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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공산주의(전간기~냉전기) == {{공사}} 암거나 생각나는거 있으면 적어주삼ㅁㅁ '''전간기 공산주의''' 숙청 대상에 포함되는 니콜라이 부하린과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가 1919년에 쓴 "The ABC of Communism" 가 1920년 말까지 소련,해외 공산주의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저자들은 서문에 이 글은 "공산주의 지식의 기초 교과서" 라고 적었고. 책 앞부분에 선언에는 러시아 혁명에 의해 내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러시아 혁명 그자체는 전 세계에서 일어날 일반 혁명의 전조이며 시작에 불과하다 ㆍㆍㆍ 우리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혁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략) 그렇게 추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가지 사실을 혼동하고 있다,하나는 혁명의 시작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의 성격 곧 그 철저함의 정도다. ㆍㆍㆍ 영국에서는 혁명이 더 늦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프롤레타리아는 승리를 거둔 뒤 더욱 빨리 공산주의를 조직할 것이다. 선언에선 '''혁명 세력의 국제적 차원에서 이끌어갈 중앙 지도부의 필요성'''이 재차 강조됐다. 소련 공산주의와 경쟁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들(ex:제2 인터내셔널 등)에서 구체화된 해석들은 향해 코민테른 문서에선 타협의 여지없는 적대적 태도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의 강령에선 이렇게 표현했다.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진 국가들에 있는 노동계급의 상호 절대적 신뢰와 가장 친근한 형제애적 연맹 그리고 최고도의 결집이 필수다. 이 조건들을 실현하려면 공식적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유력 정당들을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적으로 왜곡된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끊고 그에 맞서 혹독하게 투쟁할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혁명 이전과 이후 국가의 성격과 관련해서 부하린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 제시한 분석을 극단적 현실주의와 극단적 이상주의 측명모두에서 상당 부분 그대로 따르고 있다.그러므로 자본주의 국가는 착취를 보장하기 위해 형성된 지배계급의 연합이다. 자본의 이윤,오직 자본의 이윤만이 -길잡이 별이 되어 이 강도 집단의 모든 활동을 이끌고-교회도 이끈다, "자본과 교회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신의 법은 변합없이 유산계급의 법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는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 국가에서 실시되는 사회 보호 또는 복지라는 명백한 변칙 사례를 다룬다, 복지 제도 한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며,노동계급의 압력 아래 채택되거나 군사적 모험의 총알받이 공급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다. 공산주의 사회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질서에는 지주도 자본가도 임금 노동자도 없다,거기에는 다만 인민 즉 동무들이 있을 뿐이다, 계급이 없으면, 계급 전쟁도 없고 계급 조직들도 없다, 따라서 국가도 존재하기를 멈춘다. ㆍㆍㆍ 국가는 불필요한 잉여가 되는 것이다,속박 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속박을 할 사람도 전혀 없다. ㆍㆍㆍ 따라서 국가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ㆍㆍㆍ 게다가 (생산을 비롯하여 기타 활동을 조율하기 위한) 국가기구에서는 날마다 다른 사람이 돌아가며 일할 것이다, 관료제 즉 관료들의 영구적 지배체제는 사라질 것이다, 국가란 멸종되고 말 것이다. 볼셰비키 뿐만 아닌 맑스까지도 이것이 그들의 궁극적 이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중간 시기에는 노동자 국가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한 것이긴 하지만, 그뒤엔 프롤레타리아의 국가 권위 또한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쓴 내용들은 사실 너무나 '''이상주의적인''' 내용들 뿐이다. 인간 행동의 유연성을 비현실적으로 구상한 것을 차치하더라도,자연자원을 무한하다고 가정하고 환경적 제약은 고려하지도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와 그 변종들을 공격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개인적 의식과 계획 그리고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인간의 이러한 측면들이야말로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강조한 것이다.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승리를 송찬했지만 이론,실천 둘다 일부 내용을 경시하는 실수를 저질렸다. 경제와 사회구조가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그에 대한 '''현실적 방안'''은 그 경멸하는 자본주의를 재도입하여 관용함으로써만 구원이 되었다. 이 상황은 그들을 극'''단적인 권위적 통치'''로 몰아갔다. 그결과는 경제와 사회 영역에서 억지로 양보해야 했던 사항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양보라는 해석으로 받아드리지 않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레닌의 사망이후 그의 저술들은 종교적인 권위와도 같은 위치로 올랐다.그리고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트로츠키를 제외한 나머지 레닌의 후계자들은 그의 저술과 전망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에 통합적으로 연결된 지위에 올리고, 이후 그와 동등한 위치의 권위를 만들고자 마르크스레닌주의 라는 이름을 고안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스탈린이 '''소비에트 국가'''의 최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어떠한 짓이든 안가리고 조지적 기술들과 결합하여, 자기 동료들과 맞서거나 그들과 더불어 사용했던 주요 전략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연속으로 소비에트 국가는 1929년 쯤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에 "The ABC of Communism"에서 밝힌 세계 연속적 혁명의 입장에선 보기엔 매우 낯선 환경이였다. 그러나 일국 사회주의 당시 현실엔 더욱 잘 들어맞는 듯 보였다. '''레닌''' 간단하게 설명하면 1914년 이전의 그는 정통 맑시즘파였다. 