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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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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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1970년부터 1979년까지의 연대.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이다. 1980년대부터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박정희브레즈네프가 활기를 치던 해.

아타리 2600 등의 게임기를 통해 본격적인 게임의 시대가 도래한 년대이다.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50대 초반~40대 초반이다. 꼰대?

공산권의 전성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이후 공산권 국가들은 서서히 망해가기 시작한다. 오일쇼크로 하마터면 헬조선이 북괴 꼴날수도 있었던 시대였으며, 김정일의 세습이 확정된 시대였다.

대한민국[편집]

박정희 VS 김대중[편집]

1970년이 되자 산업화의 부작용(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남영호 침몰사건 등)이 조금씩 터져나왔지만 경부고속도로 완공 등 여전히 국가산업 발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낙후된 지방에 산업화의 기반을 깔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새벽좆이 울렸네 새아침이 발기했네~

1971년이 되어 대선과 총선이 모두 다가왔다. 애초에 3선 개헌을 한 목적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또 이기려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했고, 신민당에서는 새로 뜬 루키 스타인 김대중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이때 김대중이 처음으로 지역감정 조장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원래 전라도는 경상도와 함께 박정희에게 몰표를 몰아주던 지방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전라도 출신임을 내세워 전라도 사람이면 신민당 찍읍시다! 한 끝에 전라도가 김대중 편이 되었다.

하지만 호남이 자기를 따르면 영남 지역도 따를 것이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영남에서는 대국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고 결국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승리했다.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또 승리했다. 그리고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며 곧 있을 유신 헌법의 모태를 깔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편집]

3번씩이나 대통령을 해먹게 된 박정희는 제대로 삘 받았는지 1972년부터 종신집권의 토대를 다졌고 내적으로는 강압통치를 하고 대외적으로는 친절한 척 하는 천재적인 독재 수법을 사용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자기를 죽이려 했던 북괴 김일성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 원래 친구였음! 한민족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친구 먹어야지~' 똥꼬쇼 퍼포먼스를 부리며 자기 이미지를 개선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박정희도 전쟁 분위기만 조성하면 지 목숨이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법은 평화를 가장한 쌩쇼뿐이었다고 판단, 북괴가 자기 목을 따러 올 여지를 완전히 끊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국민 지지도 얻고. 이제 대외관계까지 정리했으니 남은 건 하나다.

10월 유신[편집]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대놓고 독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체육관 ㅂㅅ ㅅㅂ ㅉㅉㅉ 파티를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뭐하니 교묘하게 부정선거 좀 섞어서 유신 헌법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강압적인 분위기 조성 덕을 봤는지 압도적인 찬성 표가 나왔고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다.

직선제는 폐지되었고 대통령은 무제한 출마 가능에 박정희의 어용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니 박정희만 영원히 100%로 당선될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를 국민회의에서 치뤄 100% 표를 받고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지만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1/6만 확보해도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한 박정희는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고 다니던 김대중을 조지려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천조국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인맥이 있었고 김대중을 건드린 박정희는 당시 경제강국 탑에 들던 미국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받았고 결국 gg쳤다. 어쨌든 평소부터 박정희를 고깝게 보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를 압박했다.

긴급조치[편집]

하지만 박정희도 한 가지 쫄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권 세력이었다. 김대중을 조지는 것이 실패했으니 운동권 세력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또 공격을 당했고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카드를 꺼낸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어 개헌 논의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10년 전에 물거품이 됐던 중앙정보부의 작품 인민혁명당 사건을 한 번 더 꺼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가짜 사건을 만들어내고 긴급조치 제4호를 발령시켜 민주계 인사들을 모조리 민주청년학생연합이라는 가상의 종북단체로 분류해 잡아넣었다.

