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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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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화폐=== [[File:Ducato.jpg|150px|thumb|right|베네치아 두카토]] 베네치아의 화폐는 베네치아 두카토(두카트)였다. 두카토는 라틴어 Ducatus(공작(의) 혹은 공국(의))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가 수반인 도제(Doge)가 라틴어 Dux에서 유래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공작의 화폐 혹은 공국의 화폐라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두카토의 하위 단위로는 리라와 솔도가 있었는데, 교환율은 1두카토 당 6리라, 1리라 당 20솔도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럽의 경제패권을 잡고 있던 15~16세기 당시 두카토는 유럽의 기축통화으로 리스본에서 리가에 이르기까지 대륙의 모든 도시에서 통용되었다. 두카토는 비단 유럽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 인도에 당도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에서 베네치아의 두카토 화폐가 아무런 문제없이 통용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두카토 화폐는 베네치아 조폐당국의 신중한 관리 덕에 전 세계에서 최고의 화폐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카토의 기축통화 지위는 17세기에 네덜란드 굴덴 화폐에 의해 대체당한다. 그래도 압도적인 생산량 때문에 19세기 후반까지 사용된다. ===제염업=== [[File:Salt.jpg|300px|thumb|right|바다에서 제염된 천일염]] 소금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첫번째 수출품이자 석호의 어염업 공동체를 유럽 제일의 상업 중심지로 만든 일등공신 아이템이다. 소금은 바닷가에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계 소금생산의 주요 출처는 줄곧 암염 광산이었고, 오늘날도 전체 소금의 30%만이 바다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 천일염을 얻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기후가 덥고 건조해야하며, 건기가 우기가 뚜렷하고 바람이 지속적으로 불어오는 지형이어야 한다. 또한 갯벌이 펼쳐져 있고, 적당한 조수간만의 차가 존재하여 계단식 염전을 꾸리기에 알맞아야한다. 중세 베네치아는 이러한 천일염 생산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베네치아인들의 혁신성이 가미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7세기에서 9세기 무렵에 오늘날의 천일제염기술과 같은 획기적인 생산 메커니즘이 고안되었는데, 이는 여러 개의 염전을 만들고, 펌프와 수문으로 각 염전을 연결한 후 각 염전에서 물이 증발되어감에 따라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지면 다음 단계의 염전으로 보내 단계적으로 제염을 하는 방식이었다.<ref>이 방식의 천일제염법은 국내에는 20세기 초 구한말에 일본인에 의해 보급되었다.</ref> 이 방식은 연료 소모가 없기 때문에 생산비용도 다른 천일제염법 생산법들에 비해 현격히 낮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소금무역 중심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주요소금생산국가들과 독점교역을 추진하였고, 13세기에는 소금시장의 통제를 위해 소금세를 도입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렇게 자국내에 생산,집적된 소금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취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화국 정부가 베네치아 시민들에게는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국제가격의 절반가에 파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중가격제도를 실시하였다. ===아르세날레=== [[File:Venetian Arsenale.jpg|300px|thumb|right|베네치아 아르세날레]] 1104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르 도제에 의해 설립된 거대산업단지인 아르세날레(Arsenale<ref>영어의 Arsenal과 같은 어원</ref>)는 베네치아 국력 및 군사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공화국이 융성했던 14세기에 원래 규모의 4배 크기로 확장,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깨작깨작 확장되어 16세기에 오늘날과 같은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아르세날레 지구는 베네치아 시가지 면적의 15%를 점하고 있으며, 현대엔 아르세날레 일부 지구에서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기도 한다. 아르세날레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복합산업단지였고 16세기에 15,000명이 넘는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선박과 선박의 모든 부품 및 자재, 대포, 석궁, 총기류와 같은 무기류, 심지어 해상식량인 빵도 만들었다. 아르세날레는 베네치아 당국의 세심한 관리를 받았다. 공화국 대평의원회는 3명의 상원의원들과 3명의 후원자들을 이 곳의 관리책임자로 배치하였다. 공화국은 아르세날레 내부에 부속 기술학교를 설립하였고, 정부가 직접 명공인들의 기술 전수를 독려했다. 