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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고구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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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개요[편집]

1976년 11월 늦가을부터 전남 함평에서 있었던 일련의 고구마 소동이다.

발단[편집]

출처

함평 농협: 작년에 고구마가 크게 흉년이 들어서 올해는 고구마 수요가 많아질 거라고 허니, 올해는 안심들 하시고 고구마 농사 많이들 지으쇼잉.
수확한 건 빼깽이[1]로 맹글지 말고 걍 고대로 넘기시고들.

함평 농민: 아 그럼 좋지라. 근디 얼마나 쳐줄랑가요?

농협: 고로코롬만 혀면, 가마니[2]당 1300원씩 쳐줄랑게요.

농민: 으따, 1300원이면 솔찬히 좋구마요잉.

 
— 모든 사건의 시작

정확히는 1,317원이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한다면 통계상으로는 12,000원 정도의 가치를 갖는다. 구매력과 물가 상승률 등을 같이 고려하면 15,000원으로 볼 수도 있겠다.

빼깽이가 에탄올의 원료로 쓰이기 때문에 만들어서 파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농협에서 생고구마를 사겠다고 했으니 훨씬 편했고, 그래서 함평의 7,000여 가구의 농민들은 그해에는 고구마 농사만 지었다. 함평의 고구마 생산량은 덕분에 평년보다 25% 증가하였고 이 사건이 발생한 1976년의 수확량은 2만 5천 톤 정도에 달하였다. 농민들은 실어가기 쉽도록 수확한 생고구마를 포대에 담고 도로변에 쌓아 놓았다. 고구마를 많이 캤다는 소식을 접한 인근 지역의 상인들은 고구마 한 가마니를 1,200원에 자기에게 팔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당연히 씹었음 ㅋ

문제 발생[편집]

파일:떡락.gif 뜨어어어어억락 가즈아아아아~~
이 문서에서는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엄청난 손해를 입은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떡락해도 추해진 것들이니 부디 미리 손절하길 바라며, 구조대 기다리다 한강에 빠지거나 해도 디시위키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농민: 시방 이것이 머당가요?

상인: 아, 그게... 올해 고구마가 지나치게 풍년이라서...

농민: 아니 이제 와서 그딴 소리혀면 어떡한데요? 농협만 믿고 안 팔고 그동안 버텨왔는데, 시방 장난하는 거요, 뭐요?

막상 수매일이 되어서 농협에서 트럭을 보냈는데 트럭은 1만 톤만 실었고 나머지는 내팽개쳤다. 당연히 트럭에 실리지 못한 고구마는 추운 날씨에 점점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가마니에 400원, 심하면 200원이라는 개똥값에 팔아 치웠지만 그래도 손해는 어쩔 수 없었다.

농협의 방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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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상황이 이러했음에도 막상 피해 신고한 농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냥 손해로 떠안고 내년 한 해 동안은 고구마만 삶아먹으면서 보내겠다는 식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냥 체념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농협도 이런 분위기를 보면서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정도 지나자 당시 유일했던 농민운동 단체 가톨릭농민회(가농)[3]에 소속했던 농민과 농민운동가들은 부당성을 곧 깨닫고 함평의 한 식당에서 모여서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린다.

농민: 우리 군(郡)의 피해가 총 얼마나 되능가요?

가농: 글쎄요. 계산을 좀 해봅시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집이 총 7천 여 가구... 한 가구당 50가마니씩 수확했다고 치고, 농협에서 제대로 수매해 주지 않은 고구마가 가구당 30가마니 정도라고 할 때... 30가마니 중에서 20가마니가 헐값에 팔리고 나머지 10가마니는 썩혀서 버렸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한 집 당 2만 원씩은 손해 본 것 같네요. 그러면 7천 가구가 피해를 입은 건 총 1억 4천만 원이 될 듯해요.

농민: 아따 겁나게 많구마요잉.

피해 견적도 뽑았겠다, 이제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보상금만 받으면 다 끝날 일이었겠지만 신고한 농가는 160가구, 총 피해 신고액은 309만 원에 그쳤다.(농가당 1만 9312원 꼴이다.) 고시했던 수매가에 사가지 않아서 발생한 280만 원의 손해에 대한 보상과 썩어버린 고구마에 대한 보상금 29만 원(223포대)이었다. 농협에서 이장을 앞세우고 피해 농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아무 피해도 없다는 확인증을 받으러 돌아다녔기 때문에 신고자 수가 예상에 훨씬 못 미쳤다. 피해 보상을 요구하면 우수 마을로 선정되지 못 하고, 그렇게 되면 지원금과 비료도 안 나오게 된다고 사람들 입을 단속하고 다녔던 것이다. 만약 피해 보상금을 탔다면 그 집에 찾아가서 회유와 협박 등을 감행했다. 그것도 아니면 지역 경찰이 농민을 간첩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근데 이 보상금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위기에 처했다.

