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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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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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90년부터 1999년까지의 연대.

삐삐랑 PC통신쓰던 시절이다. 90년대말에는 포털사이트가 등장했다.

판갤에서 유해물질 제대로 안 관리된 시절이라고 까였다. 냉혹한 8,90년대생의 세계 jpg

대한민국[편집]

노태우 정부[편집]

1990년[편집]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3자가 김대중을 아주 고깝게 보는 공통점이 있었고 결국 3당 합당을 결정해 '우리는 이제 한 식구임돠' 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당연히 운동권 좌좀들은 난리가 났고 김영삼을 배신자라며 저주했다. 이땐 YS가 사자굴에 들어가서 사자를 잡을 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겠지...

또한 국군보안사령부가 청명계획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당계는 물론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간부들까지 무단 시찰하는 사건이 밝혀졌다. 이것이 금방 진압됨으로써 나라가 또 군부에 넘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1991년[편집]

1991년부터 공안정국이 강화되면서 여러 운동권 머학생들이 연행되었고 몇몇 운동권 멤버들이 분신자살로 항쟁하는 분신정국이 형성되었고 김지하 작가까지 이런 분신행위를 비판하다가 변절자로 매도당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변했다.

그리고 31년만에 지방자치제도가 일부 부활해서 광역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민주자유당의 정원식 국무총리가 연설 중 계란을 맞는 파동이 오히려 민주자유당을 1991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며 남한은 남한끼리 북좆선은 북좆선끼리 체제를 존중하자는 약속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화해무드라며 설레발을 열심히 떨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에 폭로되어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 배상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92년[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마지막 거대공산국가인 중국과도 수교를 맺었고 헬조선의 본격적인 친중 줄타기가 시작된다.

1992년은 문화계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세대가 교체되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싶어하는 X세대들이 문화의 중심을 잡게 되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믿었던 김영삼을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의 김대중과 붙었으나 김영삼이 3당 합당빨과 김대중의 배신자 이미지 버프를 받아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문민정부[편집]

1993년[편집]

마침내 정권을 잡은 민주자유당 내 상도동계는 민자당 내의 신군부 및 하나회의 븅신들의 재산내역을 공개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부패한 재계를 대대적으로 조졌다.

그리고 대전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어 자기부상열차 등 과학기술들을 선보였고 우리나라도 과학 부분에 있어서는 밀리지 않는 나라임을 보여줬다.

1994년[편집]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도 갑분싸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틈타 종북샊이들이 김일성 조문을 가는 미친 짓거리들을 벌이면서 신공안정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사건 등 온갖가지 사건사고가 터져나오면서 사고공화국이라는 단어까지 돌았다.

1995년[편집]

지방자치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지방 행정을 그 지방이 알아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와 함께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산업화의 단점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오기는 했지만 전-노 심판, 조선총독부 철거 등의 퍼포먼스로 김대중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했다.

민주자유당은 군부와 하나회 청산을 기점으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1996년[편집]

이때도 역사 바로잡기는 지속되었고 대표적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로 명칭 변경한 사건 등이 있다.

가요계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고 H.O.T.가 데뷔해 기획사 아이돌 시대를 열었다.

연세대 사태로 운동권의 추악한 실태가 전국에 드러났고 운동권은 완전히 지지를 잃고 몰락했다. 그리고 이들은 PC통신으로 이동해 '깨시민'이라고 불리게 될 인터넷 좌좀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영동 지방에 공비가 침투해서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군부를 쓸어버린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압승했다.

1997년[편집]

이전 해부터 무리하게 시장을 개방하는 등 여러 실책이 있었고 그 여파로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는 등 외화 부족의 문제점이 터져나왔다.

PC통신이 많이 보급되면서 'ㅋㅋ'를 필두로 한 인터넷 유행어들이 대거 등장했다.

결국 동아시아 전체에서 불어오던 외환위기 여파를 무시하던 대한민국은 1997년 말 직격탄을 아주 세게 후려맞았고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결국에는 IMF에게 외채를 빌리고 IMF 관리체계가 시작되었다.

