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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50년부터 1959년까지의 연대.

1940년대 전쟁과 피폐 등으로 격랑을 겪었던 시기라 이 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 점차 경제부흥의 기미가 보이기도 하였다. 북괴가 쳐들어와서 지랄한 시대.

정권은 이승만 정권으로, 딱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집권하였다. 전쟁 시기로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안을 안겨주었던 년도이다.

대한민국[편집]

한국전쟁[편집]

전쟁의 조짐[편집]

1950년으로 들어오며 제헌 국회가 끝나고 2대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시기가 왔는데 하필 반민특위 사건이 런승만에게 빅 엿을 선물해서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이겨버린다. 이대로라면 1952년 대선신익희조봉암이 선출될 것이고 런승만은 조금씩 쫄리기 시작한다.

이때 미국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머한민국을 제외했다. 또한 북한에서도 김일성이라는 악마가 군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소련을 돌아다니며 남쪽을 침공할 떡밥도 뿌리고 있었다. 장도영, 김종필, 박정희 등이 미리 북괴의 심상치 않은 행보를 발견하고 수뇌부에 보고했으나 윗물들은 놀기 바빴다.

북괴의 남침[편집]

결국 6월 25일에 북한의 대대적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은 중국과 소련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강려크한 무기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3일 만에 털고 국군은 수뇌부부터 꽝이라 계속 밀렸다.

대한민국 정부도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하고 부산으로 이전했으며 대량의 피난민들이 발생했다. 또한 북한군 점령지에서는 인민재판 등의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막아내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경기도를 탈환하면서 38선 이남 영역을 모두 되찾았으며 38선 이북까지 진출해 평양, 원산을 털고 중국 국경까지 치고 올라갔다. 여기서 북한의 김일성이 뒈지기 두려웠는지 몰래 중국군을 끌어들이려 했고 정말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인해전술로 이북 영토를 다시 빼앗겼다.

1951년 1월 4일에는 1.4 후퇴로 서울을 또 뺏겼다. 이 해에 이승만 정권의 부역자들이 자유당을 창당했다.

휴전 회담과 발췌 개헌[편집]

다시 서울이 탈환된 후부터 슬슬 양쪽 모두 현타가 왔는지 휴전 회담이 개시되었고 남한 정부는 휴전회담에 반대했다.

1952년에도 휴전 회담은 지속되었고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가 길어지면서 쓸데없는 시간만 낭비하던 중 다음 대선 기간이 되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간접선거제를 실시하던 당시 국회는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장악했고 당연히 신익희가 차기 머통령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자유당이 권세를 누리려면 이승만이 당선되었어야 하는데 당시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꽝이었고 전쟁 기간임을 고려해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전쟁 기간에 대통령을 바꾸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고 이승만에게 몰표를 몰아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국회에 출석하던 국회의원들을 버스 채로 연행해서 국회에 못 가도록 방해했고 개헌 투표에서 '좋은 것만 발췌했다'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인 발췌 개헌에 성공했다.

얼마 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예상대로 국민들이 이승만에게 몰표를 줬고 이승만은 4년 더 집권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휴전 회담도 드디어 답이 보였는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무기한 정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편집]

막상 전쟁이 휴전에 들어갔지만 그 고통은 상당히 심각해서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지 60년 가까이 되어갔지만 기존에 만연했던 신분제는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신분 확인이 문제가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 체제가 시작되어 미군에게 쪼꼬릿을 얻어먹으며 살아가는 등 그나마 최소한의 희망만 남겨두었다.

사사오입 개헌[편집]

1954년이 되고 총선이 열렸으며 전쟁으로 북한에 대한 감정이 최악임을 이용하고 천재적인 후보 공천으로 압승했다. 참고로 이때 자유당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중 한 명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이다.

자유당이 국회도 장악했겠다, 자기들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현재 대통령인 이승만도 평생 대통령을 해야만 했다고 판단, 이승만이 영원히 대통령을 할 수 있게 '초대 대통령 한정 무제한 출마'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리고 자유당 114석 빨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재적 의원의 2/3이 찬성하는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실패했다. 하지만 헬조선의 전통이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 였다.

