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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주공방전 === {{인용문|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 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 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 「전략(典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손권은 원군(援軍)을 보내 그를 돕도록 했지만, 고의로 신속한 진군(進軍)을 늦추며 주부(主簿)만 먼저 보내 그의 명(命)을 알리게 했다. 관우는 원군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또한 자기 스스로 우금(于禁) 등을 사로잡은 자신감에 "오소리 자식같은 것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번성을 쳐서 빼앗게 되었는데, 내가 너 따위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욕했다. 손권이 이 말을 전해듣자 관우가 자신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알고, 편지를 써서 관우에게 사과하고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형주(荊州:관우)와 오(吳:손권)은 비록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의심하여 서로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관우를 기습한 것이다.』 「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관우와 서황은 서로 아끼는 사이였으므로 먼거리에서도 서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단지 평범한 이야기만을 주고 받을 뿐 군사(軍事)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대기하던 서황이 말에서 내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오는 자는 상금으로 천근을 주겠다."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대형(大兄)! 이것이 무슨말씀이오?"하고 묻자, 서황은 "이는 국가의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사로잡았다. 손권은 관우를 살려주어 조공을 유비의 적이 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좌우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리의 새끼는 기를 수가 없습니다. 뒤에 반드시 해를 입히게 됩니다. 조공(曹公)도 관우를 즉시 제거하지 않을 것이므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어서, 도읍을 옮기는 일을 의논하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 지금 그를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곧 참수해버렸다. 신(臣) 배송지(裵松之)가「오서(吳書)」의 기록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달아나는 길을 가로막아 끊어 버렸다. 관우는 곧 죽게 되었다. 임저(臨沮)는 강릉에서 2∼3백리 떨어져 있는데, 불시에 관우를 죽였으니 어찌 생사(生死)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력(吳歷)」에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조공(曹公)에게 보내자, 조공은 그의 주검을 제후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촉서 관우전 ==== 관우 상대로 서황이 펼친 전략 ==== {{인용문|태조가 마침내 직접 양평에 이르러, 한중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토벌하며 완(宛)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한수가 급작스레 범람하게 되어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는 번성에서 조인에 대한 포위를 풀고, 또 양양(襄陽)에서 장군 여상(呂常)을 포위했다. 서황이 거느리던 병사에는 신병들이 많아, 관우와 예봉을 다투기 어려워, 마침내 양릉피(陽陵陂)의 둔영으로 전진했다. 태조가 다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면서 영을 내리길 "모름지기 병마(兵馬)가 집결하게 되면, 함께 전진하라"고 했다. 적(賊)들이 언성(偃城)에 주둔했다. 서황이 도착하자, 거짓으로 길에 참호를 파서, 적의 배후를 끊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적들이 둔영을 불지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을 얻고서는, 양쪽에서 진영을 이어 차츰 전진하니, 적의 포위망에서 3장(丈) 떨어진 곳까지 왔다. 태조가 (이 때의) 전후로 해서 은서(殷署), 주개(朱蓋) 등 무릇 12개의 영을 파견해 서황에게 가게 했다. 적은 위두(圍頭)에 주둔하였고 또 따로 사총가에 주둔하였다. 