김영삼의 자폭으로 신한국당도 사실상 자폭했고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새로 창당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김종필과 손을 잡아 DJP연합을 형성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으나 보수에 대한 이미지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김대중이 압승했다.

국민의 정부[편집]

1998년[편집]

김대중 취임 이후 첫 진보정권이 들어서자 북한과 금강산 관광을 개시하고 반공반북태세를 지워버리고 햇볕정책이라는 핵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정보통신부가 새로운 컴퓨터 회선으로 ADSL을 채택하면서 가정의 컴퓨터에 인터넷이 아주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1999년[편집]

빠른 인터넷 보급과 함께 거의 모든 가정에 인터넷이 정착하면서 최초의 인터넷 문화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디시인사이드아햏햏. 동시에 깨시민들도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왔다.

영화산업도 1999년부터 급성장하는데 쉬리가 큰 히트를 치며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개인극장이 줄어들고 멀티플렉스가 한국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8년 한 해를 미치게 힘들게 했던 외환위기는 이 시기부터 다시 안정세를 찾았다.

대북도발 문제가 화근으로 떠오르기도 했는데 연평해전이 발발하면서 사람들은 햇볕정책 뭔가 문재 있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세계[편집]

서구권[편집]

미국[편집]

소련과 제2세계 공산국가들이 모조리 멸망하고 경제 강국인 일본마저도 거품이 꺼져 좆망하면서 미국은 침체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세계 최정상기에 올라섰다. 한편 이맘때부터 아라비아에서 시비를 털리기 시작하는데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강제 점령하며 미국을 도발하자 미국은 다국적군을 이끌고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해 걸프 전쟁을 일으켰다. 당연히 이라크 따위가 이길 리가 없었고 1달만에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1992년 LA 폭동이 일어나고 경제 불황이 다가오면서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고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 일본을 다시금 따돌리고 경제 최강국 지위를 유지했으며 NAFTA 체결 및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수립했고 오락 산업과 IT 산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지나친 세계화 추진이 미국의 동맹국이나 우방국들에게 무리한 시장개방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으며 의료보험 도입이 실패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인기가 여전했던 건지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클린턴 2기부터는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기 의혹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일명 지퍼 게이트)가 까발려져 욕을 먹었으며 2001년에 임기를 마무리했다.

여하튼 1990년대의 미국은 경제적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리는 미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본[편집]

1990년까지 일본의 경제적 호황은 이어지다가 이듬해인 1991년부터 평균 주가가 떨어지며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는데 이 추세가 지속되면서 일본은 경제 불황인 잃어버린 10년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나마 90년대 중반에 회복세를 보이나 했더니 19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를 휩쓴 외환 위기의 여파에 휩쓸려 다시 좆망했다.

이런 가운데 38년 간 이어져오던 55년 체제도 자민당의 내분으로 1993년 무너지고 군소정당들의 연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연정이 얼마 가지 않아 붕괴되면서 다시금 자민당의 시대가 열렸다.

중화민국[편집]

국민당의 리덩후이가 정식으로 총통 자리에 취임하고 민진당의 정책을을 수용하면서 대만의 민주화 개혁이 이루어졌다. 1991~1992년에 독재 정치를 주도하던 국민대회와 입법원이 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었고 헌법 또한 수정되었다.

또한 대만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인 2.28 사건의 진상조사를 실시했으며 책임 인정 및 사과를 표했고 반세기 전 시안 사건을 일으켜 가택연금을 당한 후 이때까지 용케 잘 살아있던 장쉐량을 석방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보수파들은 반발을 통해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했다.

