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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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60년부터 1969년까지의 연대.

일명 전후 베이비부머 시대를 맞이하게 된 연대이자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 및 성장기의 과정을 거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의 태동연대라고도 불린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의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한국의 경제발전이 막 성장하던 시기이다.

아폴로 계획이 일어난 시대다. 하지만 그 후속작인 컨스텔레이션 계획은...

이때 일본은 치비마루코(마루코는 아홉살)를 찍고 있었고 헬조선은 검정 고무신을 찍고 있었으니...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지 알수 있다. 재밌는 건 당시 마루코네는 가난한 축이었고 기영이네는 부유한 축이었다는 것.

대한민국[편집]

4.19 혁명의 발생[편집]

1960년이 되며 4대 대선이 다가왔고 자유당은 또 런승만을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하필 1875년생이라 85세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리 무지한 국민들이라지만 대통령 나이가 저 정도면 슬슬 안 뽑으려고 한다는 걸 자유당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기 중 죽으면 부통령에게 권력이 넘어가는데 부통령이라도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단 이승만을 당선시키되 자유당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에 부딪치는데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내세워야만 자유당이 살 수 있지만 4년 전에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된 상태라서 이번에도 망할 게 뻔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는데 마침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죽으면서 후보는 이승만만 남았고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이승만 100% 확정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이다. 신익희도 대선 전에 갑자기 죽었지 조봉암은 사형당했지 거기에 조병옥도 느닷없이 죽어버리니 국민들이 자유당에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유당은 이제 헌법을 바꾸거나 악법을 만들거나 하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렸고 결국에는 부정선거를 저지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였다.

여기서 투표함 바꿔치기, 3~5인조 투표, 완장 감독관 배치 등 별의 별 괴상망측한 방법을 부정선거 하는 데 쏟아부었고 자유당은 '부정선거 좀 한다고 저 멍청한 개돼지 국민놈들이 난리가 나겠어? ㅋㅋㅋㅋㅋ'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 때가 1960년이었다. 이놈들이 횡포를 저지르던 1950년대와 다르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학생들이 투표권까지 얻은 어른이 되면서 부산과 마산 등을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총과 칼을 학생들에게 내밀며 항쟁을 진압했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자유당은 대놓고 선을 넘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으로 반자유당 시위와 항쟁이 일어나며 4.19 혁명이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로만 진행되었으나 추후에 국민학생들과 대학 교수들, 일반 시민들까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의거를 벌였다. 결국 4월 26일 상황을 더 질질 끌기 싫었던 이승만이 하야 선언과 함께 내각책임제 실시, 선거 무효화를 알리며 항복했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를 몰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후 대한민국에는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빤쓰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2공화국의 수립[편집]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 정부는 3.15 부정선거범들에 대한 공판을 개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내각책임제 아래에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완전히 새 국회의원들을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대표인 장면이 행정부 수반인 국무총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도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 선거로 전환되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직함뿐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장면 내각은 주체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려고 했고 1961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 이 의지는 훗날 박정희가 물려받게 된다.

1961년부터 장면 내각은 2대 악법으로 불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했고 4.19 혁명의 주역들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이 악법에 반대해 시위를 열었다.

나라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윤보선과 장면 간의 사이까지 나빠졌다. 또한 군에 대한 대우도 나빠져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 반발하게 된다. 군부는 4.19 혁명 1주년이 되는 날 학생들을 선동해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선동이 실패해 묻혔다.

하지만 이 사건이 묻힌 지 한 달이 지난 5월 16일에 군부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한 다음 행정부를 장악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한다.

5.16 군사정변과 국가재건최고회의[편집]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에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했으며 장도영이 의장으로 취임했고 얼마 뒤 의장이 박정희로 교체된다.

사람들은 살면서 현재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이라는 양대 정당이 하는 꼬라지가 하나같이 정상이 없는 븅신들이라 차라리 누군가가 모조리 갈아엎고 두 당을 쓸어버린 다음 나라의 기강을 잡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한다.

