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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수 암살 ==== 송진우는 신탁통치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받아들이자는 취지로 말했다가 찬탁으로 몰려 갑자기 암살 당한 뒤 [[한민당]]을 떠맡게 됐다. 그는 미소공위 적극 참가와 [[김구]] 중심의 보수 정당 단일화를 반대, 소극적인 김성수에 대해 합당은 한민당을 통째로 임정에 갖다 바치는 거라고 반대한다. 이 일로 [[김구]]와 만난 뒤 고성이 여러 번 오고 갔다. 1947년 12월 8일 집에 있던 중 박광옥, 초등교사 배희범 등 한국독립당원 5명이 쏜 총에 맞고 죽었다. [[장덕수]]가 암살됐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가서 자신이 암살한 게 아니니까 미군정에 소환되는 일을 막아달라고 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했다. [[송진우]] 암살 직후, 반탁건으로 미군정사령부에 끌려가서 경고를 먹었는데 송진우 건으로 또 경고를 받고<ref>(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개, 2007.11) 67페이지</ref> 그 다음에는 [[여운형]] 암살의 유력용의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여운형은 당내 라이벌인 [[박헌영]]도 유력용의자로 의심되기도 한다. 그런데 [[장덕수]] 암살사건이 터지고 현장에서 잡힌 한독당 당원 외에 한독당 간부인 조상항, 김석황 등이 줄줄이 끌려가면서 빼도박도 못하고 김구도 미군정 재판정에 출석. 다만 최대한 예우해서 증인 이라는 명분으로 심문을 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장덕수 암살의 이유 중에는 장덕수가 일제말 기고문을 날린 것, 그 전에는 [[공산당]] 좌파쪽 이론가였다는 게 그 이유다. 조소앙도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2페이지</ref> 김구가 상하이에 있을 때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등에게 줄 폭탄을 구해준 인물이 [[김홍일]]과 함께 조소앙이긴 했다. [[허정]]은 김구에게는 차마 못가고 조소앙한테 가서 장덕수 암살 사건을 따지고 책임 추궁을 했다.<ref>허정 회고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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