리덩후이 정부 3기에는 경제 위기 여파로 지방 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을 이기는 일도 있었으나 1998년 총선 및 지선에서 국민당이 이기며 다시 국민당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맘때부터 리덩후이 총통이 대놓고 중국을 분열시키지고 하는 등 대만 독립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독일[편집]

베를린 장벽이 파손되자 동독 정부는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한 상태였으며 1990년 3월 동독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급진 통일을 주장하는 독일 연합이 승리했고 1990년 10월 3일 동독이 5개 주로 분해된 후 서독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독일이 통일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급진적 통일에 의한 후유증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는데, 동독은 경제적으로 부실해 많은 동독 출신 기업들이 망했으며 서독은 동독을 위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생겨 그만큼 손해를 입었다. 이후에도 헬무트 콜 총리는 자리를 지켰으나 1998년 총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이 이기면서 총리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미 동구권 붕괴로 구좌파가 몰락한지라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우파 요소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제3의 노선을 주장하던 추세였다. 새로 취임한 슈뢰더 총리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처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편집]

부정부패와 정치인-마피아 간의 결탁 문제가 아주 심각했으나 양심이 있던 몇몇 법조인들이 깨끗한 손(마니 풀리테) 운동을 시작해 마피아들을 대거 감옥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마피아들이 몇몇 판사들을 폭탄 테러로 암살하면서 이 사건이 세계에 알려졌고 결국 시민들이 마피아에 대한 제보를 이어나가면서 이탈리아에서 판치던 마피아들은 대거 소탕당하게 된다.

하지만 부정부패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되려 언론플레이로 입지를 쌓아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양반이 나타나 국민들을 선동하고 총리로 집권했다. 이후 북부동맹과 사이가 나빠져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한 후 좌파가 집권했으나 좌파 정권의 통치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자 다시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1년에 재집권했다.

프랑스[편집]

1990년대 초반 각료 비리 및 경기 침체로 인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인기를 잃었고 1993년 총선 이후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총리로 한 동거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딱히 큰 마찰 없이 임기를 이어나가다가 1995년 임기가 종료되며 퇴임했다.

이후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경기 침체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했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으나 여기서도 발렸다. 이후 리오넬 조스팽이 총선 승리로 인해 총리로 집권했고 실권을 잃어버렸다.

영국[편집]

마거릿 대처가 인두세 도입을 시도하자 각지에서 반발이 쏟아져나왔고 대처에게 반발한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당대표 선거를 1990년에 실시했다. 대처는 4표 차이로 1차 투표에서 떨어졌고 결국 보수당 대표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존 메이저가 보수당 대표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었다.

1991년 걸프 전쟁에 참전해 30억 파운드의 빚을 졌고 지난 80년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해체당한 산업들을 대체할 산업이 부족해 경제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1992년 검은 목요일로 인해 파운드화의 가치가 대거 폭락했다. 하지만 존 메이저 총리는 마거릿 대처 지우기 등을 통해 보수당의 이미지를 개선하면서 1992년 4월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보수당은 여러 스캔들에 시달렸고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고 1995년 스코틀랜드 자치 선거에서 참패했으며 1997년 5월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의해 참패하면서 존 메이저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토니 블레어가 총리로 취임한 이후 1997년 8월 31일 영국의 왕세자비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영국 왕실의 행보가 엄청난 욕을 먹었는데 이런 상황에 총리가 왕실을 압박해 왕세자비를 추모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제3의 노선을 추구하며 노동당의 우클릭을 주도했는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보수당 시대의 정책을 일부 도입해 현대 영국 복지 체제를 확립하고 경제 성장을 이뤘다. 또한 1998년 4월 10일 아일랜드와 벨파스트 협정을 체결해 테러 위협을 막아냈다.

스페인[편집]

구 스페인의 식민지로 구성된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를 형성해 에스파냐 국왕이 수장을 맡게 되었다. 독재 세력은 거의 사라졌으며 그 대신 스페인 기업들이 중남미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동구권[편집]

북괴[편집]