자유당은 바로 어용 수학자를 고용해서 '135.3333...석 미만이면 개헌이 안 된다라니 이게 뭔 개소리냐! 이 세상에 135.3333...석이 어딨냐! 사람이 소수점으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이냐! .3333...은 사람이 아니니 반올림해서 135석 미만이어야만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딱! 135를 채웠으니 개헌도 가능한 것이다!'를 외쳤다. 이런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당당히 씨부렸던 것.

그리고 이 논리를 최순주 국회의장에게 내밀어 '우리 이렇게 개헌하는 게 어떻겠나요~' 하며 후장을 핥아줬고, 민주국민당은 이게 뭔 개소리냐 하며 반발했지만 최순주도 자유당 편인 덕에 '거 그럴듯 하구만 기래~ 개헌안이 의결되었읍니다 땅땅땅!'을 외치며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들 반응은 의외로 난리가 나지 않고 그럭저럭이었는데, 당시가 1954년으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잇대는 모두 일제강점기를 겪고 체험했기에 민주주의 의식이 없었고 학력도 최악이었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것은 당대에 지식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확실한 건 이때부터 자유당이 선을 넘는다.

또한 민주국민당도 친일파 일색인데다 뚜렷한 정체성도 없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955년에 대대적인 개선에 들어가고 독립운동가 출신 신익희를 중심으로 하여 반자유당을 내세우는 새 정당 민주당을 창당했다.

제3대 대통령 선거[편집]

1956년이 되고 대통령 선거가 또 다가오자 자유당의 목표는 출마권이 무제한으로 늘어난 이승만을 또 당선시키는 일이었다. 민주당도 철저한 준비로 신익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한때 농지개혁법을 이끌었던 조봉암진보당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했다.

자유당 vs 민주당 판국으로 보였던 선거에 이런 변수가 등장해버렸고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조봉암이 농지개혁법 때의 일로 지지기반을 만들어 민주당의 입지를 위협했고 하필 이때 신익희가 선거유세 중 병으로 죽으면서 상황은 더 꼬였다. 역시 막장 드라마도 현실은 못 이기는 모양이댜.

결국 민주당 지지 표는 민주당의 신익희 추모표로 들어가거나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돌아가 갈려버렸고 자유당은 무난하게 대선에서 우승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우승했다.

비록 선거에서 이겼지만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자유당을 매섭게 위협했기 때문에 자유당의 다음 처리대상은 조봉암이 되었다.

진보당 사건[편집]

민주당에서는 신익희가 죽자 조병옥이 당대표가 되었고 개편된 체제로 1957년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장충단 집회를 열었으나 자유당의 어용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와해당했다.

하지만 3년 전과 다르게 1957년은 세대가 많이 바뀐 시기였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세대가 늘어나면서 자유당의 이런 횡포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늘었고 자유당의 예상과 다르게 민심이 민주당에 돌아갔다.

1958년부터 이전 해의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과 함께 미국이 우주개발에 돈을 쏟아붇기 위해 미국의 원조경제가 차관 지원 경제로 전환되면서 대한민국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당연히 자유당 지지율도 떡락했다.

그런데 4대 총선에서도 진보당과 민주당이 자기들을 쳐바를 것이 쫄렸고 특히 조봉암이 거슬렸기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조지고 진보당도 강제 해산시켰다.

드디어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국민 수준이 늘어난 게 불안불안했지만 진보당 강제해산 두 스푼에 게리맨더링 한 컵을 타고 닭죽 부정선거 몇 스푼을 탄 끝에 또 이기긴 이겼다. 그런데 민주당이 또 치고올라왔다.

신국가보안법 파동[편집]

막상 이겼는데 4년 전과 다르게 자유당 개샊끼를 외치는 학생들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서 이기붕이 장악한 자유당 놈들은 이 시츄에이숑이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문제는 1959년에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해 해결했다. 이제 자유당을 욕하면 바로 공짜로 물 마시러 끌려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완전히 통제하고 언론까지 장악했지만 자유당의 븅신들은 1절이란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세계[편집]

제1세계[편집]

미국[편집]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재선한 후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잠시 배제된 적이 있었으나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군과 함께 한국을 도왔다.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도 인천상륙작전을 이끌며 활약했으나 맥아더가 갈수록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며 트루먼과 갈등을 빚자 결국 짤렸다.