당시 국민들은 병신같은 자유당을 몰아내고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민주당도 막상 집권하니 자유당이나 다를 게 없다는 감정이었다. 십몇년 후쯤이면 박정희라는 인간이 미쳐돌아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사람들이 양비론적으로 변하고 갈아엎을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군부가 짜잔~ 하고 들어선데다가 정책들이 이전 정권들의 병신들을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모조리 때려잡고 경제 개발같이 좋은 정책들은 계승하는 식이었다. 쿠데타가 잘한 일은 아니다만 합법적으로 개판인 정치보단 불법이지만 빠꾸없는 정치라는 것이 국민 감정과 딱 맞아떨어졌고 당연히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서 엄청난 지지와 러브콜을 날렸다.

또한 혁명재판으로 3.15 부정선거범들의 모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가자 민주당보다 군부가 훨 낫네! 하는 반응이 더 쏟아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62년에 들어서면서 만 나이, 서력기원, SI 단위 등의 도입으로 나라 자체를 뜯어고치고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껍데기만 남은 2공 잔재들을 쓸었다. 그 다음에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 대통령제 임기 4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제3공화국 수립과 박정희의 집권[편집]

1963년부터 민간인 정치참여 허용 등 군정을 완화시키고 박정희도 김종필과 함께 새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군부에서 물러나고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인간성 하나는 쩔었던 윤보선과 맞장을 깠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친일 및 친북 전적을 들어 '빨갱이에게 나라를 맡겨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박정희는 역으로 윤보선을 수구꼴통이라며 깠다. 뭔가 포지션이 바뀐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한국 내에 암암리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은 박정희가 자기네 편인 줄 알고 박정희를 지지했다. 또한 기존의 빨갱이몰이 이념 탄압에 지친 사람들이 윤보선을 이승만의 재림으로 보고 박정희에게 표를 줬다. 결과는 박정희가 근소한 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또한 윤보선의 민정당도 같이 욕을 얻어먹으면서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1963년 12월 17일에 박정희가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7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어 군정이 종식되었다. 물론 민주공화당이 군부놈들 넘어온 거긴 하다만...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한일기본조약[편집]

1964년 당시에는 슬슬 일제강점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한일 수교를 의해 한일회담이 활발하게 열렸으나 여러 트러블로 계속 결렬되었다.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또다시 매국하는 행위로 여겨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이것이 절정에 달한 사건이 바로 6.3 한일회담 반대 항쟁이다. 이 당시에 학생 시위자 중 한 명이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이다.

한편 중앙정보부의 또라이 김형욱인민혁명당 사건과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 등을 조작하며 관종짓을 하려고 했지만 믿고 있던 민주공화당에게까지 씹히며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항쟁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제 개발[편집]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했으며 이때 경공업 부문이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민주공화당에서 4대 비리 축출이라는 것을 내세웠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1966년에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비리는 느그들 아니냐? 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박정희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한국독립당의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떨거지들에게 똥을 뿌리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조폭과 정치인생을 끝내고 중정에서 뒈지게 쳐맞으며 반병신이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성공적인 경제개발은 그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 1967년에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하였다.

한편 1967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다시 돌아왔는데, 민주당계는 흩어져 있어서 윤보선이 신민당을 창당하며 모조리 집합시켰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박정희가 맞붙었으나 윤보선은 막상 내세울 것이 없는 데다가 매카시즘 때문에 인식이 나빠졌고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잘해서 박정희가 더 낫다는 국민들의 선택으로 윤보선이 전보다 더 심하게 쳐발리고 박정희가 압승했다.

또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압승했다. 그런데 자신을 싫어하는 호남 표가 두려워서 7대 총선에서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북한의 도발[편집]

박정희가 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북괴의 군부는 잠시나마 박정희에게 가졌던 호감이 각종 반공 정책들을 지켜보며 비호감으로 바뀌었다. 결국 북괴 군부는 박정희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간첩 김신조 등이 서울로 침투해 박정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1.21 사태가 일어났다. 박정희가 이때 존나 빡돌아서 684부대를 창단하는 등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까지 갔다.

여기서 북괴는 한 술을 더 떠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을 일으켜 민간인까지 살해했다. 이때 전 국민들은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분노했으며 이때 김일성놈도 전쟁 터질까봐 쫄아서 부랴부랴 개짓거리 철회하려고 했다.

