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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농성(결말)= 1977년 1월, 가농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부에 제출하고, 4월에는 농민들을 불러모아서 옆 동네 [[광주광역시|광주]]의 한 성당에서 규탄 시위를 벌였다. 그제서야 당황한 농협은 무이자 대출을 제안했지만 농민들은 이 제안이 띠꺼울 수밖에 없었다. 사태 해결은 좆도 안 됐고 결국 경찰이 시위 현장에 들이닥치더니 진압당했다. 이 일은 가농이 다른 지역의 교구들에게 알리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사건은 쓸데없이 엄청 커졌다. 농민들은 농협의 전남 도지부로 직접 찾아가서 도지부장과 면담을 신청했지만 기동대가 투입되어서 곤봉만 더 얻어맞았고 강제로 해산당했다. 이 시위는 정부의 귀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그제서야 조사반을 파견하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농협 전남지부장이 TV 방송으로 전매를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때 밝혀졌다. 농협은 책임의 화살을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어졌고 희망이 생겼다고 여긴 농민들은 이때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랐지만 정작 윗대가리 농수산부와 농협 중앙회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뻐겼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서 1978년 4월이 되었다. 광주 북동천주교회에 피해농민, 가농 회원,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천주교 신자 등 700여 명이 모여서 대규모 시위를 다시 한 번 실시했다. 시위를 진행하면서 거리 시위에 나서기로 했지만 또 경찰에게 진압 당해서 시위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해산하지 않은 73명이 성당 안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고 버티기 모드에 들어갔는데 경찰은 성당 문을 잠가버리고 미사를 금지했다. 문 안 잠그면 주말이 되어서 신도들이 성당에 와서 이 현장을 볼 것이 뻔했고 괜히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어찌 보면 70년대에 걸맞은 대응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연히 지금 와서 보면 좀 미개하게 보이는 대응 수준이겠지만. 어쨌든 전국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천주교 인사들이 찾아와서 농민들을 격려하였고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단식에 농민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져가자 이 인사들은 단식 농성에 동참하기도 했다. 농성 4일째에 접어들어서 정부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나섰다. 성당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 서경원, 전남도지사 [[고건]], 중앙정보부 전남국장 김광호,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참석해서 협상 테이블을 벌였다. 일사천리로 협상이 진행이 되었다면 좋았겠으나 제시한 보상금은 참으로 환상적이기그지없었다. {{인용문|100만 원으로 타협합시다. 이 정도면 되겠죠?|고건}} 결국 농성은 더 길어졌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전남 농협은 항복을 선언하면서 309만 원이 농민들에게 전달했고 비로소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이때 농민들에게 돌아간 보상금은 1인당 19,300원. 시위가 완전히 멈춘 것은 농성 도중에 연행되었던 사람 2명이 완전히 석방되었던 5월 2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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