1950년대 미국은 냉전 제1세계(자유진영)의 맹주로써 군림했다. 1950년대 초에는 조지프 매카시라는 또라이가 폭주하며 빨갱이 몰이를 하는 매카시즘이 판을 쳤다. 당시 소련의 공산권이 도미노 효과로 확산되자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심각히 경계하게 되었고 이는 매카시가 날뛰는 모습을 용인하게 되었다. 매카시즘 분위기 아래에서 문화가 침체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찰리 채플린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도 빨갱이몰이를 당했다. 하지만 매카시는 선을 넘으며 군대까지 빨갱이로 몰다가 결국 본인도 날아갔다.

1953년에는 전쟁 영웅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전 당선자 시절에 한국전쟁 종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그는 1960년에 한국을 또 방문하면서 대통령 자격으로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전역에 고속도로들을 설치하고 군사 산업 복합체를 견제하고 민간 기업을 지원해 경제 발전을 촉진했고 1957년 리틀록 사건에서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이 등교할 수 있게 하면서 흑인 인권 신장에도 기여했다. 또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전쟁을 일으키자 적성국인 소련과 함께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어 수에즈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로 인해 중동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더 수월하게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이에 맞서 미국 최초의 우주선인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면서 우주 경쟁 시대가 열렸다.

일본[편집]

일본은 패전 이후 경제가 매우 피폐해졌으나 한국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일본을 병참기지화하며 많은 군수 공장들을 세웠고, 이를 통해 일본은 전쟁 특수를 맞이하며 공업이 급격히 발전했다. 1951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어 일본은 GHQ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급격히 발전했으며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벗어나 호황을 맞이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이 창당되면서 일본 정치계에서는 55년 체제가 열렸다. 일본은 제1세계의 또다른 주축으로 성장했고 이때 좌익 활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도 독도 관련 문제 등으로 갈등을 자주 빚고 있었다.

중화민국[편집]

아직도 중국 일대에 일부 남아있던 국민당군은 1950년대 내에 대부분 토벌되었고, 타이완으로 망명한 국민당 정부는 1949년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를 개시했다. 이때 대만은 언제 중국에게 침공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 쩌둥이가 병신짓을 하러 가면서 한 숨 돌리게 되었다. 비록 중공의 독재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일당 독재를 벌이는 법안을 도입하면서 선거도 제대로 치뤄지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이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타이완 섬 근처의 여러 작은 섬들을 쳐들어가 중공에 편입하면서 대만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58년 진먼 포격전이 발발해 중국의 침공을 받을 뻔했으나 타이완의 강력한 저항으로 중국이 물러났다.

서독[편집]

새로 들어선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은 반공을 내세우며 기존의 사이가 나쁜 유럽 국가들과 화해하여 반공 전선을 구축하기로 하는데 이때 EU의 전신인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 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온 군국주의를 뿌리뽑고 서양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재무장 문제를 선진국들과 의논해 '네오나치를 방지하기 위해 재무장을 허용해야 한다'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1955년 독일 연방군 설립을 연합국들로부터 허락받았다.

마셜 플랜으로부터 이어져온 독일에 대한 미국의 경제 지원은 전쟁 발발 이전 수준의 경제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라인 강의 기적의 시대가 열렸다. 독일은 다시금 경제 강국에 반열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소련의 흐루쇼프가 서베를린과 관련해 협박을 하자 내각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늘리려는 의도를 보이자 민심을 잃게 되었다.

한편 독일과의 합병이 금지된 오스트리아는 1955년까지 군정을 받다가 분할통치가 종료되고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탈리아[편집]

이탈리아의 새 지도자가 된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는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NATO를 지지했으며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수립에도 기여했다. 영국이 점령했던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는 다시 이탈리아에 반환되어 신탁통치 형식으로 1950년대 내내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편집]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내각의 권력이 약해서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이는 온건파와의 연정으로 어느 정도 굴러가기는 했으나 내각이 수없이 바뀌었고, 정작 이런 상황에서도 식민지만은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에게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북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고 이는 베트남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또한 수에즈 전쟁에서도 행패를 부리다가 미국에게도 손절당했으며, 알제리가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프랑스 시민들은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결국 제4공화국은 붕괴, 오늘날의 프랑스(제5공화국)가 수립되었다.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은 강력해졌으며 초대 대통령으로는 샤를 드 골이 취임했다. 드골은 초기 알제리 독립군을 강경 탄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알제리 전쟁 도중 여러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는 되려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가 고립당하는 상황을 낳았고, 결국 1959년 알제리인의 운명은 알제리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알제리 전쟁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영국[편집]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은 영국의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핵개발을 위해 군비를 늘렸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방위 예산이 증가하자 복지비가 줄었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는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이 재집권했다. 처칠 내각 도중 조지 6세가 사망하지 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대영제국 여제로 즉위하며 영국의 현대 시대인 엘리자베스 시대가 열렸다.