아르세날레 직공직은 공화국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일단 평생직장인데다 높은 급료를 받았으며 급료 지불대장에 이름만 등록되면 아파서 병가를 내도, 늙어서 은퇴를 해도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급료를 지불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세날레 직공이 되려면 높은 기술수준을 보유해야만 했으며, 작업에서의 실수는 큰 불명예가 되었고 따라서 높은 책임감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아르세날레는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한 산업단지였고, 그런만큼 하나의 실수가 전체의 결함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세날레에서 돛 장인들은 돛만을, 목재 장인들은 목재만을, 키 장인들은 키만을 만들었고, 각 분업유닛들의 생산품을 조립하는 것으로 아르세날레의 공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효율적인 공정이었다. 프랑스의 국왕인 앙리 3세가 베네치아를 국빈방문했을 당시, 연회가 진행되는 한 시간만에 갤리선 한척이 완성되어 앙리 3세가 놀라기도 하였다. 1570년 오스만 튀르크가 키프로스를 침공했을 당시, 아르세날레는 불과 2개월 만에 전투함선 100척을 찍어내어 그 저력을 보여 주었다. 아르세날레는 선박과 무기류 이외에 빵으로도 명성을 누렸다. 아르세날레에서 구운 빵은 뱃사람들에게 최고의 음식으로 간주되었고, 베네치아에 기항한 선박들은 너도 나도 아르세날레에서 빵을 구입해갔다. 베네치아 빵은 그 유통기한이 매우 길었고, 결코 상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1821년 크레타 섬에서 오랜기간 방치되어 있던 구 베네치아 공화국 요새의 벽돌창고가 개방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엄청난 양의 아르세날레제 빵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 빵들은 두 세기 가까이 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먹을 수 있었다고 하며, 당시 가난했던 크레타인들의 배를 채워줬다고 한다. 이처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국영산업이 번영을 누렸지만, 사영 조선소들도 이에 못지않게 번창했다. 상선의 경우 전체 수량의 80% 가량이 사설 조선소에서 생산되었다. ===인쇄업=== [[File:마르치아나 도서관.JPG|300px|thumb|right|마르치아나 도서관]] 근세 인쇄술은 독일에서 발명되었으나 이는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웠고 그 중심에 베네치아가 있었다. 베네치아에는 독일 상인들에 의해 인쇄술이 전래되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기술 전수만 한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눌러앉아 산업을 차리기도 하였다. 초창기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서적의 3/4 가량이 독일계 인쇄소에서 출간된 것이었다. 독일인들이 굳이 베네치아까지 와서 인쇄산업을 차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도 같다 : 먼저, 베네치아 공화국은 포 강이라는 비옥한 강을 끼고 있는 베네토 지역과 롬바르디아 지역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 지역은 유량이 풍부하여 수력으로 풍부한 양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방대한 상업/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유럽의 다른 지역들, 심지어는 근동 시장에의 출판물 유통에 용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언론의 자유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였으며, 국력도 융성하여 그 악명높은 교황청의 검열에 어느정도 면역력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지역 내 꼰대(특히 성직자)들의 눈치 때문에 절대 출간할 수 없는 유형의 서적들도 베네치아에서라면 출간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종교서적에 있어서 유럽 내 최고수준의 출하량을 자랑했지만, 한편으로는 야설, 춘화집 분야에서 경쟁상대가 없는 출판도시이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러한 강점들에 힘입어 베네치아 공화국은 세계 인쇄업의 진앙지가 되었으며, 전성기인 16세기 중반 공화국은 유럽 전체에서 출판된 책의 절반, 전 세계에서 출판된 책의 1/3 이상을 찍어냈다. 이렇듯 베네치아 공화국은 세계 최초의 출판업 중심지로 군림하였고, 패권기에 다양한 혁신들을 창출하여 오늘날의 서적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인쇄공들은 최초로 <I>필기체</I>를 서적에 도입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이 필기체를 이탤릭(<I>Italic</I>)체라고도 부른다. 또한 세미콜론과 어퍼스트로피, 악센트 등의 부호 등도 이 시기 베네치아에서 서적의 가독성 증진을 위해 고안된 부호들이다. 오늘날의 시리즈물과 같은 개념의 콘텐츠가 최초로 형성된 곳도 베네치아였다. 그 이외 베네치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신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의 신문은 가체타(Gazzetta) 동전 한 개면 구입할 수가 있었고, 이 때문에 가체타(Gazzetta)라고 불렸다. 이는 단어 끝에 a음을 쓰지 않는 프랑스에서 가제트(Gazzette)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고, 이가 다시 영국으로 전래되어 오늘날 영어권에서 신문을 가제트(Gazzette)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네치아의 출판업은 한 세기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558년 12월부터 시작된 교황청의 금서 탄압의 영향으로 인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레판토 해전을 치른 16세기 후반부터는 베네치아와 로마 간의 관계가 긴밀해져 종교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결국 베네치아는 16세기를 끝으로 출판업 중심지의 지위를 잃게 된다. 17세기에도 여전히 베네치아는 주요 출판도시로 남기는 했으나, 이미 프랑스 [[파리]]의 절반 미만 수준으로 책 출하량이 감소하였고,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도시들에 대해서도 우위를 가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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