공산권이 망하면서 북한에서도 붕괴의 조짐이 보였지만 일성이의 신격화 작업이 성공했는지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주변국들의 자본주의화 때문에 정상적인 교역이 불가능해져 타격을 입었으며 점차 망해갔는데, 이 도중 1994년 김일성이 뒤지고 김정일이 북한 2대 돼지 새끼로 즉위했다. 신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김일성이 뒤져버리니 큰 혼란이 찾아왔고 북한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지난 7년 간의 경제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경제적 혼란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북한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다가왔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북한을 덮쳐서 재앙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빨리 회복했을 터지만, 끝까지 어거지로 자존심을 부리며 독재를 이어나가고 주변국의 지원도 만류하고 핵까지 개발하려고 해 국제적으로 욕을 쳐먹는 위치에 오르자 그냥 좆망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그냥 망해가는 나라에서 세계 최악의 빈민국이 되었고 인민들은 생존을 위해 보급해주지도 않는 보급소에 가느니 지들끼리 물건을 거래하면서 암암리에 장마당이라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짱깨[편집]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지명된 장쩌민의 시대로 상하이 시장 출신인 그는 상하이 시장 당시의 인사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중국 공산당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상하이방을 형성했다. 이 시대에는 도광양회(조용한 국가 성장 추구)와 유소작위(강대국으로써 책임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에 입각한 정책이 추진되었다.

장쩌민 시대의 인권 탄압으로는 파룬궁 탄압이 있는데 물론 파룬궁 자체도 논란이 많은 단체이지만 파룬궁이 급성장하자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을 사이비로 지정해 대대적 탄압을 하고 장기적출을 자행하기도 했다.

소련→러시아[편집]

동유럽에서 연쇄 혁명이 일어나 공산권이 붕괴하고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마저도 고르바초프가 사실상 역적 취급을 받으면서 붕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미 발트 3국 국가들은 1990년에 실질적으로 탈퇴했으며 이후 조지아가 1991년 4월에 탈퇴했다.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개혁 이후 반발한 보수파가 1991년 8월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연금했으나 이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보리스 옐친이 나타나 쿠데타 세력들을 몰아내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살아났으나 그의 여론이 좋아진 건 아니라 실권은 옐친에게 넘어갔고 쿠데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순서대로 독립해나갔고 벨라루스, 러시아, 카자흐스탄만 소련으로 남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해체를 끝까지 반대했으나 이미 독립 물결은 막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벨라루스가 1991년 12월 10일에, 러시아가 1991년 12월 12일에, 카자흐스탄이 1991년 12월 16일에 탈퇴하면서 소련 구성국은 완전히 사라졌고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공식 해체되었다.

이후 새 공화국인 러시아 연방에서는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소련 해체의 영향으로 1인당 GNP가 무려 5% 수준으로 급락해버렸다. 더군다나 옐친의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나라가 더 작살나면서 재앙 그 자체가 되었다.

1993년에는 러시아 공산당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옐친은 국회의사당을 탱크로 밀어버리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체첸과의 전쟁에서 큰 피를 봤으며 1996년 이미지 메이킹으로 겨우 재선하기는 했으나 1998년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해 옐친에 대한 평판은 최악이 되었다. 결국 옐친은 새로 떠오르던 신인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그리고 1999년 12월 31일 사임하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베트남[편집]

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후 제1세계 국가들과 대외교류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돈을 벌러 떠나기도 하고 자국으로도 여러 기업들의 공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 의해 자행된 학살들을 인정하면서 과거 베트콩 세력들에 대한 안 좋은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동남아[편집]

미얀마[편집]

신군부 집권 이후 1990년에 총선을 실시했으나 아웅 산 수 치의 국민 민주 연합이 선거에서 압승하자 선거를 무효화하고 아웅산 수치를 가택연금한 다음 군사독재를 개시했다. 1996년 군벌인 쿤사를 무너뜨리고 1997년 11월 군부 SLORC를 SPDC(국가평화발전평의회)로 개편했다.

태국[편집]

1991년 수친다 끄라쁘라윤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국왕인 라마 9세가 수친다를 꾸짖으면서 쿠데타군이 물러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태국에서 국왕, 그 중에서도 라마 9세의 위치가 어느 수준인지를 보여준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태국은 일시적으로 민주화되었지만 1997년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외환 위기가 일어나며 태국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난립하는 수많은 정당 때문에 연정이 어려워졌으며 내각이 여러 번 교체되는 등 혼란을 맞이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편집]

말레이시아에서는 신 개발정책을 실시하며 빈곤 퇴치와 산업 및 상업 발전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가 다가오자 적절한 대처로 경제적 피해를 막았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의 뒤를 이어 고촉통이 독재자로 집권했다.

