 권역을 바티칸 시국으로 분리독립시켜주었다.

프랑스[편집]

프랑스의 집권세력이 된 블록 나쇼날은 교황청과의 외교를 재개하는 등 친가톨릭 성향을 보였고 좌파와 노동자들의 시위 및 파업을 진압했다. 하지만 국고 유출이 매우 심각해져 결국 1924년 프랑스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결국 우익 세력은 차기 총선에서 패배하고 중도주의자와 좌파의 연맹인 카르텔 데 고슈가 승리하며 집권당이 되었다. 새 내각은 국제연맹에 가입한 후 미국에서 등장한 도스 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좌파들은 재정적인 문제를 타협하지 못했고 결국 큰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1928년에는 좌파의 무능으로 인해 우파가 다시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했으나, 당파 정치에 질린 국민들에 의해 우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의 시도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파시즘이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극우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모로코 북부에서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리프 공화국을 진압하려는 스페인을 도와 리프 전쟁에 필리프 페탱 등을 파견했다.

영국[편집]

대영제국은 전쟁 승전 이후 독일 식민지까지 빼앗으며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국가로 올라섰으나 전쟁으로 국력을 크게 소모하면서 이미 미국에게 패권국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는 영국의 최전성기임과 동시에 쇠퇴기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전역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1922년 친영파가 많은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아일랜드의 자치를 허용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이 눈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와 동시 당시 영국의 정식 국명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에서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수정되었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공업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동시에 성차별을 조장하는 쓰레기 메갈 사상인 페미니즘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메퇘지고 뭐고 이 시기에 영국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었다.

한편 영국 보수당을 견제할 정당으로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당이 급부상했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보수당과 노동당은 영국의 양당 구도를 이루고 있다.

한편 인도 식민지에서는 1919년 롤레트 법이 통과되어 영국 반대 인도인을 영장 없이 처벌하는 법안이 통과되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등이 이에 맞서 Be폭력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동지이지만 성향이 반대되었던 자와할랄 네루의 경우 투쟁식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패전국[편집]

독일[편집]

패전 이후 1919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을 도입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사회권을 규정했으며 여성의 참정권 보장, 언론 및 집회, 정당 결성의 자유 보장, 영장 없이 구속을 할 수 없으며 도청과 사찰을 금지했다.

하지만 좋은 제도가 있으면 뭐하나. 독일은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배상금에 시달렸고 나치당 같은 파시즘 정당들이 양산되었다. 독일 정부는 이를 갚기 위해 배상금을 양산하다가 엄청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얄마르 샤흐트렌텐마르크를 발행하면서 인플레이션은 사그라들었다.

1923년 프랑스가 독일의 루르를 강점하자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프랑스의 위치는 뒤바뀌는데, 세계적으로 프랑스가 막대한 규탄을 받고 독일이 동정을 받았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마저도 프랑스의 행보를 규탄했다. 이 과정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능한 행보를 보이자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켜 전국적인 인기를 얻는다.

1924년 미국 부통령 도스가 도스 안을 제출하자 프랑스는 철수했고 독일의 배상금이 줄어들어 안정기를 맞이하고 정치도 안정되었고 문화적인 발전도 거쳤다. 한편 1925년 폴란드와의 영토 문제 등 여러 이유로 갈등을 빚고 결국 무역전쟁이 터졌다. 외교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둬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며 독일은 다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며 폴란드를 국제왕따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 뮐러의 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외교적 문제가 비화되고 다시 좌우대립이 심해졌으며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마자 독일 경제는 다시 떡락했다.

오스트리아[편집]

오스트리아의 경우 막대한 영토가 한순간에 날라가 내륙국이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정국을 기독사회당이 주도했다. 하지만 독일처럼 막심한 혼란만 아니다 뿐이지 여전히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갈등이 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가 보수주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사회주의자들은 전국적인 파업을 벌였다.