서황은 일부러 큰소리로 위두의 진영을 공격하라고 하고는 몰래 사총을 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격파되는 것을 보고 친히 5천 명의 보병과 기병을 인솔하여 서황과 교전하였는데 서황은 관우를 격퇴시키고, 그대로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끝내 적을 무찔렀으며, 어떤 적들은 달아날 길이 없자 면수(沔水)로 뛰어들어 죽었다. 태조가 영을 내리길 "적의 참호와 녹각의 포위망은 열 겹이나 되었는데, 장군은 전투를 매번 이기게 하여 마침내 적의 포위를 함락시키고, 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다. 내가 용병(用兵)을 한지가 30여년인데, 옛날에 용병을 잘했다고 들었던 자도 오래 동안 핍박당하면서 샛길로 적의 포위망에 진입했던 자는 없었다. 또한 번성과 양양이 포위당했던 것은 거(莒)와 즉묵(卽墨)(이 포위되었던 때의 일)보다 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孫武)나 양저를 넘는다"고 했다. 서황이 군대를 떨치며 마피(摩陂)로 돌아오니, 태조가 7리나 나가 서황을 맞이하고 주연을 크게 베풀었다. 태조가 술잔을 들어 서황에게 권하며, 또 그를 위로하며 말하길 "번성과 양양을 보전하게 된 것은 장군의 공이요"라 했다.}} 위서 서황전에서 인용 ==== 관우에 대한 여몽의 평가와 대 관우상대로 오가 취한 통수 전략 ==== {{인용문|노숙이 죽자, 여몽은 서쪽으로 육구에 주둔하며 노숙 군대의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했다. 또 한창태수(漢昌太守)에 배수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을 식읍으로 했다.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오를)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 그 나라가 상류에 있어 형세상 오래가기 어려움을 알았다. 처음에 노숙 등은 조공이 아직 살아있음으로 해서 화난(禍難)이 이제 시작되었는지라 마땅히 서로 도와야지 같이 원수가 되어 잃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여몽이 은밀히 계책을 진언하길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 장흠(蔣欽)은 유격병 1만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여 그렇게 된다면, 조조에 대해 걱정할 게 무어며 관우에게 힘입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는 신하인데 사기와 힘을 존숭하여 거꾸로 뒤엎는 것(反覆)이 있으니, 마음깊이(腹心)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관우가 바로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께서 성명(聖明)하고 저희 등이 있기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하고 성할 때 도모하지 않는다면, 하루 아침에 엎어질 것이니, 다시 힘을 펴고자 해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손권이 마음 깊이 그 계책을 받아들였는데, 또 다시 그와 서주를 취할 뜻을 의논하였더니, 여몽이 대답하길 지금 조조는 멀리 북방에 있어, 새로이 여러 원씨(袁氏)를 격파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위무하고 안집(安集)하느라 동쪽(동오)으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서주 땅의 수비병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세가 육지와 통하고, 날랜 기병이 달리는 곳이라, 지존께서 지금 서주를 얻는다 할지라도 조조가 후일 반드시 와서 쟁패를 벌일 것이고, 비록 7~8만명으로 수비한다 해도, 오히려 응당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라 했다. 손권은 이 말이 더욱 옳다고 여겼다.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 여몽의 군사를 보고 침공에 대비하는 관우 ==== {{인용문|후에 관우가 번(樊)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여몽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며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필히 제가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병이 있으니, 병사를 나눠 건업(建業)으로 돌아가 병 치료를 명목으로 하고자 합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시켜, 다 양양(襄陽)으로 보낼 것입니다. 대군이 장강에 떠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그 빈틈을 습격하면 남군을 항복시킬 수 있고,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 했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 육손이 관우를 통수치려고 쓴 아첨 ==== {{인용문|육손은 육구(陸口)에 이르러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나는 당신이 적군의 동태를 관찰하고 나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군대를 지휘해 가볍게 일어나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의 공적은 위대하오!