영국은 대영제국을 해체하고 독립국들이 구성한 영연방으로 재편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대표되는 복지 정책을 통해 영국은 세계적인 복지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경제 발전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1956년 수에즈 전쟁 때 프랑스, 이스라엘과 같이 이집트를 패다가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동시에 경고를 받으며 빠꾸를 먹기도 했다.

제2세계[편집]

북괴[편집]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반공주의자 및 기독교도들, 자본주의자들과 지주들을 학살하고 탄압한 북한 정부는 자만에 빠져 적화통일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권력을 미리 축적해놓았으며 남침을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 요청을 하지만 71번씩이나 빠꾸를 먹었다. 소련은 전쟁 피해 복구가 최우선이었고 미국과 싸워서 괜히 핵 맞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회복에는 관심 없고 국제정치에 대해서는 좆도 모르던 마오쩌둥은 북한의 개소리를 받아들이고 김일성을 돕기로 한다. 이후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설득해 북한의 남침을 용인하도록 꼬드겼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 침공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대전, 광주 등을 점령해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일대까지 밀어붙였다. 북한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는 인민재판과 자본가 학살 등이 자행되었다. 그 도가 지나쳐 단 1년 만에 북한의 잔혹함을 모든 한국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게 되었다.

다부동 전투에서의 북한군의 패배 이후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여 북괴를 역관광시켰고 북한은 평양까지 남한과 UN에게 먹히고 압록강 일대까지 몰렸다. 이런 북괴를 부활시켜준 희대의 짱개새끼가 바로 마오쩌둥인데, 중국은 북한을 도운 후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들 지정학적으로 한국, 일본에 막히기 때문에 자국에 국익도 되지 않고 되려 전후 회복에나 집중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국제질서를 잘 알지도 못한 채 '공산주의 국가니까' 북한을 도와주러 군대를 많이 파견하게 되었고, 그 덕을 본 북한군은 다시 밀고 내려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했다. 그리고 북한군은 또 한번 학살을 벌였다. 이후 국군이 서울을 탈환한 후 38선 부근에서 교전이 지속되고 휴전 협상을 진행하다가 1953년 스탈린이 뒈지자 한국전쟁은 정전(Ceasefire) 상태에 들어가 현재까지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후 북한에서는 종파 간의 갈등이 생겼다.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사이도 나빠지고 있었다. 결국 박헌영은 패전 이후 숙청당했다. 그 이후에도 노동당 내 파벌 갈등이 있었는데, 소련파와 연안파는 경공업 우선주의를 주장했고 갑산파와 김일성파는 중공업 우선주의를 주장했다. 사실 김일성은 소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김일성이 인지도가 높아 북한 지도자로 앉혔을 뿐이었다. 결국 김일성 반대파들이 선빵을 날렸으나 최용건이 미리 발견하고 김일성에게 찔렀다. 이후 반대파들이 더 큰 목소리로 김일성을 비판하다가 결국 친김일성파들이 역습해 분위기가 살벌해지면서 소련파와 연안파는 소련,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8월 종파 사건을 접한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행보에 반발하며 당사자들을 복권시킬 것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이길 힘이 없었고 잠시 굴복하지만 1958년 소련과 중국 간 갈등이 빚어지면서 은근슬쩍 시간을 끌며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종파들을 싸그리 숙청하면서 김일성의 권력이 공고해졌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김일성은 초기 주체사상에 해당하는 소련과 중국에 휘둘리지 말자는 이념을 갖게 되고 이를 독재에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제적으로는 1954년 3개년 계획으로 전후 복구를 어느 정도 이루고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에 찾아가 물자 지원 요청을 했으나 빠꾸를 먹어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천리마 운동이 개시되었고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 전체 근로자의 노력 경쟁 운동으로 본격화시키고 전 범위에 걸쳐 확산시켰다. 하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애초에 공산주의 체제라는 한계도 존재했다.