하지만 문세광이라는 빨갱이가 반인반신 박정희의 와이후 육영수를 골로 보냈다. 그리고 빡친 반인반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긴급조치 제9호[편집]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가 발령되며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 금지'라는 사상 최악의 악법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반신욕'을 하면 남산으로 보내진다. 1975년부터 반 박정희 인사들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대중가요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고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 처리를 받았다. 이제 노래만 불러도 남산을 방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인 장준하도 등산하다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지면서 독재 분위기는 더욱 세졌다.

하지만 유신으로 북괴와 사이가 또 나빠진 데다 북은 남보다 더 심한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빅똥을 메인카드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더 미친놈인 덕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다. 참고로 이때 북괴의 만행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병사 중 한 놈이 현재 청와대의 빅 적폐이신 디재스터 문프시다...

적폐 토왜 일베충 박사모 틀딱이누 이니야!

훠훠훠 작성자가 좌빨 (자칭) 깨시민들과 (쩝쩝)
양념장과 좌덜식 적폐청산을 (쩝) 당했누 이니야.

하지만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고리 원전이 세워지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78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뻔하지 뭐. 다들 알잖냐? 또 박정희가 이긴다.

유신 정권의 몰락[편집]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망하는 것은 쌤통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그렇기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따잇^

한편 1973년 중동에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터져 석유 수출이 중단되어서 세계 경제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1978년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고 1979년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또 석유가 막히고 세계경제가 침체되었다. 이 사건을 오일 쇼크라고 부른다.

박정희의 집권은 지속되었지만 세계 경제가 흔들리면서 국내 경제도 침체되었다. 마침 1979년에 오원춘 농민 납치 사건이 터져 민심이 나빠지고 국내 경제 침체는 YH무역 농성 사건을 일으켰다.

유신 정권의 한계가 전국적으로 터져나오자 김영삼이 유신을 디스했다. 그리고 헬조선도 이란 꼬라지가 난다고 또 깠다. 노발대발한 반인반신은 사상 최초로 김영삼 국회의원을 제명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터져나왔고 먼저 반발한 곳은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지지기반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확히는 들고일어난 곳은 PK이고 박정희 지지기반은 TK라는 차이기 있긴 하지만 믿었던 경상도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한 반인반신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기로 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은 분명히 20년 전만 해도 자유당 떨거지들을 쓸어버리고 찬사를 받았던 박정희가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과 다른 최후를 맞이했다.

10.26 사태[편집]

이 문서는 대국적인 것에 대해 다룹니다.
대국적이지 못하면 당신도 재규어에게 벌집핏자가 될 수... 당신 누구야?! 탕탕!!

이때 정부의 관료들과 박정희가 부마민주항쟁을 처리하기 위해 의논했으나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 박정희를 애널써킹하던 차지철이 탱크를 들고 모조리 찍어누른 다음 절대독재체제로 가자는 헛소리를 하자 김재규가 반사적으로 차지철의 대가리를 총으로 날리고, 뒤이어 박정희까지 쏴서 죽였으니 바로 10.26 사태이다.

멀쩡하던 머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나라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고 최규하가 권한대행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 세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26으로 긴급조치들이 전부 해제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회의에서 개최되어 최규하가 당선되며 나라가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12.12 군사반란[편집]

폭동이다!
이 문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장태완 장군님의 마음가짐으로 반란군노무새끼들의 머리통을 전차로 날려버립시다.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의 군 내 애널써킹 좆목회인 하나회의 주역들 전두환, 노태우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는... 그 하나의 탱크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장태완이 반란군노무 쉐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군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은 5.16처럼 확실한 명분도 없어서 정권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

세계[편집]

제1세계[편집]

미국[편집]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미군 철수를 감행했고 대신 남베트남군이 직접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서 남베트남군의 양질을 향상시켰다. 이후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되지만 민주당 선거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한 것이 드러나면서 워터게이트가 이슈로 떠올랐고 결국 닉슨의 망언들이 여럿 공개되면서 그는 탄핵되기 전에 제 발로 하야했다.

