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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馨遠,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 1673년 5월 5일(음력 3월 19일)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조선중기 효종~현종대에 활약한 학자이자 실학의 스타트를 끊은사람.

그의 집안인 문화류씨 일가는 북인쪽이었다.[1] 그래서 인조 반정광해군복위를 꾀했다고 북인들이 2차로 썰릴때 아버지도 누명씌여서 같이 썰렸다.[2] 때문에 어린나이에 아빠를 잃은 그는 명망높은 학자였던 외숙부 이원진과 전직 호조판서였던 고모부 김세렴밑에서 자랐다. 5살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2년만에 사서삼경중 하나인 서경(書經)을 읽고 감동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외에 청소년기에는 허목의 밑에서도 수학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서 과거를 치러갔다가 매관매직때문에 걸레짝으로 전락한 과거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나선 관직진출의 꿈을 깔끔히 포기하게 되었다[3]. 선비놈들이 돈은 안벌고 과거시험공부한다고 밥만축내니까 과거제 폐지하고 공거제하자고 주장할정도로 과거제를 미친듯이 까댔다.

그래서 그는 과거공부안하고 독서/학술연구[4]나 여행으로 여생을 보냈다. 여행할때 전국 방방곡곡[5]을 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씹창난 조선 민생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농민 생활개선을 위해 병농일치제, 노비종모법폐지, 부역과 조세의 균등등의 다방면에서 제도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학의 스타트로서 토지개혁이 메인이 되야한다고 해서 중농학파로 분류되긴하는데, 상업도 장려해야한다고 말한거보면 짬뽕인듯?


여담이지만 1963년 반인반신이 실시한 서울 대확장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강북쪽으로 올라가는 쪽이 메인이라는게 차이긴 하다만[6]. 그리고 수원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약용정조수원화성축조로 실현되었다.

  1. 나중에 그가 살아있을때 남인으로 전향.
  2. 진짜 모가지뎅겅당한건 아니고 누명써서 자살함.
  3. 할아버지의 부탁때문에 마지못해 과거를 여러번 치긴했다. 근데 전부 떨어졌다. 한번은 진사시에 붙긴했지만 대과에서 떨어짐...
  4. 학술연구를 겁나게 해대서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에서 전문가의 긍지에 올랐다.
  5. 여주양평, 원주(병자호란한정)로 이사가서 거기서 살기도했고, 고모부가 함경도+평안도관찰사로 있었을때 함경도와 평안도전역을 방문했다. 나이많이 들어서 부안으로 내려가 거기서 칩거하면서도 여러군데 많이 돌아댕겼다. 이때 돌아댕기면서 얻은 지식들로 〈여지지〉,〈군현지제〉,〈기행일록〉이란 지리서를 썼다.
  6. 강남에선 영등포구, 동작구, 서초구북부, 강남구 압구정동, 송파구 잠실정도만 생각했고 강북쪽의 경우 지금 서울강북외에도 구리시, 의정부, 고양시 덕양구도 포함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