인도네시아[편집]

수하르토가 독재를 이어나가다가 1997년 동남아 전역에서 경제 위기가 불어닥치며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반화교 폭동이나 동티모르 독립운동 등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1998년 수하르토가 퇴진하면서 정권이 끝났다. 이후 1999년 자유선거 실시로 압두라만 와힛이 대통령이 되었다.

필리핀[편집]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업적만으로 대통령에 오른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정치 능력 부족으로 대책이 없는 정책을 남발하고 더군다나 아직 남아있는 기득권 세력의 견제까지 겹쳐 실적이 엉망이었고 결국에는 1992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마르코스의 측근 자리에서 마르코스의 퇴진을 이끈 피델 라모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역시나 필리핀의 민주화 사업을 이끌어나갔으며 경제 성장을 어느정도 이루기도 했으나 역시 1997년 외환위기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사생활 문제로 인기를 잃었다.

인도[편집]

압도적인 인구를 바탕으로 급성장했으며 1998년 파키스탄이 핵을 개발하자 파키스탄과 큰 갈등을 빚었다. 이는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과도 얽혀 미국은 초기에는 파키스탄을 제재하고 2001년 9.11 테러 후에는 묵인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중동[편집]

이란[편집]

하메네이가 이란의 샤로 즉위했고 이 시기에 이란은 저유가 등의 문제로 경제 불황을 겪었다. 또한 하메네이 시대에도 호메이니 때처럼 강력한 신권 독재가 지속되었다.

팔레스타인[편집]

팔레스타인에서는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PLO가 자치정부로 승격했다. 하지만 하마스와 파타 간에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편집]

이집트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친미 및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치며 독재를 했으며 리비아에서는 강력한 반미 독재를 펼치는 무아마르 카다피가 소련 붕괴, 저유가,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서 개기지 않고 짜지면서 지냈다.

아프리카[편집]

이 시기 아프리카에서는 르완다 일대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는데 르완다는 후투 족과 투치 족이 오랜 기간 갈등하던 나라였다. 그러다가 1994년 4월 6일 후투 족 출신인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옆나라인 부룬디의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으로 인해 사망하자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이 폭발해 서로가 서로를 학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초기에 이 모든 갈등을 부추겼던 벨기에가 병력을 파견해 초를 쳤으며 프랑스는 아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며 중앙아프리카 일대 전역을 뒤덮는 분쟁으로 커졌다. 그리고 1998년 제2차 콩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프리카판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과학[편집]

천문학 분야에서는 허블 우주 망원경이 1990년 우주로 발사되어 수 억 광년 떨어진 천체들까지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허블 울트라 딥 필드가 발견되면서 천문학계에 파격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80년대 등장한 운영체제가 더 발전하여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Windows 95 발매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가 출현하였으며 이는 오늘날의 컴퓨터 운영체제들도 따르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PC통신이 유행하여 본격적인 인터넷 유행어의 탄생을 알렸으며 90년대 후반에는 ADSL 기술이 보급되어 PC통신을 넘어서 인터넷의 접속이 더욱 쉬워졌다.

사회[편집]

대체로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편이다.

사실상 한반도 최초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대라서 사회상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남녀평등이 꽃을 피운 시기다. 물론 틀딱 꼰대들에게는 여전히 남존여비사상이 있었으나 여성의 대학진학률과 사회진출이 높아지면서 여성의 지위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민주화와 더불어 온갖 여성단체들이 쏟아져나왔다.

pc통신과 인터넷이 보급된 시대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는 예의바르고 건전한 인터넷 문화가 있었다고 착각하는데 이때도 헬은 헬이었다. 다만 급식충 비중이 지금보다 조금 적었고 인생 전체를 이 안에서 보내는 앰창인생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물론 씨벌교황 이후에 비해서는 낫다.

하지만 민주화와 공산권의 붕괴 때문에 운동권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991년에 일어난 분신정국1996년의 연세대 사태다. 이 두 사건으로 운동권은 민중의 지지를 완전히 잃게 되고 깨시민들의 폭동과 난리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사실이고.

