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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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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은퇴 이후=== 여튼 은퇴한 량치차오는 유럽으로 떠났다. 1차 대전의 참상을 본 량치차오는 서구식 계몽주의의 결과가 전쟁인 것에 대해 아이러니를 느꼈고, 이때부터 무분별한 서구화에 반대하고 중국의 전통, 문화, 가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또한 소련이 신경제 정책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딴식으로 할거면 차라리 영미식 자본주의하라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ref>량치차오가 좋아한건 미국식 자본주의였고 그외에는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노사협력, 국산장려 정도까지만 옹호했다. 국공합작 훨씬 전부터 쑨원한테 공산주의 색깔 빼라고 함</ref> 마지막으로, 돤치루이 정권이 강화조약 병신같이 맺는걸 직관한다.(돤치루이가 파리 강화회의 참관자격을 던져줬다. 참전에 공이 있다고 던져준건데 결과적으로 악수였음) 귀국한 량치차오는 주특기를 살려 돤치루이의 강화조약을 신문에 폭로했다.(1919년) 그리고 이게 5.4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신보를 통해서 5.4운동을 주도했다. 량치차오는 5.4운동에 굉장히 우호적이었는데 5.4운동이 주창한 신생활, 계몽주의, 백화문운동이 죄다 량치차오의 입맛에 딱맞는거여서 그랬다. 사실 량치차오 사상이 5.4운동에 많이 영향준 것도 있었고...<ref>5.4 주도한 후스, 천두슈 모두 량치차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ref> 5.4운동 이후에는 역시 대중 계몽을 주장한 내가 옳았다며 교육에 올인 + 가끔씩 국민당 디스하다가 1929년에 죽었다. 정치는 날로 개판이 되어갔지만 이쯤되면 포기한듯하다. 연성자치론자에다가 국민당이랑 원수였던지라 사후에는 찬밥 취급당했다. 그래도 [[만주사변]]은 안보고 죽어서 다행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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