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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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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화국 수립까지=== 서로마 제국의 쇠퇴는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 지방 주민들에게 엄청난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동쪽과 북쪽에서 밀려오는 똥내나는 야만족들을 로마의 황제니뮤가 어떻게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이 이탈리아 본토를 떠나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이는 이탈리아 북동부 연안의 석호지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베네치아의 기원이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로마의 행정구역명인 베네티아에서 유래했다. 지금이야 그 석호가 세계 최고수준의 관광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만, 당시 석호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지반이 불안정하여 생활환경이 구렸고 눈앞의 바다는 수시로 자연의 갑질을 해댔으며, 모기가 판을 쳐댔다. 그랬기 때문에 본토의 상황이 한결 괜찮아질때마다 석호로 이주해 온 일부 주민들중 일부가 다시 되돌아가곤했다. 그러나 인간이 100여년 이상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면서 이 석호는 점점 도시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 이미 이 석호의 집단거류지는 서로마 제국 멸망이후 이탈리아 지방에 정착한 야만족인 동고트족이나 롬바르드족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베네치아 주변지역은 천혜의 어장으로 어족자원이 풍부했으며, 완만한 조류 덕택에 염전산업에도 호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앞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는 농장이 없는 베네치아인들의 식량이 되었고, 당시 귀중한 자원이었던 소금은 베네치아의 첫번째 수출품이 된다. 소금을 수출하면서 베네치아는 조금씩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에 무단침입한 야만족들을 때려잡고 그 세력을 확립하자 로마인의 후예인 베네치아 또한 자연스레 비잔틴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이탈리아 본토의 라벤나에 위치해 있는 비잔틴 총독부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 고유의 자치권은 인정받았고 베네치아 또한 비잔틴의 응딩이 아래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동쪽주인니뮤들이 성상파괴운동이라는 뻘짓을 벌이게되자 이탈리아 반도에서 반비잔틴 감정이 들끓게된다. 이는 베네치아도 예외가 아니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당연히 비잔틴의 지배를 부정하는 테크트리로 이어지게 된다. 석호의 여러 지도자들은 에라클레아에 모여서 연합총회를 열었고 여기서 파올루치오를 초대 총독으로 선출하여 비잔틴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카더라...지만 파올루치오가 아니라 다른 놈이 최초의 총독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성장기===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이탈리아 냄비들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냄비들이 식으면서 비잔틴에 대한 감정도 사그러든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비잔틴 세력은 이미 그 기반을 거의 잃어있던 상황이었다. 서쪽의 프랑크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전례없이 강해지자 당시 비잔틴 세력권과 프랑크 세력권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던 베네치아 또한 이에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 내부에서 정치파벌이 친프랑크파와 친비잔틴파로 나뉘어졌고 서로 정치질을 시전하게 되었다. 프랑크 제국이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청소해내버리자, 친프랑크파의 세력이 베네치아 정치판에서 그 세력이 막강해진다. 급기야 로마 교황이 자기를 거칠게 다루던 롬바르드족을 프랑크족이 응징해주고 상냥하게 다뤄주자 기모찌해진 나머지 프랑크 왕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하자 프랑크 왕과 잡것들이 로마제국 황제 설정놀이하는걸 못마땅해 하셨던 오리지널 로마황제가 딴지를 걸게되며 마찰이 빚어졌고, 결국 프랑크와 비잔틴 세력간 대결이 발생되게 된다.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의 응딩이에 붙어먹으려는 조짐이 일어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보내 베네치아를 점령해버리고 친프랑크파인 베네치아의 자칭 총독을 추방행시켰다. 대신 친비잔틴파 인사를 베네치아의 새로운 총독으로 앉혔고 공화국은 다시 비잔틴 세력의 속주로 편입되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프랑크 세력의 침공대상이 된다. 서기 810년, 피핀의 군대는 용맹히 베네치아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비잔틴과 베네치아 연합함대가 프랑크 해군(이라고 쓰고 수송부대라고 읽는다)을 박살내었고 프랑크 육군은 베네치아의 수상에서 소형선을 타고 석호의 거류지로 진군하다 베네치아의 습지대에 좌초되었고 결국 습지대에서 허우적거리던 와중에 베네치아 수비군의 집중포화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건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듣보잡 취급하기 힘들 정도의 공을 세우고 이후 아드리아 해와 동지중해에서 비잔틴의 골치를 썩이게 했던 해적들을 처리하는데 또 공을 세우고 비잔틴이 전쟁을 치를때마다 해군력을 파견하여 어시를 올리자 베네치아를 쩌리 똘마니취급했던 비잔틴도 점점 베네치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 2세 황제로부터 금인칙서를 받고 조약을 통해 비잔틴 내에서의 무한상업권을 보장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면세특권을 획득하게 되어 상업적 우위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경쟁국들의 함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항하려면 30솔디 금화를 물어야 할 때 베네치아의 함선은 15솔디만 물어도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서 베네치아가 비잔틴에 속한다는 것을 명문화했지만 대신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비잔틴 측에서 베네치아 해군이 아드리아 해의 치안유지활동을 할 것을 조항에 넣었지만, 사실 무역국가 베네치아로서는 지중해를 통하는 유일한 관문인 아드리아 해의 해적소탕이 옵션이 아닌 필수이행사항이었기 때문에 전-혀 손해보는 일이 아니었다. 