경제[편집]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삼저(저금리,저달러,저유가)호황의 달콤한열매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따먹기 시작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간인 386세대가 사회초년생으로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때쯤에 샐러리맨 월급이 처음으로 백만원이 넘어가고

1994년에 1인당에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고 (당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국민소득이 2만불이었고 미국, 일본, 독일이 3만불 하던 시절)

1995년에는 4500만명 인구로 국민(내)총생산 세계 11위를 차지하고

1996년에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OECD에 가입했다.

물론 달러화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수준은 여전히 서구선진국의 그것에 비해 40~ 60% 수준이었지만

80년대에 서구선진국의 20 ~30% 소득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속도로 따라잡고 있었고

물가상승률도 1994년을 제외하면 OECD 전체평균을 밑도는 정도로 굉장히 안정되어

환율도 1달러=700~800원대를 마크하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에 쓰이는 물가는

지금보다 엄청 싸서 서민들도 생활비 부담이 역사상 가장 적은 시절이다.

그 덕에 80년대에 이어서 중산계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고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70%가 넘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나친 저환율 덕분에 무역수지는 해가 갈구록 적자가 쌓이고 있었고 외환보유고가 점점 바닥이 나고 있다가 1997년 말 IMF가 발생하는데...

그 파장으로 1996년에 국민소득 13000달러가 1998년에 국민소득이 7000달러로 절반 가까이 날라가면서 1991년 수준으로 돌아가버린다.

이때부터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할수 있고 IMF수준 이전 소득으로 돌아간 2003년까지

실업률이 2~3배 가까이 올라가고 90년대라면 상상도 못할 대졸자가 공무원을 꿈꾸게 만들어버려 지금까지 오게되었다.

국민성은 물론 지금이 더 낫다.

문화[편집]

만화계는 그냥 망했다. 원래 망했었다. 원래 한국에서 만화는 웹툰 등장 전까지 흥한 적이 없다. 애미뒤진 꼰대들이 만화를 무슨 죄악처럼 다뤄서 그렇다. 그렇다고 애새끼들이 만화를 안본건 아니고 당연히 일본만화가 다 먹어치웠다.

이 시대는 TV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테레비를 존나게 봤다. 드라마건 예능이건 심지어 뉴스까지도 시청률이 존나 높았다. 요즘은 15퍼만 되도 존나 흥한건데 이때 15퍼면 폐지각이었다.

당시 어른들이 신혼부부들을 상대로 결혼식 뒤풀이라는 미친 악습을 자행했다. 신혼부부한테 억지로 술 먹이고 신랑 발바닥을 때리고 신부만 안전하게 차 태우고 끈 달아서 신랑보고 차보다 더 빠르게 뛰어오르라는 미친 악습이었다.

노래[편집]

미국에서는 힙합과 R&B가 유행했으며 락과 메탈은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맞았으나 그 이후부터는 쇠락했다. 일본에서는 J-POP이 전성기를 맞았다.

한편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음악 산업이 점차 자유로워져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연예계와 가요계를 완전히 뒤흔든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난 알아요로 데뷔해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엄청난 팬덤을 형성했고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1994년에는 시대유감 사건으로 인해 한국 가요계의 오랜 고질병이었던 음반 검열의 장벽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수만이 프로듀서로서 대박이 난 시기도 90년대인데 SM엔터테인먼트 창립 이전에 현진영과 와와를 데뷔시켜 성공했는데 와와 1기가 클론, 와와 2기가 듀스, 3기는 지누션의 션이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 해체 이후 SM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기획사 아이돌인 H.O.T.를 데뷔시켜 성공시켰으며 수많은 빠순이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노예계약 등의 문제가 존재했고 빠순이들의 만행은 갈수록 심각해져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HOT의 뒤를 이어서 젝스키스, S.E.S., 핑클 등의 아이돌이 줄줄이 이어서 데뷔했으며 이들은 1세대 아이돌의 시대를 장식했다. 한편 90년대 극후반 인터넷의 발전으로 온라인 음원시장이 등장했다.

