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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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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씨발 왜 시위했냐?''' 헌정 사상 가장 재미있는 선거였다. 노태우는 지난 정권과 지지난 정권의 물을 빼야 비로소 당선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에 최대한 재미있게 선거 운동을 했고 이에 따라 김영삼 김대중도 노태우에게 지지 않으려고 각자 최대한 재미있게 선거운동을 했다. 그리고 이 선거에는 최초로 여성 후보로 홍숙자 여사가 나왔는데, 바로 [[전인범]] 장군의 어머니다. 이때 전인범은 소령 진급 심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이뤄놓고 정권은 12.12 쿠데타 중심 인물이었던 노태우에게 넘겨준 희대의 병신 선거이다. 당권은 김대중, 대권은 김영삼으로 합의 보고 무난하게 노태우를 누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김대중이 뒤통수를 때려서 망했다. 당시 시기를 보면 도리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땡삼이에게 양보하는 게 맞았다. 땡삼이는 머중이가 전두환에 의해 사실상 정치적 사형 선고를 당하고 외국으로 런하니 목숨 걸고 머중이 복권을 외쳤던 놈이었고, 머중이 본인이 자신에게 빨갱이 프레임으로 군부에서 비토설이 나오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윤보선 최규하에 이은 땅크 시즌3 찍기 싫다면 그냥 양보하는 게 맞았다. 어떤 또라이가 자꾸 김대중 혼자의 책임이 아니라고 우기는데 밑의 4자필승론은 누가 들고 온 건지 아냐? 게다가 연임도 아니고 단임제 대통령에서 김영삼 대통령하고 나면 누가 대통령 되겠어? 설마 상도동계 영삼이 따까리가 김대중에게 네임 밸류로 상대한다고? 그냥 김대중이 지가 먼저 해먹을 욕심으로 뒤통수 친 게 정황도 맞고 당시 뉴스 기사는 물론, 하다못해 진중권도 이건 김대중의 잘못이라고 깠구만 뭔. 게다가 진보로 유명한 윾시민도 이를 회자하며 머중이를 존나 극딜했다. 사실 이는 유시민만 아니라 386세대 대부분이 가지는 심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일로 김대중은 '민주화의 상징'에서 민주화를 걷어찬 인간, 또는 대통령병에 걸린 인간이라고 온갖 욕은 다 먹었다. 한보의 정태수도 노태우 때부터 뇌물질로 제철사업 벌인다고 나랏돈 빼먹다가 망해가니까 김현철에게 뇌물 바치면서 제발 나랏돈으로 구제해달라고 한 게 한보사태의 전말이다. ㄴ영삼이 지지자가 또; 4자필승론이 제기된 게 평화민주당 창당 이후 한화갑이 제시한 거고 영삼이가 통수 친 건 평화민주당 창당 이전 고려대학교 토론회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대중의 통수질에 얼얼함 드립 치고 있네. 지 새끼가 대통령 되고 싶어서 독재 세력과 손잡아 놓고는 뭐요? 통수? 60~80년대에 머중이가 바다에 다이브 할 때 영삼이도 똑같이 독재 세력에게 개처럼 밟히듯이 존나 밟혀놓고 지랄을 해요 아주. 몽둥이로 수십 대 후드려 맞은 건 착한 구타고 통수 서로 같이 친 건 나쁜 구타냐 ㄷㄷ 그리고 땡삼이 아래 새끼들로도 머중이 상대 충분히 되는데 ㅉㅉ 당장 이회창이 머중이와 붙을 때 불사조 그 씨발놈만 아니었다면 이길 수 있었던 거 기억 안 나냐? ㄴ 참고 사항이 하나 있는데, 김영삼의 거점인 부산경남은 김대중의 거점인 전라도를 다 합친 것보다 인구가 많다. 그리고 이회창은 불운의 정치인인 게, 머중이랑 뜰 때는 피닉이 때문에 망, 작은 노짱이랑 뜰 때는 정몽준이 2002 월드컵으로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다가 뜬금포 노짱으로 붙어서 망, MB랑 붙을 때는 공천 떨어지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나와서 망했다. 이회창은 대통령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더라면 회창 - MB - 홍카콜라 라인의 대통령 라인이 구축되었겠지. 참고로 정치적으로 사이 좋았던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헐뜯고 욕하게 된 원인이 이 대선 때문이다. 김땡삼이 이 대선에서 이겼다면 임기는 그나마 잘 보냈을 건데 그 이후 당선되어 시기와 맞물린 외환 위기로 지지율 최저 6%를 찍고 현재까지도 후손들한테 욕을 처먹는 걸 생각하면 양김 싸움에서는 김머중 1승이다. 결과가 나오고 당시 분위기는 진짜 씹창이었다. 현재 10~20대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비유하면 ㄹ혜 끌어내리고 19대 대선 치르는데 안 읍읍과 문 읍읍이 서로를 물어뜯다가 홍 읍읍이 당선된 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이것도 비유하려고 쉽게 말한 거고 실제 여파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같이 운동하다가 끌려가서 사면 되어서 나왔더니 함께 민주화 운동하던 애들은 저 새끼 빨갱이네 홍어네, 저 새끼 독재정권의 앞잡이네 서로 손질하며 싸우는 걸 보고 인생무상을 느꼈다는 모 국회의원도 있었고, 아무튼 그냥 씹창이었다. 이후 행보가 가관인데 김영삼이는 이후 노태우와 손을 잡고 다시 대선에 나와서 노태우 파벌을 등에 업고 당선되더니 아예 박정희 라인에 가담해버렸다. 김대중이는 자기 라인 끝까지 고수하고 다시 대선에 나와서 낙선했다. 그러나 그 다음 선거에서는 IMF 사태로 인해 당선했다. 김종필이는 이후 김영삼처럼 노태우와 손을 잡았지만 대선은 김영삼에게 양보하고 그 다음 대선에 나왔다가 시원하게 발렸다. 그리고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나왔다가 낙선을 당하는, '국민 듣보잡'이라는 전설을 써내렸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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