이후 부통령인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닉슨의 똥을 치워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닉슨을 사면해 욕을 먹었고 1975년 최종적으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멸망시켰으며 키프로스 전쟁도 말아먹어 결국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는 인권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개선하기는 했으나 현실성이 부족하고 이중잣대가 심해 이란 혁명이라든가 전두환의 쿠데타라든가 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사건이 크게 번지도록 한 책임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석유 파동(오일 쇼크)이 일어나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실패로 인해 1980년대에는 공화당이 쭉 집권하게 된다.

일본[편집]

초고도 성장기를 유지하며 엄청난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1970년 오사카에서 만국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며 일본의 경제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했다. 1973년에 제1차 오일 쇼크와 금본위제 폐지를 통해 일본은 안정성장기를 맞이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성장 속도가 더 안정화되었다.

한편 적군파와 같은 좌파 테러단체들은 아사마 산장 사건을 분수령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부정적 인식이 단단히 박혀버렸고 이는 일본에서 자유민주당이 더 오래 해쳐먹는 원인이 되었다.

중화민국[편집]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중화민국은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1971년 UN에서 대만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중공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상임이사국 자리를 잃었다. 대만은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결국 UN에서 제발로 걸어나가며 조금씩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975년 쑨원의 후계자로 오랜 정치 인생을 살아오며 중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제스가 마침내 사망했고 부총통 옌자간이 임시 총통직을 맡았다가 1978년 국민대회에서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서독[편집]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집권한 독일은 동독과 수교를 맺은 국가와 수교하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한 후 동구권과 대화 및 협력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폴란드에 방문해 유대인 추념비에 무릎을 꿇으며 나치의 학살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해 전 세게인들에게 독일의 반성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는 매국 행위라는 비판이 솓아지기도 했다.

이후 브란트 내각에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1972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에서 테러를 일으키면서 난리가 났고 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터져 경제에 타격을 입었고 1974년 브란트의 비서인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으로 밝혀지면서 브란트는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얼마 후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 본인의 성추문이 쏟아져나왔고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총리로 헬무트 슈미트가 집권했는데 그가 취임한 당시 독일은 좌파 테러단체들의 궐기와 납치, 암살, 테러 행위, 오일 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침체 등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앞서 말한 간첩 사건으로 좌우갈등도 매우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슈미트 내각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강경 대응을 펼치고 케인스주의 경제 이론에 기반해 실업률을 낮추려고 시도했다. 1975년에는 소련에게 인권 보장을 내세워 헬싱키 협약을 서명하게 하기도 했다. 외교 정책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극좌 테러단체들도 진압하는 데 성공하자 총선에서도 연이어 승리했다. 하지만 훗날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확장 재정 정책이 독일 경제성장률의 하락과 재정 적자 증가로 이어져 발목을 잡게 된다.

이탈리아[편집]

독일이나 일본처럼 좌파 테러단체들의 패악질이 심각해져갔으며 여러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고 다녔다. 결국 이탈리아의 전직 총리인 알도 모로가 이탈리아 극좌 테러단체 붉은 여단에 의해 피랍 후 살해당하면서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6세의 만류에도 붉은 여단은 알도 모로를 살해했고 결국 바오로 6세는 충격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얼마 후 미 육군의 도지어 장군도 납치당하자 미국도 붉은 여단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좌파들의 패악질 외에도 이탈리아 왕국 시절부터 있었던 정경유착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프랑스[편집]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취임 이후 드골 시대보다 더 유화적이고 대외 관계 개선에 힘을 쓰게 되었는데, 여전히 파국을 맞고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간 관계도 개선했고 영국의 유럽 경제 연합체에 가입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연합 기구의 초기 형태를 구성했다. 하지만 오일 쇼크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징병제 반대 시위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다가 1974년 패혈증으로 죽게 되었다.