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소. 최근 재능없는 이 사람이 임명을 받아 서쪽으로 오게 되었소. 나는 당신의 풍채를 앙모하여, 좋은 대우와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소. 또 이렇게 말했다.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淮陰侯 ; 漢信)가 조(造)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오. 서황(徐晃) 등이 적은 수의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당신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소. 조조는 교활한 적이오.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이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겼소.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하오. 나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소. 나는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나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 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이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오.}} 오서 육손전 인용 ==== 관우의 쌀도둑질과 여몽의 형주 침공 ==== {{인용문|손권은 여몽을 소환해 들이라는 격문을 노출시키고, 은밀히 같이 계획을 도모하였다. 관우가 과연 믿고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위(魏)에서 우금(于禁)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여몽이 성에 들어가 점령하고, 관우 및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위무(慰撫)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는 바가 없게끔 약속하였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 형주공방전에서 관우의 평가 ==== 긍정적인 평가 : 명실공히 위 군부 1인자인 조인이 이끄는 군이, 그것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와 전투 준비도 끝나있던 상태에서 형북의 주둔군과 함께 아무것도 못해보고 성에 갇히게 된다. 관우가 맡던 지역은 강릉 빼면 거의 의미가 없던 곳들이었고 조인이 주둔했던 형북은 촉, 오가 지녔던 형남 전체보다 부유했던 지역이었음에도. 그 후 장료와 같은 전에 실린 우금군까지 아무것도 못해보고 항복했고, 관우의 기세는 한중전 이후 재정비하던, 마찬가지로 장료와 같은 전에 실린 서황이 이끄는 군까지 오고서야 꺾였음. :ㄴ 꺾인거라 보기도 뭐하다. 애초에 서황이 관우를 칠때 상황은 면수(번성 주위 호수) 장악에 양양은 완전히 포위당해 연락이 끊긴상태다. 관우가 서황과 붙을때 보기5천 뿐이였던것도 이게 이유였고 :그렇다고 양양, 면수장악이 풀린것도 아니다. 그리고 서황의 병사가 신병이라 그렇다는데 기록보면 분명 병사들을 더 충원했고 이후 최후 공격당시엔 12영의 군졸들까지 더 보탠 군세라고 되어 있음. 조조는 천도드립을 치고 우금, 서황을 차례로 보낸 것으로 모자라 대오전선의 장료를 이동시키고 하후돈과 함께 직접 남하할 정도로 쫄려있던 상태. '번성에 짱박힌 조인 하나 못잡았다' 정도로는 촉 공격으로 인해 약체화되어 악진, 문빙, 여몽에 차례로 휘둘리던 소수 약졸들을 키워 조인, 우금, 서황, 방덕, 만총 등이 모두 덤벼야(그것도 방어전으로) 막아낼 수 있도록 몰아쳤으며 조조가 모든 것을 걸어 막도록 만든 관우의 위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솔직히 관우가 명분을 주고 잘못한 면도 있긴한데 그렇다고 손권이 잘한것도 아니지 않나? 기록보면 노숙이 죽은 이후로 여몽이랑 짝짜궁하고 대놓고 형주를 노렸다, 즉 노숙이 죽은 217년 이후론 먼저 뒷통수 칠 생각을 했던건 오나라 측이라는거다, 이건 관우가 쌀도둑질 한 때랑 결혼 동맹 거절하기도 이전이다. 관우가 대놓고 동쪽을 경계했을 정도면 저쪽도 그리 신의있게 나간건 아니라는거지, 어차피 익양대치 이후로 형주 영유권에 대해선 거의 결판이 난 상황인데 통수칠 준비 다 해놓고 관우가 방심하고 명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게 손권 패거리인데 솔직히 손권이 잘한거냐? 애시당초 손권이 익양대치 이후로 서로 지난일은 잊고 신의있게 나갔다고 한다면 관우가 과연 번성을 끝나 함락시키지 못하란 법도 없었을거임. ㄴ 그럼 그걸 잘 알고있는 관우가 왜 무리를 해서 오나라 한테 기회를 주냐? 오나라가 그런 포커스를 보이면 괜히 무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당시 촉나라는 한중 먹고서 한참 내정 다지기 하던 시점이라 제대로 지원도 못해주는 실정인데 뭘 믿고서 번성까지 공격을 한거냐? 