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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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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진지}} 당시 철도를 이용한 수송은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때도 전철화는 가능했지만 당시 우리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한 이유로 함백선 같은 지금은 쓰지도 않는 노선들이나 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석탄 수송하느라고 많이 썼겠지만 인프라는 미래도 보고 짓는 거지 현재만 보고 만드는 건 아니니까. 또 울산에 정유공장을 지으면서 대량 생산되는 아스팔트를 처리해야 하니 도로를 많이 깔 필요도 있었다. 박정희는 독일에 갔을 당시에 아우토반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차가 달리면서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높게 삼았고 가다가 말다가 하면서 차를 계속 세워서 멋있다고 내려서 고속도로를 관찰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여기서 매우 큰 영감을 얻어서 67년 대선 때 경부고속도로 개발을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예상되는 사업비는 330억 원으로 1년 정부 예산의 1/5였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일본에서 받아온 돈을 소양강 댐 건설 등에 나눠주고 남은 돈을 확보했고 월남에 파견한 국군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한테 받은 돈을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으며 더군다나 당시 기후가 심각했기 때문에 호남과 영남에서 농사가 잘 안된다고 곡소리가 났지만 정부는 싸그리 씹고 건설을 강행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 성장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여전해서 하루 19시간을 휴일 없이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벽까지 야근과 잔업을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더 빨리 지어야 하는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정부에서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1970년 말로 앞당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왜? 1971년 대선 때 써먹으려고... 결국 이렇게 지은 고속도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에 관한 무관심은 여전해서 77명이 경부고속도로를 짓는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것도 모자라서 도로 주변으로 땅값이 올라버려 영농의 영세화를 초래하고 말았고 이는 이촌향도의 심화로 이어졌다. 특히 겨울철에는 땅이 얼기 때문에 도로 포장을 하지 않지만 무리하게 땅을 녹이면서 작업했기 떄문에 도로가 갈라지고 푹 꺼저버리는 것은 물론 중앙분리대도 없애 버렸고 아스팔트를 너무 얇게 발라 비포장 도로에 가까운 처참한 상태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를 지은 비용 400억의 4배인 1600억이 고속도로 수리 비용으로 나갔다. 더군다나 당시 정부는 71년 대선 승리를 위해 정치자금 800억을 저축해두고 있었지만 고속도로 사업에 한 푼도 지출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정부는 정권의 안정화를 위하여 경제 개발을 지시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취지에 문제도 많았다. 당시 지은 취지는 자동차를 이용한 국토의 반나절 생활권 구축과 부산항을 이용한 효과적인 수출이었다. 그런데 자동차는 너무 값비쌌기 때문에 아무도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산항을 이용한 수출을 위해서였느냐? 아니다. 부산이 물동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한 연도는 1974년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약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경부고속도로를 지을 당시에는 아무런 계획도 뭣도 없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나서 한 몇 년 동안은 거의 활주로 수준이었고 70년대 후반이 되서야 슬슬 물동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 서울과 수도권 개발을 위해 공단을 만들어 놨었다. 그런데 수도권에서 이용하기는 부산항의 메리트는 거의 없다. 부산항의 수심은 고작 9m로 대형 선박이 들어오기에는 부족한 정도이다. 서해이면서도 가깝고 수심이 깊은 평택이나 아산(14m)를 이용하지. 그래서 부산신항을 개발하고 있는 거고. 결국 정부에서 고속도로를 개발한 이유는 보여주기식 행정, 자기네 고향 애착이 듬뿍 담긴 대구경북권, 특히 반인반신의 고향이었던 구미, 대구에 대규모 공단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파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정치적, 지역적 논리가 적용되지 않은 사업이 없었다. 라고 문베충 버러지 새끼가 책과 논문대신 인터넷 저질선동글 몇개 주워읽고 지껄이는데 경부축 개발의 이유는 존나 당연히 자동차 타고 다같이 놀라가자 닐리리가 아니라 수도권 산업단지에서 나온 화물들을 화물차로 잽싸게 부산항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근데 여기다 대고 자동차가 없는데 웬 고속도로를 짓냐고 정신나간 씹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그럼 시발 반대로 고속도로도 없는데 사람들이 차를 많이 사겠냐? 당연히 앞으로 자동차 시대가 열릴것이다 예상해서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길을 미리 열어두는게 순서가 맞는거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차사고 1가구 1자동차 시대 열리고 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고속도로 짓게? 독일도 경제성장 아이콘중 하나로 고속도로 즉 아우토반을 떠올리는데 이 아우토반이 처음 계획되었던 당시 독일의 자동차 보급률이 얼만지는 암? 당시 독일도 자동차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는데 독일 경제계가 아무렴 너보다 병신이라서 아우토반을 지을려 했을까? 부산항에 대한 선동도 마찬가지다. 부산항은 이미 좆선시대부터 좆선의 최대 무역항이었고 산업시대 들어서도 일제에 따먹히기 전 대한제국이 제일 먼저 한 근대화 사업중의 하나가 1894년 부산항구조설공사 였다. 일제시대에도 쌀 많이 뽀려가기에 제일 좋은 항구가 부산항이라 1930년대에 현대식 갑문과 부두를 만들었고 해방후에도 꾸준히 증개축 해서 이미 1961년 즉 박정희가 정권 잡았을 무렵에 이미 2단계 9부두까지 완료된 상황이었고 박정희는 3단계를 진행시킨거다. 박정희가 일부러 부산항을 개발시킨게 아니라 원래 개좆선 시대부터 인천과 1,2위를 다투는 좆선 최대의 항구도시였고 대한제국 광무개혁때도 최우선순위였고 일제시대에도 최우선순위였고 해방후에도 그랬을 뿐이다. 거기다 좋든싫든 자본과 기술력을 일본/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얘네 아니면 누구한테 받을래? 짱깨? 러시아? 북한? 똥남아?) 당연히 그쪽 방향과 가까운 부산이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평택아산은 씹년아 당시 짱깨랑은 냉전+한국전쟁으로 아예 미수교국이었는데 평택아산 돈처들여 개발해서 뭐하게 60년대 70년대 냉전 절정기에 공산주의로 편 바꿔 타기라도 하게? 병신새끼 ㅋㅋㅋㅋ 당시 짱깨가 좆프리카보다도 가난한 씹빈민국 거지발싸개 였는데 평택아산 개발해서 참 씨발 잘도 짱깨한테 물건 팔아먹었겠다. 게다가 그놈의 우덜고향 어쩌구는 니가 숭배하는 핵대중 새끼가 하도 우덜식 고향팔이로 표팔이 했으니 남도 그럴거라 생각하나보지? 정작 통정희 고향인 경북은 전국에서 손꼽히게 낙후된 지역인데 으따 통정희가 지 고향 챙길려고 개쌍도 개발했당께요~ 풉 흑산도 공항이나 처짓는 너그들 수준인줄 암? ㅋㅋ 참고 문헌: <br> 1.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112.html<br>2.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권 p.296 <br> 3. 송용진, 한국사 기행 p.304 <br> 4.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1007061709514750082§ion=S1N10 <br>5.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p.189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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