짱깨[편집]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장악한 중국공산당마오쩌둥은 중국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애꿎은 티베트를 침공해 강점하면서 오늘날의 중국 영토를 확정했다. 이후 윈난성의 국민당 잔당들과 하이난 섬까지 점령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 허가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자국에서 전후 복구 사업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괜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침략국으로 규정되어 외교적으로 고립당했다. 이후 중국은 기존의 우익 세력과 자본가 세력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학살을 자행했다. 우파가 아닌 사람을 우파로 몰아 인민재판하여 죽이는 반우파 투쟁을 자행하기도 했다.

대만의 진먼을 쳐들어가 포격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대만의 강력한 저항으로 대만 정복은 실패했다.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한 이후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자 불안함을 느낀 쩌둥이는 소련을 자본주의 세력과 결탁한 부패한 국가라고 주장하며 소련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59년 중소 합작 사업이 파기되면서 양국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또한 쩌둥이는 경제 면에서도 희대의 병신짓을 저질렀는데, 미영소를 따라잡겠답시고 대약진 운동제사해 운동을 벌인 것이다. 대약진 운동 때 숲을 파괴하고 토법고로라는 싸구려 DIY 용광로를 만들어 있는 금속 없는 금속 싹 다 때려넣어 중국의 금속들은 전부 괴랄한 싸구려 합금으로 돌변했고 제사해 운동을 통해 애꿎은 참새들을 해로운 새라며 조져댄 탓에 되려 해충들이 들끓게 되었다. 이런 병신같은 만행에 반발한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숙청당하면서 중국의 경제는 밑바닥을 찍게 되었다.

소련[편집]

제2세계의 맹주로 군림한 소비에트 연방은 동구권과 북한, 중국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은 전후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으나 김일성이 남침하겠다고 떼를 쓰자 71번이나 거절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중국까지 가세해 남침을 요구하자 결국 남침을 허가하고 그렇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소련은 무기를 지원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 협상이 가속화되어 한국전쟁은 정전 상태에 돌입한다.

이후 소련에서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새 서기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에 들어가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다. 숙청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던 스탈린 시대는 종식되었고 일개 독재자에 불과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런 스탈린 격하는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고 결국 이로 인해 중국과 갈등을 빚고 파국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미국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소련의 군사력과 항공 우주 기술을 급격히 발전시켜 미사일 강국으로 올라섰다. 19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주선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전 세계에 스푸트니크 쇼크를 주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 경쟁은 서로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미소 간 대립은 역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또한 독재자였던지라 공산권의 질서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 개혁 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해 개혁 정부를 몰아내고 관료들을 처형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동안 진보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옹호받아왔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민주화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 즉 신좌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독[편집]

1949년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빌헬름 피크가 집권했다. 동독이 수립된 후 공산권에서는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공산당의 집권 아래서 우아하게 발전하는 동베를린과 동독의 위엄에 지려 동독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망상을 했으나 그딴 거 없었고 공산당의 일당 독재 때문에 많은 동독과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선진국들과의 약속도 약속이었던지라 서베를린을 함부로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시기 서베를린에 장벽을 세우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물론 공업 강국인 독일 땅에 세워진 공산국가였다 보니까 공산권에서는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제3세계 그리고 기타[편집]

동남아[편집]

베트남[편집]

1949년 프랑스가 남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하고 남베트남을 괴뢰국으로써 지배하다가 1955년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 독립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프랑스는 북베트남의 독립도 승인했다.

이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간에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베트남은 남북통합 총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남베트남과 미국이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남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파르티잔 테러를 벌이면서 파국으로 이어졌다.

태국[편집]

태국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라마 9세의 치하에서 여러 쿠데타들을 묵인해 황권 강화에 이용했고, 미얀마는 우 누가 총리로서 버마 연방을 다스렸으나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박탈한 정치를 했고 공산당과 소수민족의 봉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라오스, 캄보디아[편집]

라오스는 라오스 왕국으로 독립했으나 베트콩들과 왕자들이 난을 자꾸 일으키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다. 캄보디아는 1953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후 노로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한 캄보디아 제1왕국이 수립되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편집]

필리핀은 로하스, 키리노, 막사이사이 등의 대통령들이 있었다. 다만 막사이사이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영국령 말레이는 계속 영국령으로 남아있었고 인도네시아는 독립 이후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했다. 이 과정에서 반둥 회의를 개최해 제3세계 결속을 주장했다.