이후 드골 세력들은 점차 프랑스 역사에서 사라져가게 되었고 좌파 vs 중도 vs 우파의 정치 구도가 확립되었다. 퐁피두 다음 대통령으로는 자유주의 우파 성향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취임했다. 여전히 드골파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였기에 총리로 드골파인 자크 시라크를 임명했다. 하지만 둘 간의 갈등이 심해져 결별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를 포함한 6대 선진국들의 공동체인 G6을 창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듬해 캐나다가 가입하여 오늘날의 G7이 되었다. 하지만 물가 규제와 부가가치세 감축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겠다는 '바르 플랜'이 실패하고 몇몇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인기를 잃었다.

영국[편집]

이 당시의 영국은 이미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고 2류 강대국으로 내려온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영연병 경제 블록이 무너지고 유럽 경제 공동체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 또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영국병이 심각해졌는데, 지금도 케인스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들 간에 갑론을박이 침튀기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겠다. 아무튼 영국병 때문에 대규모 파업이 연달아 일어났고 복지 체제가 붕괴하면서 70년대 후반에는 노동당 정권이 발리고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취임했다.

제2세계[편집]

북괴[편집]

주의! 이 문서는 지옥 그 자체를 다룹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지역이나 장소는 지옥입니다.
지옥 그 자체라 사는 게 곶통이며 뒤지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은하의 외계인들이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좆같은 것들과 살아가는 당신에게 탈지옥을 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감히 김일성에게 개긴 기타 세력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김일성 세력만 남게 되자 김일성은 1972년 주체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여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꾸란을 헌법으로 제정한다. 여하튼 레닌, 스탈린, 쩌둥이의 안 좋은 점만 모조리 배워먹은 김일성이는 국가주석 취임 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로 격하시켰고 내각도 정무원으로 격하시켜 지 좆대로 해쳐먹을 준비를 마쳤다.

1974년에는 황태자인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포되어 본격적인 부카니스탄의 왕위계승 작업이 시작되었다. 여하튼 갑자가 마이웨이 루트를 탄 북한의 행보를 보고 소련과 중국은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훗날 북한이 이후 대외 의존도가 심각하게 낮아져 경제적으로도 좆망할 위기에 처하자 그럼 그렇지 하며 북한은 다시 사실상의 속국이 되기는 한다.

주체교 선포 이후 안 그래도 사회주의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데 스스로 자력갱생하겠답시고 외부의 지원까지 쌩까버리니 나라가 잘 될리가 만무하다. 이때부터 국력을 대한민국에게 추월당해 몰락하기 시작했다.

짱깨[편집]

문화대혁명 폭동이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마침 소련과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 미국에게 러브콜을 받은 쩌둥이는 홍위병들에게는 자본주의를 배격하라며 선동하면서 정작 몰래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과 싸바싸바를 시도했다. 사실 몰래도 아닌 게 대놓고 탁구 경기도 하고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가 만나서 회담까지 했기 때문에 ㅋㅋ 이듬해에는 리처드 닉슨이 직접 찾아와 쩌둥이와 회담했다.

한편 문화대혁명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2인자 린뱌오가 소련으로 빤쓰런을 시도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세력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중국은 4인방의 폭도 세력과 저우언라이의 온건파가 겨루는 구도로 가게 되었다. 한편 홍위병들도 때려부술 만한 것들은 싹 다 때려부쉈는지 할 일이 없어지자 결국 쩌둥이만 개꿀을 빤 셈이 되었고 이 할 일 없어진 홍위병들은 농촌으로 추방해 농사나 짓고 살도록 내쳐버렸다.

그러다가 1976년 1월 짱깨들의 존경을 받던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전국이 애도 물결에 휩싸였는데 눈치없는 4인방의 장칭련이 저우언라이를 폄하하고 추모를 힘으로 방해하는 등의 병신짓을 벌였고 결국 천안문에서 쩌둥이와 아이들 4인방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니 이게 바로 제1차 천안문 사태이다.

