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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사회주의}} 柳馨遠,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 1673년 5월 5일(음력 3월 19일)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조선중기 [[효종]]~[[현종]]대에 활약한 학자이자 [[실학]]의 스타트를 끊은사람. 그의 집안인 문화류씨 일가는 북인쪽이었다.<ref>나중에 그가 살아있을때 남인으로 전향.</ref> 그래서 [[인조 반정]]때 [[광해군]]복위를 꾀했다고 북인들이 2차로 썰릴때 아버지도 누명씌여서 같이 썰렸다.<ref>진짜 모가지뎅겅당한건 아니고 누명써서 자살함.</ref> 때문에 어린나이에 아빠를 잃은 그는 명망높은 학자였던 외숙부 이원진과 전직 호조판서였던 고모부 김세렴밑에서 자랐다. 5살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2년만에 [[사서삼경]]중 하나인 서경(書經)을 읽고 감동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외에 청소년기에는 [[허목]]의 밑에서도 수학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서 [[과거제|과거]]를 치러갔다가 [[매관매직]]때문에 걸레짝으로 전락한 과거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나선 관직진출의 꿈을 깔끔히 포기하게 되었다<ref>할아버지의 부탁때문에 마지못해 과거를 여러번 치긴했다. 근데 전부 떨어졌다. 한번은 진사시에 붙긴했지만 대과에서 떨어짐...</ref>. [[선비]]놈들이 돈은 안벌고 과거시험공부한다고 밥만축내니까 과거제 폐지하고 공거제하자고 주장할정도로 과거제를 미친듯이 까댔다. 그래서 그는 과거공부안하고 독서/학술연구<ref>학술연구를 겁나게 해대서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에서 전문가의 긍지에 올랐다.</ref>나 여행으로 여생을 보냈다. 여행할때 전국 방방곡곡<ref>[[여주]]나 [[양평]], [[원주]]([[병자호란]]한정)로 이사가서 거기서 살기도했고, 고모부가 [[함경도]]+[[평안도]]관찰사로 있었을때 함경도와 평안도전역을 방문했다. 나이많이 들어서 [[부안]]으로 내려가 거기서 칩거하면서도 여러군데 많이 돌아댕겼다. 이때 돌아댕기면서 얻은 지식들로 〈여지지〉,〈군현지제〉,〈기행일록〉이란 지리서를 썼다.</ref>을 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씹창난 조선 민생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농민 생활개선을 위해 병농일치제, [[노비종모법]]폐지, 부역과 조세의 균등등의 다방면에서 제도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학의 스타트로서 토지개혁이 메인이 되야한다고 해서 중농학파로 분류되긴하는데, 상업도 장려해야한다고 말한거보면 짬뽕인듯? 여담이지만 1963년 [[반인반신]]이 실시한 서울 대확장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강북쪽으로 올라가는 쪽이 메인이라는게 차이긴 하다만<ref>강남에선 [[영등포구]], [[동작구]], [[서초구]]북부, [[강남구]] 압구정동, [[송파구]] [[잠실]]정도만 생각했고 강북쪽의 경우 지금 서울강북외에도 [[구리시]], [[의정부]], [[고양시]] [[덕양구]]도 포함되어있었다.</ref>. 그리고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약용]]과 [[정조]]의 [[수원화성]]축조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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