3선 개헌[편집]

이제 박정희도 단순히 민주적으로만 집권하면 신변이 불안해질 것 같아서 이승만의 독재 방법을 따라한다. 바로 선거 출마 기회를 늘린 다음 또 당선돼서 독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침 국회는 민주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1969년에 3선 개헌안을 내놓고 신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켜 대통령을 3번씩 할 수 있게 하는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때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등을 일으켜 신민당 당원들을 계속 방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편집]

제1세계[편집]

미국[편집]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종료 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제압하고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었다. 그는 상당히 진보적이었으나 국제 분위기는 갈수록 경직되어갔고 냉전도 극에 치닫고 있었다. 1962년 급성장한 소련이 같은 공산국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미국을 위협했는데, 이 당시 미국 전체가 엄청난 위기에 빠졌고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이런 위기 분위기에 질린 소련이 먼저 gg쳤으며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며 치킨 게임이 끝났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암살당했다. 이후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끝났지만 냉전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 베트남의 통킹 만(박보 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 해군을 공격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명분으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선전포고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 이후 존슨은 상대 후보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 득표율 61.1%로 대선에서 압승하고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많은 인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갈수록 반전 여론이 커지면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이런 반전 운동은 여러 인권 성장에 기여했고 1960년대 미국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다만 내치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데 민권법을 제정해 흑인들에게 법적인 평등을 보장하는 등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8년은 68혁명프라하의 봄으로 한창 시끄럽던 시기였으며 반전 여론도 강력해지면서 냉전 분위기가 사그라들고 데탕트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닉슨도 데탕트 분위기에 편승해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는 훗날 큰 사고를 치게 된다.

그 외에 미국은 아폴로 계획을 진행시켜서 1969년 7월 20일 사상 최초로 인류가 달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1957년 소련이 미국에 준 충격을 역으로 되갚는 데 성공했고 이는 미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1969년은 미국 문화가 가장 융성한 시기이기도 했고 최초의 인터넷인 아파넷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일본[편집]

패전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은 경제 위주 정책을 밀어붙여 고도성장기를 이어나갔다. 기존 전범국 이미지는 1964 도쿄 올림픽 개최로 씻었으며 이때 여러 전자제품들을 선보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경제력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서독을 제치고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도달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한편 일본의 좌파들은 시위가 자주 실패하자 폭력적인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편집]

중화민국은 국공내전 패배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국에 큰 혼란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자신의 패배 원인을 재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으면서 의무교육 시행 및 부패 척결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1969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까지 성공하면서 대륙 중국을 비웃을 정도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독재는 지속되어 민주화 운동 탄압은 심각했다. 그리고 데탕트가 세계적으로 찾아오며 미중 관계가 개선되자 대만의 외교적 입지도 갈수록 불안해졌다.

서독[편집]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와 갈등을 빚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고 1961년 소련과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자 베를린 위기가 발생했다. 아데나워는 강경하게 나가려 했으나 케네디의 베를린 시민 드립으로 실패했고 1963년 실각했다. 다음 총리로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취임했다. 미국이 유럽에서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독일도 프랑스식 유럽주의, 드골주의에 편승하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총리가 이를 쌩까자 기민당 내에서도 비판이 일었고 결국 66년에 실각했다.

이후 기민당-사민당 연정을 이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치 부역 경력 때문에 싸다구를 후려쳐맞는 일까지 당했고 결국 68혁명이 세계적으로 퍼지자 키징어는 빌리 브란트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날아갔다.

이탈리아[편집]

1960 로마 올림픽을 개최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제1세계의 대표 국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나 이탈리아에 전통적으로 이어져오던 부정부패는 개선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과 68 혁명이 퍼져나가자 이탈리아 내에서 좌익 테러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편집]

프랑스는 1961년 1월 8일 국민 투표를 거쳐 알제리의 독립을 가결시켰으며 에비앙 조약을 체결해 알제리 독립전쟁이 종식되고 알제리가 독립했다. 대통령인 샤를 드 골은 대선을 직접선거로 전환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통과시켰다. 그는 강력한 프랑스를 주장했고 미국의 간섭이 심해지자 유럽은 유럽대로 살아야 한다는 드골주의를 주장했다.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는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식 문화에 심취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윗세대들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좌익 반전주의 학생 시위대가 들고일어나며 68혁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적인 열풍이 되었고 비록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행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학을 떼게 만들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가 더 널리 퍼지게 할 수 있었다. 어쨌든 68혁명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고 이를 막아낸 드골 또한 너무 늙어 정부 관료 및 의원들에게 지지를 잃고 사임했다.