천안문 사태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개새끼로 몰아갔고 가택연금까지 시켰다. 그런데 얼마 후 짱퀴벌레의 수장인 쩌둥이가 뒤졌고 화궈펑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4인방은 화궈펑을 호구 취급했고 충분히 그를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호구인 척 하면서 4인방을 날려버렸고 그 중 특히 중국 희대의 악녀인 장칭도 조졌다. 물론 그는 권력욕이 없는 호구여서 덩샤오핑이 복권된 후에는 덩샤오핑의 조종을 받게 되었고 결국 덩샤오핑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중국의 주석이 된 덩샤오핑은 '공칠과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쩌둥이의 중공 수립은 옹호하되 문화대혁명이라는 만행에 있어서는 실컷 까일 필요가 있다 식으로 대응했다. 또한 흑묘백묘론과 실용주의에 입각해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해 폐쇄적인 중국이 국제 사회에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79년에는 덩샤오핑이 직접 미국을 찾아가 지미 카터와 만나기도 했다. 이때 중국 지도층들이 천조국의 위엄을 보고 지려 경제 개발 필요성을 단단히 느꼈다고 한다.

소련[편집]

데탕트 시대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혼란도 잦아들었고 마치 청나라 중흥기의 건륭제 시대를 연상케 하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또한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고 독재도 약간의 체제 비판적인 발언 정도는 허용하는 유화 독재 체제로 완화되었다. 또한 종교 탄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서방 및 중동 국가들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아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한 오일 쇼크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고 성장률도 떨어져 침체기를 맞이했다. 또한 수익이 늘어나자 이 돈들을 전부 기존의 우주 개발 대신 군비 확장에 사용했고 그렇게 양성된 군대는 대외 개입에 사용되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늪에 빠지면서 소련은 점차 망테크를 밟게 된다.

동독[편집]

동독의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가 소련 고위 간부들에게 찍힌 후 서기장이 에리히 호네커로 교체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조금씩 서독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소련과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독은 공산권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의 한계로 조금씩 몰락해가고 있었다.

제3세계[편집]

동남아[편집]

남베트남[편집]

응우옌반티에우가 토지개혁을 실시해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부정부패 및 무능함은 해결되지 않았고 군부와의 갈등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닉슨이 미군을 철수시키고 군사 원조도 줄이자 남베트남에는 미래가 없어졌고 결국 각지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게 격파당하다가 1975년 북베트남이 대공세를 펼쳤고 결국 대만으로 빤쓰런했다.

이후 응오딘지엠을 몰아냈던 1963년 쿠데타의 주역인 즈엉반민이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국 사이공이 북베트남에게 점령당하면서 남베트남은 멸망했다. 이후 즈엉반민은 조사를 받다가 그냥 집으로 되돌려보내졌고 후에 북베트남 정부로부터 망명을 허가받았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보복성 학살이 벌어졌다.

북베트남[편집]

호찌민 사후 똔득탕이 국가 주석이 되었다. 이후 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잠시 전투가 줄었다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다시 전면침공하면서 사이공을 점령하고 적화통일시켰다. 그리고 197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국명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면서 오늘날로 이어진다. 그리고 호치민 루트에 끼어 있었던 옆나라 라오스도 왕이 물러나면서 공산당이 집권하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같이 적화되었다.

한편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라는 작자가 반미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최종적으로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들은 킬링필드와 같은 유례없는 대량 학살 행위를 벌였고 그 불똥이 베트남까지 튀게 되자 분노한 베트남 공산당은 민주 캄푸치아를 침공해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를 날려버리고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캄보디아에 수립했다.

캄보디아를 밀어주던 짱퀴벌레들은 베트남의 행보에 부들부들거렸고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중월전쟁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중국이 우세했으나 결국 베트남의 저항에 못 이기고 패배하며 돌아갔다.