이와 같은 혼란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도 조금씩 파시즘이 퍼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터키[편집]

패전 이후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며 오스만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신생 쿠르드 자치령에 의해 분할되었고 오스만의 영토는 앙카라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만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나타나 터키 독립전쟁을 선언하고 수도 앙카라까지 진주해오던 그리스군을 기적적으로 격파한 후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 및 이스탄불까지 수복했다.

이후 아타튀르크는 술탄 메흐메트 6세를 폐위시키면서 이슬람 최후의 술탄이자 칼리프가 물러나게 되고, 오스만 제국은 최종적으로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터키는 강대국들을 향해 새로운 영토를 제안했고 결국 로잔 조약을 통해 오늘날의 터키 영토가 되었다. 이후 아타튀르크는 독재를 시작하며 이슬람교를 완전히 배제한 체 강한 정교분리와 서구화 개혁, 샤리아 폐지, 아랍 문자 폐지 후 라틴 문자 채용 등을 이루었다. 대신 쿠르드 등 소수민족들에게는 잔혹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도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인 천문학자가 서양식 복장을 독재자에 의해 강요받았다는 내용으로 간접 언급된다.

한편 이슬람 세계는 10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칼리프가 사라지면서 막대한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북아프리카야 식민지였고 1922년 이집트가 그나마 영국의 간섭을 받는 나라 중 하나로 반독립한 정도였다. 중동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사막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장악당했다. 페르시아에서는 무능한 카자르 왕조가 쿠데타를 통해 쫓겨나고 팔레비 왕조가 수립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토후국들은 영국을 도와 오스만을 몰아낸 후 영국에게 배신당하자 헤자즈 왕국의 후세인이 스스로를 칼리프로 선언했는데, 이는 아랍인들의 반발을 사고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아지즈가 후세인을 공격해 헤자즈를 정복했다. 그는 네지드-헤자즈 이중왕국의 왕이 되었고 훗날인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게 된다.

에스파냐 왕국[편집]

모로코에서 반스페인 베르베르족 반군들이 리프 전쟁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러 간 스페인군은 되려 격파당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 내부적으로 많은 혼란이 잇따랐으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땅끄를 몰고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왕 알폰소 13세의 재가를 받자 전부 아가리를 닥치게 되었다.

이후 리베라가 왕의 재가를 바탕으로 독재를 시작했으며 계엄령 선포 및 언론 탄압과 카탈루냐 및 바스크 탄압을 개시하자 막대한 반발을 샀다. 결국 대공황으로 직격탄을 맞자 군부 내에서도 리베라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생기고 리베라는 1930년 사임하고 망명하게 된다. 이를 통해 왕정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작살난다.

문화[편집]

이 당시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급성장하며 문화의 주도권 또한 미국이 갖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네온사인 간판과 각종 마천루들이 들어서고 있던 뉴욕이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뉴욕으로 넘어가 미국의 문화를 더욱 풍부하고 융합적으로 만들었다.

노래[편집]

블루스를 기반으로, 뉴올리언스 주를 중심으로 초기 재즈가 미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들은 연주를 녹화한 음반들을 팔았는데 이는 음악 음반시장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루이 암스트롱이 이 시대를 대표했다.

한국에도 블루스(부루스)가 퍼져 술집에서 자주 연주되었고 암울한 민족 분위기와 합쳐져 트로트가 되기도 했다. 한국 가요의 본격적인 출발이 시작된 시기이다.

영화[편집]

월트 디즈니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 컬럼비아 픽처스 등의 영화사가 설립되었으며 찰리 채플린 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도망 온 유대인들도 영화산업에 투자하면서 영화산업은 더욱 거대해졌다.

미래를 다루는 장르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으로 100년 뒤의 사회상을 다룬 메트로폴리스가 있다.

패션[편집]

가브리엘 샤넬이 한참 활동하던 시기. 리틀 블랙 드레스도 이 때 나왔다.

여성들의 직업 진출로 인해 과거의 전통적인 복장이 아닌 점점 현대적인 복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2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