이후 조르주 퐁피두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는 드골주의자였기에 드골 지지자들에게 표를 얻을 수 있었고 68혁명 당시 요구들을 받아들여 사회 전반을 개선했다. 미국과 프랑스 간의 나빠졌던 관계도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영국[편집]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물러난 영국은 비록 대영제국으로서의 영예는 잃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국을 다시 따라잡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영국의 음악 발전은 196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전설의 비틀즈가 나타나며 영국 음악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통해 세계에 퍼졌다. 비틀즈 열풍은 신세대 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렸고 대중음악의 주류가 록 음악이 되는 데에 기여했다. 한편 식민지 독립 열풍에 따라 여러 식민지들을 독립시켜주었다.

제2세계[편집]

북괴[편집]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해나가는 과정에 여러 수뇌부를 숙청하고 심지어 과거 동지들까지 모조리 몰아내면서 군을 장악했다. 또한 성인이 된 김정일을 후원해 왕위세습을 노렸다. 1967년 5월 25일 5.25 교시를 통해 문화 말살 정책인 도서정리사업을 개시했다. 김일성을 조금이나마 부정하는 내용은 얄짤없었고 좆도 아닌 걸 가지고 김일성 비판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제거했다. 역사왜곡도 자행되어 한국사의 여러 위인들은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것이 북한에서 정론이 되어버렸다.

또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 실책 때문에 생긴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위해 남한에 여러 간첩들을 투입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것이 지지기반이 되어버려 김일성은 북한에서 단순 대우받는 위치에서 최고조넘이 되었다.

짱깨[편집]

대약진 운동을 통해 참새도 조졌지, 철도 고물로 만들었지, 산도 싹 다 밀어버려서 온갖 자연재해들이 중국을 덮쳤다. 마오쩌둥의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인 발언과 이를 받아들이던 무지성 짱개들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나락 끝까지 떨어져버렸고 결국 마오쩌둥은 입지를 잃어버리고 자리도 잃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오랜 동지였던 류사오치가 주석으로 집권했는데 그는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펼쳐서 망한 중국을 그나마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찌질한 마오쩌둥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칼을 갈았다. 그러던 도중 1965년 11월 10일 중국 만악의 근원 4인방 중 하나인 야오원위안이 명나라 해서를 주제로 한 연극 해서파관을 마오쩌둥을 감히 비판하는 반동의 연극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쩌둥이는 노를 저었고 1966년 5월 16일 개방주의자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르며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며 선동했다.

결국 1966년 8월 쩌둥이의 선동에 동참한 홍위병 폭도들이 난을 일으켜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쩌둥이를 부추긴 건 4인방, 특히 그 중 하나인 쩌둥이의 아내 장칭이었고 문화대혁명 선동을 부추기면서 온갖 개꿀을 싹 다 빨아먹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홍위병 폭도들은 공자와 만력제의 무덤을 파묘하고 종교 관련 자료 및 도서들을 모조리 불태우며 연극, 영화, 소설 등의 대중매체들도 모조리 탄압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도 이 시기에 숙청당해 인민재판을 당했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 간 국경 분쟁으로 중소 양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미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에게 접근하는데, 그렇게 미제 반동 타령하던 쩌둥이는 미국이 러브콜을 보내자 언제 욕했냐는 듯이 미국의 접근을 받아들이고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소련[편집]

소련은 이때부터 세계 공산 혁명이라는 목표에 박차를 가하는데, 1950년대 후반 쿠바가 적화되자 소련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을 타격하기 아주 좋은 위치에 놓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했으나 미국에게 발각되었고, 양국은 3차 대전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대화를 통해 상황이 수습되었다.