영화[편집]

미국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서 터미네이터, 쥬라기 공원, 매트릭스, 타이타닉, 해리포터, 스타워즈 에피소드 1 같은 영화들이 나왔다. 물론 스타워즈 1은 욕먹기는 했다만 말이다. 한국에서는 90년대 후반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등장하고 1999년 쉬리가 개봉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렸다.

게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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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혁명과 미국의 아타리 쇼크로 인해 일본게임계가 먼저 전례없는 황금기를 맞게 됐다. 아재들에게는 최고존엄으로 취급되는 전설의 게임들이 이시기에 때거지로 생산됐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아주 크게 폭발한다. 그러니 90년대말은 친히 볼드체 ㄱㄱ. 이러한 아케이드 및 콘솔 갓게임의 시대는 2000년까지 쭈우우욱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서도 90년대부터 작정하고 갓게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머한민국의 경우도 이런저런 괜찮은 게임이 여럿 나왔으나, 저작권인식 종범(2009년에야 저작권법이 나왔다)+복돌이+IMF+여성부+북괴의 난동 등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던 시절이다.

2000년대 초반(2001년~2004년 사이)의 갓게임들로 칭해지는 데빌 메이 크라이라던가 맥스 페인이라던가 귀무자라던가 하는 것들도 모두 원래 90년대 말에 PS1으로 나올려고 했지만 차기기종 홍보차원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미뤄진 것들이다. 그만큼 90년대 게임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해준다.

애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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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거품경제 붕괴로 작가주의가 타격을 입기는 했다만, 그래도 작가주의의 영향력은 아직 남아있었다.

헬조선 민주화특수로인해 노태우정부시기부터 땡삼이 정부 초기까지 갓갓갓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땡삼이가 그냥 지원해준답시고 돈을 막퍼주다가 땡삼이 중반부터는 거대한 똥덩어리들이 대거 육성되면서 애니업계가 꽤 타격을 입었다.

저때 나온 작품중 아재들이 최고존엄으로 모시는 작품은 아재가 나열해보자.

천조국에서는 1989년 인어공주로 예토전생한 디즈니가 전세계 극장을 점령했으니 이 시대를'디즈니 르네상스'라 부른다..

199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린 디즈니는 타잔과 판타지아 2000의 예상외의 부진+드림웍스와 픽사의 등장에 정신을 못차리다 2009년까지(더 길게보면 라푼젤이 나오는 2010년까지)역대급 병신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때 최초로 3D애니가 1995년에 최초로 나왔다. 그게 뭐냐면 스티브 잡스가 자기 기술 홍보한다고 내놓은게 희대의 명작인 토이 스토리. 이후 본격적인 3D 애니메이션 제작은 1998년으로 더 뒤로 가야하며, 본격적인 3D애니 붐은 2003년부터다.

천조국[편집]

  • 미녀와 야수: 1991년. 애니 최초로 1억달러를 벌었다.
  • 알라딘: 1992년
  • 라이온킹: 1994년. 니모를 찾아서, 겨울왕국이 나오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흥행한 애니로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했던 전설의 띵작.
  • 노트르담의 꼽추: 1996년. 역대 디즈니 사상가장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
  • 뮬란: 1998년
  • 포카혼타스: 1995년. 원주민들과 이래저래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꽤나 명작.
  • 타잔: 1999년. 타진이 나무타는 장면은 당시 신기술 싹다 동원해서 만들었던거랜다. 키야 ㅁㅊㄷㅁㅊㅇ
  • 토이 스토리: 1995년. 세계최초의 3d애니이다.
  • 아나스타샤: 스토리는 좀 병신이지만, 음악이 킹갓이라 현재 재평가되고 있다.

갓본[편집]

인터넷[편집]

1990년 WWW의 출현 이후 PC통신을 중심으로 ㅋㅋㅋ, 외계어 등이 유행했으며 이시기를 주름잡은 사이트는 천리안, 하이텔 등이었으나 ADSL의 보급으로 인터넷이 상용화되자 90년대 후반에 웃대, 그리고 니가 보고 있는 디시가 등장했다. 인터넷 문화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유행어[편집]

199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