부정적인 평가 : 관우는 익양대치 이후로 약화된 촉한 지역의 형주를 가지고 무리하게 번성과 양양을 공략했는데 결국 이것이 화를 부른것이다, 긍정적인 평가측에서도 지적했듯히 관우가 가진 형주는 기껏해야 남군정도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곳인데 여기서 수세적으로 잘 지켜도 모자란 판국에 무리하게 강릉의 수비병력까지 빼면서 포위망을 강화하려 하는데 작정하고 몰려드는 위의 군세를 당해낼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거기에 관우가 손권의 침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렇다면 수비를 강화해야 함에도 여몽의 병세 악화라고 무리하게 병력을 뺀건 무슨 자신감인가? 여몽 빼고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다 호구로 보였나? 예전에 감녕이 지킨다는 얘기를 듣고 감히 진격하지 못한건 관우가 아니라 다른 장수였나? 거기다가 손권의 결혼동맹 파토와 우금의 병력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군량고를 턴 건 손권에게 명분만 주는 일이었다. 반준은 두문불출했단 소리가 나오지만 손권 방문하자마자 우디르하는 괴상한새끼다. 더군다나 세놈 공통특징이 보급담당이다. 애초에 우번도 쓰리질로 남군먹고나서 빨리 장악 안하면 통수쳐맞을거란 말 나온거봐서 미방, 반준 두놈이 문제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거기에 동료들과 화목하지 못하여 미방과 사인이 제대로 지원을 하지않고 바로 항복할 생각을 품게 만들었으니 내외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무리하게 용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미방이 지원을 제대로 안한건 사실이고 나중가면 우번한테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가를 배반했다고 존나 까임. 거기다가 아무리 관우랑 사이가 틀어졌다고해도 관우는 분명히 미방이 남군 홀라당 태워먹고 그 지랄해놓고 군수물자도 제대로 대지않은 공적인 잘못을 가지고 죄를 묻겠다고 한 것인데 그거 처벌 받기 싫어서 지 형과 주군을 배반한게 옳은 행동은 아니다. ㄴ 미방과 부사인이 기구한게 나중에 또 정치적으로 좆됬음을 감지한 오나라가 촉으로 돌려보내서 결국 처형당한다. 포승줄로 묶어갔는데 뭔 정치적 문제냐? 그리고 익양대치때 관우군은 3만이라고 나오는데 몇년 안 지났을테니 군세가 갑자기 늘었다 보기 어려울것이고 번성공략 때도 비슷한 숫자였을것이다. 관우가 이 정도의 군세 가지고 위에서 조조가 싹삭 긁어서 몰려드는 군세들과 혹시 모를 오의 기습을 막고 조인이 굳게 지키는 번성을 공략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면 관우는 스스로의 군사적 역량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졌던지 우금 잡은 후에 극도로 오만해졌다는 결론이 나올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한참 익주와 한중을 정비하고 있을 주군 유비가 지원할만한 상황도 아니지 않았나? 그러니까 화하를 진동시키고 우금의 7군을 잡은 상태에서 병력을 철수시켰으면 위는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함부로 관우를 치지 못했을것이고 손권 역시 마찬가지 였을것이며 관우에게도 명예로운 전장으로 남았을것이다. 촉서 관우전에 관우가 꿈을 꾸고 스스로도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예언했는데 무의식적으로 관우 스스로도 무리라고 생각한것은 아닌가? 애당초 관우에게 주어진 임무는 형주를 잘 지키는 것이지 무리하게 혼자서 독단적으로 양번을 먹으라는 지시는 아니지 않았나? 오죽하면 손권이 형주먹었단 사실 알고나서 샌드위치로 잡을생각 안하고 관우한테 소식알려서 병력이나 빼게만들라고 서황에게 했겠냐 근데 내가보기에도 양번 먹어도 지킬수 있는지는 의문 공연히 먹고 지킬수나 있는지도 의문인 번성, 양양을 무리하게 공략할 필요가 있었는가 말이다. 결국 지나치게 동원할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린 결과가 쌀도둑놈이라는 오명과 형주 상실과 관우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일이 된 것임. 천도 고려한 이유도 양번뚫리면 허창까지 금방이라서 그런게 크고. 또한 관우가 트롤짓을 제대로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없는 촉의 인재풀을 더 얇게 만들어버렸고 유비도 이에 눈이 뒤집혀서 손권이 관우가 다스렸던 형주 영토 돌려주겠다고 하고 제갈량도 오랑 싸우기보다 손권의 제안 수용하고 오나라랑 동맹 맺어서 위나라에 대응해야 한다고 유비에게 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1차로 날린 촉의 인재풀을 더 날려버리는데 한몫함. 이로 인해 제갈량은 나중에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감행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찾는데 애를 먹었고 한정된 루트로 위에 대한 북벌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음. 결국 위나라는 12년이나 걸렸지만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냈으며 제갈량 사후 촉은 마땅한 인재가 없어 결국 위나라에 263년 잡아먹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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