흐루쇼프 시대에는 스탈린 시절처럼 단순히 쥐어짜는 정책을 포기하고 인민 생활 개선을 주 폭표로 삼았다. 텔레비전, 라디오 등이 이때 대대적으로 소련에 보급되었다. 1961년 소련이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 데에 성공해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농업 정책에서 실패했고 결국 대흉년이 일어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브레즈네프 시대로 넘어오면서 무자비한 숙청과 대학살 같은 것은 거의 사라졌으나 동시에 개혁도 없었고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이후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에 접근하면서 데탕트 시대가 열렸는데 분명히 의도는 소련 견제였지만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도 완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발전 속도가 침체되어 잠재적 문제점들이 속속 생겨났으며 지나친 외세 개입을 자행한 끝에 80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동독[편집]

지도자는 발터 울브리히트였다.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소련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세웠고 이는 서구권의 반발을 사 갈등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서독과 비견할 만한 수준이었던 동독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소련에서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후에는 소련과도 충돌을 벌이며 갈등이 빚어졌다. 이로 인해 에리히 호네커가 소련에게 차기 동독 지도자로 눈에 띄게 되었다.

제3세계 그리고 기타[편집]

동남아[편집]

남베트남[편집]

베트남 독립 이후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인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을 다스렸다. 하지만 토지 개혁에 실패해 민심을 잃었다가 스님 틱꽝득이 소신공양을 하자 영부인 마담 누가 불교계를 향해 소신공양 사건에 대해 통드립을 쳤고 결국 응오딘지엠 정부를 밀어주던 미국도 절레절레하며 1963년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사살하고 즈엉반민을 집권시켰다.

하지만 그는 북베트남과의 대화를 시도했고 이듬해 응우옌카인의 쿠데타로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계속 두 명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다가 1967년에는 응우옌반티에우가 집권해 베트남을 다스렸다.

한편 1964년 미군이 제1차 통킹만 사건을 트집 잡아 제2차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으며 이를 명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으나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방해, 열대 우림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전쟁을 질질 끌게 되었다. 주변의 라오스나 캄보디아도 전쟁의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는 후에 희대의 미친놈인 캄보디아의 폴 포트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북베트남[편집]

북베트남은 호찌민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창설되자 이를 지원했고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미국과도 전쟁을 하게 되었다. 1968년 구정 공세를 감행하고 전술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남베트남과 미국 모두 혼란에 빠져 반전 여론을 조장하는 데 성공해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유리해졌다.

미얀마[편집]

미얀마의 경우 버마 연방 정부가 경제 정책에 실패하고 분쟁이 지속되자 1962년 네 윈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버마는 군부 독재를 이 시기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태국[편집]

태국은 사릿 타나랏과 타놈 끼티까촌이 지배했고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미국이 민주화를 요구하자 1968년 개헌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편집]

말레이시아는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후 미얀마 경제를 장악한 싱가포르의 경우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싱가포르는 화교 출신인 리콴유가 독재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편집]

인도네시아는 독재자 수카르노가 군부의 도움을 받아 교도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내고 독재를 벌였다. 국가가 점점 좌편향으로 기울어지자 이에 반발한 수하르토가 정권을 점차 장악해나가다가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인도네시아의 2대 독재자가 되었다.

필리핀[편집]

필리핀에서는 카를로스 P. 가르시아, 디오스다 마카파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차례대로 집권했다.

인도[편집]

자와할랄 네루가 총리로 재임하며 다스렸다. 1961년에는 포르투갈령 고아를 침공해 점령했으며 1962년 중소 관계가 나빠지고 인도가 티베트 망명정부를 지원하자 소련이 인도를 두둔했고 중국과 영토 분쟁이 심해지자 중인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여하튼 전략적으로는 중국이 인도를 압박했고 안 그래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이라 전쟁을 중단했다.

네루가 1946년 사망하고 랄 바하두르 샤 스트리가 총리가 되었으나 얼마 후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가 총리로 집권해 독재자가 되었다. 하지만 집권 초기에는 경제 침체가 이어졌다.

중동[편집]

이란[편집]

팔라비 왕조는 비밀경찰을 통해 독재를 이어나가면서 위로부터의 근대화 정책인 백색혁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개슬람 극단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폭동을 조장했다가 진압당하기도 하는 등 반동주의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1965년에는 팔라비 2세가 국회로부터 아리아인의 영광 칭호를 받았고 1967년 10월에는 황제 자리까지 올랐다.