미얀마[편집]

네 윈의 사회주의 정책은 연달아 실패했고 반발이 커지자 1974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개헌해 독재를 강화했다. 이를 계기로 대학가에서 시위가 급증하고 반군부 시위가 이어졌으나 군부는 이를 무력 진압했다.

태국[편집]

미국의 요구로 순순히 민주화를 추진하던 타놈 끼티까촌은 1971년에 갑자기 돌변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를 시작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며 군부와 학생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고, 군부 내부에서도 타놈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며 결국 1973년 라마 9세가 타놈을 쳐내며 타놈은 숙청당했다.

이후 민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화되자 1976년 쿠데타가 다시 일어났고 다시 학생들을 탄압하며 독재를 벌였다. 이후 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군을 결성해 군부와 충돌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편집]

말레이시아는 압둘 라작 총리가 신 경제정책을 수립해 농촌 근대화와 국가의 경제 개입 정책을 밀어붙였고 일단 성공해 경제적인 대성장을 거뒀다.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독재를 하면서 동시에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인도네시아[편집]

수하르토가 독재를 벌이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나 경제적인 발전은 상당히 이루어진 편이었고 이는 독재 정치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 경제가 대부분 수하르토 일가에게 장악되었다.

필리핀[편집]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개발독재를 벌이며 여하튼 초기에는 경제 성장을 거두며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를 장악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대거 탄압했다. 계엄군들의 잔혹한 진압과 이에 반발한 몇몇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리스트 전향으로 인해 필리핀은 유사 내전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 행위 때문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인도[편집]

파키스탄에서 기득권 세력인 서파키스탄과 비교적 차별받는 동파키스탄 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 정책을 펼치며 강제 동화를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많았고 결국 역풍을 맞아 내전으로 번졌다.

이때 각을 보던 인도는 계속 벵골(동파키스탄) 난민들이 인도로 유입되자 난민을 받느니 걍 방글라데시를 독립시켜서 난민 유입을 막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결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동맹을 맺어 파키스탄을 조졌다. 이후 항복한 파키스탄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이어졌다.

여하튼 전쟁에서 승리한 인도는 1974년 4월 15일 석가탄신일에 라자스탄 지방에서 '미소 짓는 부처'라는 이름으로 첫 핵실험을 했고 인도도 핵보유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물론 핵 확산 방지 조약을 어긴 만큼 제재를 받았으나, 당시 인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 소련, 중국을 중재하는 중요한 위치였기에 미국, 소련 두 국가 모두 제재하는 척을 하거나 그냥 방관했다. 중국이야 원래부터 철천지 원수였으니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이때 인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가 부정선거를 저지르다가 뽀록이 나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력한 독재를 시작했다. 이마저도 인구 조절에서 실패해 1977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총리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새로 들어선 야당은 인디라 간디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의 연합이었던지라 오합지졸이었고 서로 내부총질하다가 무너졌다.

중동[편집]

이란[편집]

팔라비 왕조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독재를 더욱 강화하고 대신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이란을 강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1974년에는 아시안 게임 개최국이 되었으며 1977년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한국과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경찰의 활동이 너무 심각해서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이 틈을 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팔라비 왕조를 세속주의자라며 억까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했다. 이후 이슬람과 공산당이 동맹을 맺는 희대의 일이 벌어지고 테헤란 전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란 혁명(을 빙자한 시대역행)이 일어났다.