인도[편집]

1950년 인도 자치령이 인도 공화국으로 거듭난 후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외교 중립 노선을 탔는데, 반둥 회의에 참석해 제3세계 결성에 기여했다.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문제로 자주 분쟁을 빚었고 티베트 때문에 중국과도 자주 충돌했다. 네루 총리는 세속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힌두 극단주의자들을 쳐내며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토지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로 국유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효율적이지 못한 경제 체제가 고착되어 인도 경제가 큰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중동[편집]

이란[편집]

이란의 경우 적극적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며 위에서부터의 근대화인 백색혁명을 주도했다. 히잡과 차도르를 금지시키고 여성 참정권 보장, 토지 개혁, 문맹 퇴치, 해외 유학 등을 추진해 급격히 근대화되었으나 근본주의 꼴통들은 끝까지 반대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재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편집]

한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이슬람권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집트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후 집권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모두 분노해 이집트를 침공하며 수에즈 전쟁(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나, 미국과 소련은 이를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행보라고 여겨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했고 결국 영, 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물러났다.

북아프리카[편집]

북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전쟁을 일으켜 심각한 유혈사태로 번졌다.

아프리카[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고 승전국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1차대전 전후와 다르게 자유주의를 표방한 미국이 기성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압력을 넣으면서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도록 하였다. 하지만 기존 유럽 열강들이 멋대로 나눠버린 국경선은 민족 간의 분쟁을 유발했고, 아프리카의 독립운동가들은 집권 이후 독재자로 역변하기도 했으며 큰 혼란이 일었다.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여러 식민지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그렇게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백인 주도로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인종차별 정책을 펼쳐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당하며 온갖 제재를 당했다.

스페인국[편집]

스페인은 파시즘 정책 때문에 제1세계와 제2세계 모두에게 고립당했고 UN 가입도 하지 못했다. 결국 1950년대부터 외교 정책을 수정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스로를 반공 투사 1세대로 포장했으며 한국전쟁 참전 의사까지 밝혔으나 제1세계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제1세계에 어떻게든 들어가려는 노력 때문에 자유진영과 사이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1955년 UN에 가입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정책을 파시즘에서 단순 권위주의로 점차 바꿔나갔고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국뽕팔이를 했다.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후에야 스페인의 경제는 다시금 회복되었다.

과학[편집]

생물학적으로는 DNA가 발견되어 유전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화학적으로는 여러 악티늄족 원소들이 인공으로 제조되어 자연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원자 번호 92번)보다 더 무거운 원소들이 여럿 만들어졌다. 천문학 부분에서는 빅뱅 우주론과 정상 우주론 간의 대립이 있었으며 물리학 부문에서는 양자역학이 등장해 초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양국 간의 핵무기 기술도 발전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이 핵개발에 착수해 영국은 실제 핵개발에 성공했고, 중국도 핵개발 유행의 대열에 참가했다. 항공우주 기술도 상상 이상으로 발전해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도 이듬해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해 우주 경쟁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컴퓨터도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항공 우주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주선을 조종하기 위해 컴퓨터의 발전은 불가피했다. 40년대 중후반에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기존의 진공관의 비효율성을 보완해주고 있었는데 5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 진공관을 모두 교체하게 된다. 이렇게 2세대 컴퓨터의 시대가 열렸다.

너 우리들이 신봉하는 하드디스크님도 바로 이시기(1956년)에 처음 등장헀다. 이렇듯 컴퓨터의 기본 개념과 컴퓨터의 뼈대는 이 시기에 모두 생성되었다.

문화[편집]

노래[편집]

여전히 스탠다드 팝과 스윙 재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정통 블루스와 스윙재즈가 크로스오버를 이뤄 초기 R&B 음악이 등장했다. R&B와 템포가 빠른 컨트리 음악이 교차되어 로커빌리 장르가 등장했고 이는 20세기 후반을 흔든 로큰롤이 된다. 그리고 전설적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발전을 이끌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영화[편집]

이 시기 영화계에서는 기성세대 문화에 반발한 신세대 분위기가 퍼져 전성기를 누렸다. 이런 반항아 열풍은 제임스 딘이 유행시켰으며 이때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하튼 이런 세대교체 열풍으로 미국 영화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론 브란도가 데뷔해 할리우드 황금기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헤이즈 오피스의 규제가 약해지면서 문화 탄압도 일부 줄어들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5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