아랍, 팔레스타인[편집]

사우디에서는 파이살 국왕이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며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58년 수립된 아랍 연방 공화국이 1961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다시 커지자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침공해 단 6일 만에 골란 고원, 서안 지구, 가자 지구 및 시나이 반도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편집]

아프리카 아랍 세계에서는 모리타니, 소말리아 등이 1960년에 먼저 독립했고 알제리가 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고 독립전쟁을 마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아프리카[편집]

민족주의가 확산된 아프리카는 1960년을 계기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동시 독립하며 해당 연도는 아프리카의 해가 되었다. 하지만 지리적인 단점과 열강들의 만행으로 인해 개판이 된 아프리카는 내전, 분쟁, 독재가 판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포르투갈 같은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스페인국[편집]

파시스트들의 시대가 저물고 프랑코 정권이 고착되자 저항 세력들도 무장 좌파 운동 대신 민주화 운동으로 노선이 바뀌었으며 프랑코 독재정부도 대외적 고립 문제를 해결하고 기존의 실패한 경제 정책들 대신 전문가들을 경제 관료로 임명해 그나마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제1세계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회복해 기적적인 국가 성장이 이뤄졌다.

여하튼 자기는 '스페인 왕국'의 섭정 직책을 맡았지만 왕은 없었다.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1961년 퇴물이 된 지 오래인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찝쩍대며 왕위를 제안하지만 퇴짜를 맞고, 1969년이 되어서야 후안 카를로스 1세를 만나 왕위를 제안하고 후계자로 선언했다. 물론 그의 살아생전에 왕위에 올리지는 않았다.

과학[편집]

천문학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 진출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미국과 소련이 심심하면 우주에 우주선 쏘아올릴 정도였다. 유리 가가린이 1961년에 인간최초로 우주에 나갔다. 1969년에는 닐 암스트롱과 듣보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을 밟았고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충격을 주었다.

또한 IT 분야에서는 1969년에 인터넷의 초기 형태인 아파넷이 등장하며 정보화 시대의 서곡을 알렸다. 그리고 이 해부터 컴퓨터 크기도 대형 진공관 시스템에서 한 층 작아졌다. 그 영향으로 인해 컴퓨터 게임과 비디오 게임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해에 유닉스가 탄생하여 현재 우리가 쓰는 PC의 모델이 되었다.

문화[편집]

노래[편집]

가요계에 혁명이 일어난 시대이다. 재즈의 시대가 가고 로큰롤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신세대들이 음악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특히 영국 밴드들이 미국을 강타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이 시기에 이뤄졌고 비틀즈, 롤링 스톤즈 등이 미국을 흔들었다. 68혁명 이후 히피 앰생들이 나타나면서 음악 페스티벌 등도 대성공을 거뒀다.

백인 음악에 밀린 흑인 음악은 모타운 레코드가 등장해 대중친화적 음악들로 히트를 쳤다. 이런 음악들의 등장으로 펑크, 디스코, 댄스 팝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설의 마이클 잭슨이 이곳 출신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미국 블루스, 일본 엔카, 한국 전통음악과 민요가 섞여 트로트로 발전했고 트로트 음악들은 6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다.

영화[편집]

클래식 할리우드 전성 시대인 60년대 초중반은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등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시대가 개막해 자유로워진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영화계 자본이 커지면서 시리즈물도 늘어났는데, 대표적으로 007 시리즈가 1962년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텔레비전의 본격적 보급 이전의 시대에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 관람이었기에 196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특히 1969년에는 상당히 명작으로 회자되는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방송[편집]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일본에서는 1960년에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아시아 최초로 개시되었다. 한국은 5.16을 전후로 엠빙신, 개비에스 등이 개국하면서 한국 방송의 본격적 역사가 시작되었다.

만화[편집]

5.16 쿠데타로 만화 규제도 이루어졌으나 한국 만화계는 황금기를 이어나갔다. 이 시기부터 국산 애니들이 등장해 나름대로 히트를 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만화의 발전이 컸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며 주간 소년 만화 잡지들이 여럿 창간되었고 애니 분야에서는 데즈카 오사무가 아톰을 만들어 히트를 쳤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의 애니가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6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