결국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시위대에 못 이겨 빤쓰런했고 이 틈을 타 꼴통 개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이란에서 석유 수출이 급감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 쇼크를 맞이했고 이는 한국, 소련 등의 나라에 영향을 끼쳐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아랍, 팔레스타인[편집]

1970년 9월 28일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기존의 이집트 대통령들과 다르게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를 일부 개선했고 이스라엘과도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만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에서의 철수를 거부하자 사다트 대통령은 술책을 쓴다. 바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여러번 뇌절하듯이 구라를 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속아넘어가서 사다트가 계속 전쟁 협박을 해오자 그냥 허풍쟁이 취급을 했다. 그런데 1973년 10월 6일(욤 키푸르)에 이집트가 정말로 쳐들어오면서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다. 이번에는 이집트가 각 잡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이었기에 이스라엘이 의외로 초기에 밀렸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당시 미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돕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걍 내버려뒀으나, 이스라엘이 너무 불리해지자 결국 닉슨 대통령이 직접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전세를 회복해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을 역관광시켰으나 시리아 전선에서는 소련이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말라는 강요를 하자 일단 멈췄고, 이집트도 제압하면서 이스라엘은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 다만 이집트도 초기의 강력한 공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압박할 카드를 얻은 셈이 되었고 이들은 1974년에 수에즈 운하를 다시 얻어내면서 전략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그냥 얻은 것 앖이 날라갔다. 여하튼 두 나라는 향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전쟁 동안 아랍 국가들이 담합을 벌여 석유 가격을 올려버렸고, 이로 인해 전 세계가 기름 부족이라는 큰 타격을 입어 제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났다. 이는 한국의 경제 개발을 방해했고 일본의 발전 속도를 침체시켰으며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나라들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팔레스타인 외의 아랍 지역에서는 영국령 아랍 에미리트가 독립해 7개 토후국이 뭉친 아랍 에미리트가 건국되었다. 여기서도 석유가 발견되었고 아랍 에미리트는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석유 산유국으로 지위가 올라가 두바이 등의 초고속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북아프리카[편집]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라는 양반이 독재를 벌였고 모로코는 스페인이 사하라 식민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이곳에 대규모 이주 정책을 펼쳐 모로코인들이 살도록 하였다. 스페인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프랑코가 뒈지자 모로코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폴리사리오 전선과의 분쟁이 커지면서 서사하라는 아프리카의 대표적 영토 분쟁 지역이 되었다.

아프리카[편집]

에티오피아에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에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민심이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황제가 의문사했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라는 빨갱이 새끼가 정권을 장악해 에티오피아를 공산화시키고 잔혹한 독재를 시작했다. 이후 오가덴 지방에서 소말리아와 영토 분쟁이 일어나 오가덴 전쟁이 발발했고 에타오피아는 소말리아를 격파해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결국 두 나라 모두 좆됐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가 상식을 넘어선 괴랄한 행보를 보이더니 1976년에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나폴레옹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는 하렘을 만들어 아내를 17명이나 따먹었고 자신의 그림이 새겨진 교복을 초딩들에게 구매하도록 강요하자 초딩들은 이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고 그 초딩들을 학살하면서 세계적인 비판을 받았다.

이후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몰래 돕고 있었던 프랑스도 이건 좀 아니라며 특사를 보내 뇌절 좀 그만하라고 말했으나 되려 보카사는 특사를 구타하며 추방했고, 이에 분노한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침공해 보카사를 날려버리고 다코 대통령을 앉혔다.

우간다에서는 이디 아민이라는 미친 놈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대학살을 벌였다가 큰 비판에 직면했고 이놈은 독재를 계속 벌이다가 탄자니아를 우연히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좆만한 우간다와 다르게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의 강대국 중 하나였고 이디 아민은 순삭당해 리비아로 튀었으나 리비아에서도 쫓겨나고 이라크로 튀었다가 또 쫓겨나고 결국 사우디로 빤쓰런했다.

한편 남아프리카 지방에서는 포르투갈이 식민지 독립전쟁 진압 과정에서 패배하고 카네이션 혁명으로 날아가면서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를 포기했고 이 두 나라는 공산화되어 다시 독재 시대가 열렸다. 남아공의 경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IOC의 제명으로 올림픽 참가도 금지되었다. 결국 이들은 몰래 핵개발을 시작했다. 흑인 인권 투사였던 넬슨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계속 인권 투쟁을 이어나갔다.