단식 농성(결말)[편집]

1977년 1월, 가농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부에 제출하고, 4월에는 농민들을 불러모아서 옆 동네 광주의 한 성당에서 규탄 시위를 벌였다. 그제서야 당황한 농협은 무이자 대출을 제안했지만 농민들은 이 제안이 띠꺼울 수밖에 없었다. 사태 해결은 좆도 안 됐고 결국 경찰이 시위 현장에 들이닥치더니 진압당했다. 이 일은 가농이 다른 지역의 교구들에게 알리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사건은 쓸데없이 엄청 커졌다.

농민들은 농협의 전남 도지부로 직접 찾아가서 도지부장과 면담을 신청했지만 기동대가 투입되어서 곤봉만 더 얻어맞았고 강제로 해산당했다. 이 시위는 정부의 귀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그제서야 조사반을 파견하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농협 전남지부장이 TV 방송으로 전매를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때 밝혀졌다. 농협은 책임의 화살을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어졌고 희망이 생겼다고 여긴 농민들은 이때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랐지만 정작 윗대가리 농수산부와 농협 중앙회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뻐겼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서 1978년 4월이 되었다. 광주 북동천주교회에 피해농민, 가농 회원,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천주교 신자 등 700여 명이 모여서 대규모 시위를 다시 한 번 실시했다. 시위를 진행하면서 거리 시위에 나서기로 했지만 또 경찰에게 진압 당해서 시위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해산하지 않은 73명이 성당 안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고 버티기 모드에 들어갔는데 경찰은 성당 문을 잠가버리고 미사를 금지했다. 문 안 잠그면 주말이 되어서 신도들이 성당에 와서 이 현장을 볼 것이 뻔했고 괜히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어찌 보면 70년대에 걸맞은 대응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연히 지금 와서 보면 좀 미개하게 보이는 대응 수준이겠지만. 어쨌든 전국 각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천주교 인사들이 찾아와서 농민들을 격려하였고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단식에 농민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져가자 이 인사들은 단식 농성에 동참하기도 했다.

농성 4일째에 접어들어서 정부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나섰다. 성당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 서경원, 전남도지사 고건, 중앙정보부 전남국장 김광호,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참석해서 협상 테이블을 벌였다. 일사천리로 협상이 진행이 되었다면 좋았겠으나 제시한 보상금은 참으로 환상적이기그지없었다.

100만 원으로 타협합시다. 이 정도면 되겠죠?

 
— 고건

결국 농성은 더 길어졌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전남 농협은 항복을 선언하면서 309만 원이 농민들에게 전달했고 비로소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이때 농민들에게 돌아간 보상금은 1인당 19,300원. 시위가 완전히 멈춘 것은 농성 도중에 연행되었던 사람 2명이 완전히 석방되었던 5월 2일의 일이었다.

감사원의 보고[편집]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망하는 것은 쌤통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그렇기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따잇^

사태가 일단락 되자 감사원에서는 농협과 주정(酒精)회사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는데 농민들에게 헐값에 고구마를 구입하고 중간 상인을 통해서 비싸게 구입했다는 식으로 장부를 허위 작성, 그 마진으로 80억 원의 탈세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659명에 대한 해임, 해직 등의 인사 조치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유신 정국 속에서 농민들이 승리를 거머쥔 몇 안 되는 사례로서 의의를 갖는다. 까딱 잘못했으면 함평 농민들이 북한 인민으로 뒤바뀔 뻔했다는 점에서도 어떻게 보면 아찔한 사건이기도 하고.


  1. 말린 고구마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다. 자매품으로 경상도 사투리로는 '빼데기'라고 한다.(통영 일대에서는 빼데기죽이 토속적인 식품으로 유명하니까 놀러 갈 기회가 생긴다면 한 번은 먹어보도록 하자.) 표준어로는 '절간고구마'라고 부르지만 절간(切干)이 切り干し(키리보시)에서 유래한 거라서...
  2. 1가마니는 약 80kg이다.
  3. 유명한 회원으로는 故 백남기 씨가 있다. 이 사람이 가입했던 건 1985년도로, 이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