그의 생각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카를 카우츠키의 저작을 자주 언급했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1905년에 루스키 혁명 이전에 제정의 불법적 사회주의 지하운동에서 그가 다른 맑스주의 혁명가들과 구별될 만한 점은 거의 없었지만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집단들을 모으려는 시도가 실패'''(실상은 다수 체포엔딩)한 뒤 유배된 레닌과 다른 맑스주의자 혹은 국내 지하 세력들을 새로운 시도에 대해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레닌은 "Что делать?" 라는 팸플릿을 썼는데 앞으로 전개될 공산주의 운동의 이데올리기적 주춧돌이 됐다고 볼 수 있는 책이였다. 그는 자신의 딱가리 중에 노동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늘 불평하곤 했다.(맑시즘 추종자 말고) '''대전쟁 말기 소비에트 혁명''' 1917년 초부터 모든 러시아의 전쟁이 여파가 지속되 행정 물자 공급이 중단되자 부패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통치 아래 있던 민중들의 분노가 발산하자 '''소비에트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예전에 레닌이 소비에트에 관해서 부르주아적인 의회 통치의 비해서 1000배 정도 민주적이였다고 말하였다.) 제국군 병사들까지도 동참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st.페테르부르크 반독일 감정으로 이름 변경) 에선 소비에트와 쌍방으로 권력을 사용하였다. 두마의 빈자리는 카데트(자본층)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레닌은 진노하였다.왜냐 레닌은 지금이야말로 허약해진 자본주의의 사슬을 풀어내고 노동계급의 권력을 성립시키고는 유사한 혁명을 대륙전역에 불러일으킬 때라 말했다. 이때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이 등장하였다. 이 시점에서도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조 차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4월 레닌은 독일의 러시아 분열 도박 카드로 봉인열차를 태워준다. 그리고 자신의 정당 정책의 실행을 요구하였지만 7월달 쌍방권력자 지지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좌절 을 맛보았다. 다수의 볼셰비키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레닌은 핀란드로 은신띠 하고 “Staat und Revolution(국가와 혁명) 을 써내렸다. 빨갱이력으로 10월달 쯤 정권 탈취에 성공한 '''레닌의 정부는 예전부터 정적들이 요구한 연립정부(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 등)가 아닌 단독으로 정부를 꾸렸다.''' 여기서 자기들이 제헌 국회에서 다수당이 될줄 알고 투표를 하였지만 결과는 지지률이 미미(볼셰비키{24%},사회 혁명당{52%})하였고. 좆같던 여당은 '''국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즉시 2월부터 내전이 시작되버렸다. 그들의 다양한 적수들은 전부 연합국의 무기 지원(프랑스 같은 경우에 지원해준 이유로는 차르 시대에 졌던 모든 부채를 레닌 정부가 갑는걸 거부하여 부유층 뿐만 아니라 하급 중산층들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옴,그리고 당시 소비에트는 세계 연속적 혁명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어서 이후에는 자신들 에게 위협임.)을 받고 (하지만 지휘체계가 엉망이였음 이후 콜챠크의 노력에도 안되었음) 소비에트에 대항하였다. 소비에트는 자신들의 통제가 가능한 땅엔 단독으로 통치했으며 타 정적들을 불법화시켰다. 일당통치는 예견된 적을 없지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고유하게 나타났었다. 결과는 볼셰비키의 승리도 전 러시아 국토에는 그들의 권위가 확립되었다. 내전의 경험으로 자신들의 갈등과 약점에 대해서는 실천방식으로 군사력,권위주의,교주주의를 우선순위로 두워서 편협하고 잔혹한 해결책을 사용하게 된 시초가 되었다.(이후에 정책에서도) '''숙청''' 오늘날도 숙청에 관해선 말이 많지만 스탈린 그는 개개인보단 범주로 나누어서 박해아였다. 불온한 집안이라는 이유라도 그 의심의 대상의 포함되었다. 전국적으로 위협이 되었지만 그나마 안전한 쪽은 행정직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뿐이였다. 하지만 그들또한 근무에 관한 자잘한 실수로 굴라크(강제 수용소)로 갈 위험이 존재하였다. 이 행위는 하나의 정부가 아니라 여러 개의 대안적 정부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때 당시는 국제적 위협이 증대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소련 사회에서 벌어진 혹독한 공격의 근본 공포정치는 시작한 사람들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시민은 자기 자신을 비난받지 않기 위해 다른 이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잠재적인 저항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그리고 굴라크에는 지속적인 노예가 필요하였다. 러시아 내의 협동 조합주의는 성장하기 전에 이와같은 잔혹한 방식으로 싹이 잘려버렸다. '''민족주의''' 일단 소련은 제정시대와는 다르게 느슨한 형태의 연방국가로 대체하였다.핀란드는 그것을 탈퇴하였고. 발트3국은 이전전쟁의 영향으로 불리되었다,나머지는 각국의지와 상관없이 편입되었다. 소련은 억압적인 정책으로 그들의 민족주의를 억제하고 공산주의의 유무로 각국은 유대를 유지하였다. 1936년에 스탈린 헌법이 나왔을때는(부하린이 초안을 작성하였지만 이 시점에서는 실각하였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권리가 적혀있었지만 단순한 글이였을 뿐이였다. 이헌번은 자국이 빨갱이 파워로 각 민족들이 자발적으로 이룬 연합체라고 주장하는데 쓸모있었다. '''1941~1945 전쟁기''' 이 절박한 시기는 공산당이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존재하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민족 문제를 바라보는 양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민족적인 것들을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였다. 인민전선의 태도를 어느 정도 따르는 것이였따. 민족 정서는 급성장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는 단결 시키는 힘으로 동원되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이 현실화되자 소련 국민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애국심(개별적 민족주의가 아님)이 1930년대보다 훨씬 더 중요시 되었다. 독일에 부역하는 흔적만 보인다면 조국의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소련 찬가 만들었을때도 가사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강화되고 소련의 국제주의(레닌의 국제주의 시각)를 향한 몸짓에 결합시키고 있었다. '''코민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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