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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백색테러 의혹 및 극우적 행보 ===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세 명 전부 김구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북괴의 [[먹사]] + 관료인 강량욱<ref>[[혹부리우스]] 애미인 강반석의 먼 친척이다.</ref>의 집에 폭탄을 던져 주변 사람들까지 깡그리 죽였다. 강량욱은 몰라도 옆의 민간인들을 죽인 건 테러다. 위정척사파 유생 출신이어서 조선시대 양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좌파의 평등 사상에 매우 부정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외국이 하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무시했다. 남로당원의 박갑동은 비서가 김구의 옷을 다 입혀주는 것을 보고 마치 조선의 왕과도 같다고 말했다. 신탁통치 논란 초기엔 반탁파였지만 이후 호형호제 하던 사이인 이승만과의 관계 고려와 협력을 위해 이승만의 신탁 노선에 동의하는 대신, 자기를 중심으로 우익 세력의 결집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협력했다가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이 터져서 이승만과 관계가 나빠지자 다시 반탁파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천조국에서도 김구를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미 군정은 김구를 무자비하고 파렴지한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 ㄴ이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게, 일단 천조국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한 인원 중 하나인 김구를 비난해야 자기 나라를 더 잘 믿기 때문에 한 말일 수도 있다. 애초에 천조국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남한에 군정청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ㄴㄴ 괜히 이승만, 김구가 극단적이라고 김규식, 여운형 회유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든게 아니다. 김구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친일파나 정치깡패들을 자기세력으로 많이 흡수했는데 얘네들이 충성심 보여준다고 좀더 막나간점도 미군정입장에선 거슬렸던것도 있고 근데 이건 의혹은 제기되고 있는데 명확한 근거가 없다. 당장 송진우는 임정 봉대를 가장 크게 옹호했고, 임정에 900만 원 상당의 정치자금까지 대준 사람이다. 김구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죽일 수 있냐?"라고 물은 바 있어서 송진우 김구 암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같은 편인데 영향력도 약한 송진우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ㄴ 김구는 이봉창, 윤봉길의거의 자금을 안창호한테 받았고 안창호는 옥관빈에게 자금을 받았다. 하지만 옥관빈은 김구한테 죽었다. 한번한거 두번못할게 뭐냐?, 더군다나 적어도 저중에서 여운형운 백범일지에서도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 암살도 사실 미군정에선 박헌영 계열의 극좌 세력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을 더 높게 봤다. 애초에 백의사 자체도 김구보다 신익희 편에 더 가까웠다. 임정 시절 신익희가 만든 정치 공작대와 백의사가 늘 함께 했다는 말도 있으니까. 김구와 이승만은 1947년 초 이후로 사실상 헤어졌기 때문에 백의사를 김구가 이끌고 백색테러를 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백의사 배후에 경찰도 있었고. ==== 송진우 암살 ==== 1945년 12월 27일 카이로에서 한반도 분할 신탁통치 의견이 나왔다. 다들 반탁을 하다가 소련에서 찬탁으로 돌아서자 [[박헌영]] 등은 찬탁을 주장했다. 근데 그전에 동아일보가 박헌영이 찬탁이라고 오보를 했다. 신탁통치에 김구는 결사 반대했고 [[송진우]]는 미국과 소련이 힘으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일단 수용하고 3~5년 정도 기다리자고 말했다. 신탁통치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안재홍]]이나 [[김규식]]도 역적으로 지목됐다. 45년 12월 29일의 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는 신탁통치가 우리 뜻으로 거부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했다가 30일 오전 6시반 원서동 집에 들이닥친 한현우에게 총에 맞아 죽는다. 한현우는 끝내 자신을 사주한 사람 입을 열지 않고 투옥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문적 몇 개를 조사한 뒤 한현우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ref>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페이지</ref> [[장택상]]도 [[송진우]] 암살범으로 김구를 지목했고<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02998/1]</ref> [[조병옥]]도 김구가 송진우 암살범이라고 지목한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나는 중도주의자인 송진우를 김구가 암살한 사실과 이유를 안다면서 반탁 문제를 언급했다.<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7페이지</ref> 결국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데모 때문에 46년 1월 1일 소환되어 중단하라는 경고를 받았고, 같은 날 또 불려가서 송진우 암살 문제로 경고를 받았다. 여담으로 한현우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사면해줬기 때문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2220020922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3-02-22&officeId=00020&pageNo=22&printNo=22093&publishType=00020</ref> ==== 장덕수 암살 ==== 송진우는 신탁통치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받아들이자는 취지로 말했다가 찬탁으로 몰려 갑자기 암살 당한 뒤 [[한민당]]을 떠맡게 됐다. 그는 미소공위 적극 참가와 [[김구]] 중심의 보수 정당 단일화를 반대, 소극적인 김성수에 대해 합당은 한민당을 통째로 임정에 갖다 바치는 거라고 반대한다. 이 일로 [[김구]]와 만난 뒤 고성이 여러 번 오고 갔다. 1947년 12월 8일 집에 있던 중 박광옥, 초등교사 배희범 등 한국독립당원 5명이 쏜 총에 맞고 죽었다. [[장덕수]]가 암살됐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가서 자신이 암살한 게 아니니까 미군정에 소환되는 일을 막아달라고 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했다. [[송진우]] 암살 직후, 반탁건으로 미군정사령부에 끌려가서 경고를 먹었는데 송진우 건으로 또 경고를 받고<ref>(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개, 2007.11) 67페이지</ref> 그 다음에는 [[여운형]] 암살의 유력용의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여운형은 당내 라이벌인 [[박헌영]]도 유력용의자로 의심되기도 한다. 그런데 [[장덕수]] 암살사건이 터지고 현장에서 잡힌 한독당 당원 외에 한독당 간부인 조상항, 김석황 등이 줄줄이 끌려가면서 빼도박도 못하고 김구도 미군정 재판정에 출석. 다만 최대한 예우해서 증인 이라는 명분으로 심문을 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장덕수 암살의 이유 중에는 장덕수가 일제말 기고문을 날린 것, 그 전에는 [[공산당]] 좌파쪽 이론가였다는 게 그 이유다. 조소앙도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2페이지</ref> 김구가 상하이에 있을 때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등에게 줄 폭탄을 구해준 인물이 [[김홍일]]과 함께 조소앙이긴 했다. [[허정]]은 김구에게는 차마 못가고 조소앙한테 가서 장덕수 암살 사건을 따지고 책임 추궁을 했다.<ref>허정 회고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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