스페인국[편집]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점차 늙어가면서 후계자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미 1969년에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여하튼 스페인에서도 배운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후 프랑코는 통제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당시 불법이던 민주주의를 일부 허용하는 쪽으로 노선을 선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시위대가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자 입 싹 닫고 강력한 독재를 시전했다. 결국 스페인은 다시 국제적 왕따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 9월에 마침내 프랑코가 뒈졌고 스페인은 다시금 혼란 속에 빠진다. 이때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으로 즉위하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는 프랑코 체제가 자신의 왕정을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해 프랑코 세력들을 몰아내고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임명해 점차 믽화 개혁을 이루었다.

1977년 6월 드디어 40년만에 총선이 이뤄졌고 의회가 수립되어 새 스페인 헌법을 제정했다. 결국 1978년 최종적으로 껍데기만 남아있던 프랑코 체제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득권층의 일부 프랑코파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편집]

컴퓨터 공학 기술이 발전해 고밀도 집적 회로가 등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가 등장했다. 또한 인터넷 분야에서는 1971년 '@'의 등장과 함께 이메일이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전염병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1977년에 여태껏 인류를 괴롭혀오던 천연두를 완전히 박멸시켜버린 사례가 있다.

우주 분야에서는 아폴로 계획이 1972년까지 진행되다가 데탕트 시기로 넘어가며 소련 견제를 위해 국방비를 쏟을 필요가 없어지자 달에 돈지랄을 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1977년 태양계 행성들을 탐사하기 위해 보이저 1호보이저 2호를 우주 바깥 너머로 발사하면서 새로운 우주 탐사의 시대가 열렸다. 여하튼 60년대의 우주 기술 발전은 70년대에 태양계 행성들을 더욱 자세히 탐구할 수 있도록 했다.

문화[편집]

노래[편집]

60년대를 빛낸 비틀즈가 1970년 갑자기 해체되면서 락 밴드들의 춘추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잘나갔던 밴드들이 바로 롤링 스톤스, 더 후,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이었다. 70년대 후반에는 AC/DC가 전성기를 맞았고 ABBA 같은 디스코 밴드들도 흥행했다.

한편 70년대 후반인 1979년 마이클 잭슨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세계적인 뮤지션 지위에 올랐고 훗날 1980년대의 마이클 잭슨 전성기를 예고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트로트가 주로 유행했으며 록도 한국에 들어왔는데 특히 김창완으로 대표되는 산울림이 이 시기에 데뷔했다. 그리고 가왕 조용필도 이 시기부터 히트를 쳤다. 다만 박정희 정권 당시의 금지곡 지정의 피해자들도 많았다.

일본에서는 아이돌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영화[편집]

미국의 영화 검열 행위는 거의 사라졌으며 퇴물 배우로 불리던 말론 브란도대부를 찍어 다시 떡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영화 제작이 자유로워지면서 스티븐 스필버그조지 루카스 같은 사람들이 블록버스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죠스라든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 등이다. 특히 스타워즈는 SF 전성기의 시초를 알렸다는 점에서 엄청난 의의가 있다.

방송[편집]

우리나라에서는 KBS, MBC, 지금은 사라진 TBC가 3대 한국 방송국으로 자리잡았고 이 시기부터 흑백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해 라디오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다만 광고비의 짭짤함과 윗분들의 눈치 때문에 정부 및 기업에 휘둘리는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컬러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의 반대로 흑백 텔레비전이 계속 사용되었다.

만화[편집]

갓본 메카물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어 크게 성공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태권브이 같은 메카물들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갓본에서는 야마토를 시작으로 매니아층, 일명 씹덕층이 형성되면서 애니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게임[편집]

게임계의 태동기로 1세대 게임기들이 이때 나왔다. 1972년에는 아타리을 출시해 히트를 쳤고 70년대 후반에는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해 역시 히트를 쳤다. 그리고 한국에도 오락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7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