이 기념비적인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서유럽 최강의 상업세력으로 부상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베네치아의 비잔틴 세력권에서의 특권은 약 1세기 후 더 강화되는데,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단을 쳐묵한 노르만 족이 비잔틴 제국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이피로스 지방을 공략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즉각 120척의 갤리선 함대를 보내 혁혁한 공을 세워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또 하나의 황금칙서를 받게된다. 이로 인해 제국 전체에서 무관세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금지했던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미 베네치아인들은 9세기부터 이슬람과의 교역을 개시하였고, 이 덕분에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유물도 이집트에서 도굴해 올 수 있었다. 이미 초창기부터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제적인 활동을 해 온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슬람에게 '통'수를 시전하기도 하는데 이슬람 정벌을 메인 퀘스트로 하는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베네치아는 이미 1차 십자군 전쟁때부터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아무짝에 쓸모없는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의 '통'치권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면에서 나서지 않는 치밀함과 외교술수를 구사하여 이슬람과의 무역관계는 십자군 전쟁 도중에도 계속 유지하였다. 이렇게 동지중해 곳곳에 상업제국을 구축한 베네치아이지만, 주요 상업적 부의 원천인 비잔틴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122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2세가 공화국의 무역특권을 부정하자 베네치아는 이에 빡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비잔틴과 3년간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이와같은 대결상태는 소강국면에 진입하여 베네치아와 비잔틴의 무역관계는 지속되지만 양국간 관계불화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사건에 의해 양국간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업세력은 잡세력들이 정리되어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양강구도로 세력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에 필연적으로 두 나라는 라이벌-적대관계가 되었는데, 이 적대관계는 오늘날 헬조선-일본 관계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험악한 관계였다.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제노바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적극적으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대규모의 베네치아인 조계와 제노바인 조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계의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인 구역을 침범하고 이에 공격을 가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열받은 비잔틴 조정은 베네치아인들에 대한 구금령과 자산동결령을 내리게 된다. 사실 이와 같은 라틴 지구의 폭동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이와 같은 조치는 참다가 쌓인걸 분출한 것으로 봐야한다. 어쨌든 비잔틴이 이와 같은 강경조치를 내리자, 딥빡한 베네치아 공화국 평의회는 대규모 선단을 꾸려 비잔틴을 공격했고, 이로 인하여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상업으로 인해 축적한 부를 토대로 의기양양하게 비잔틴 제국령으로 진군하여 해상전과 상륙전을 병행한 베네치아이지만 해상전에서 비잔틴 제국해군에게 쳐발리고 상륙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첩보를 입수한 비잔틴 제국육군의 매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만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군을 보내 지속적인 해적질 레이드를 벌이고 이탈리아 본토에 남아있던 비잔틴 떨거지세력을 공략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지만 이마저도 막히고 역강간당한 끝에 결국 비잔틴에 항복해버리고 만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비잔틴에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후 베네치아와 비잔틴 간 무역관계는 재개되었지만, 이와 같은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었고 얼마 후에 일어난 라틴인 학살사건은 그 불편한 관계에 쐐기를 박게된다. 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폭동이 일어나 베네치아인 거주지의 거류민들이 대학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난다. 그런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권정부는 이를 대놓고 방관해버렸다. 이 때문에 학살의 피해가 눈덩이만큼 불어났음은 추기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이렇듯 비잔틴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한 베네치아지만 아직은 비잔틴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묵묵히 예전의 관계를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뒤로는 베네치아인의 특기인 잔머리를 굴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4차 십자군 전쟁=== 서방의 기독교도들은 1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동의 주요거점들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1180년대에 접어들자 십자군 측은 그들이 차지한 거점들을 차례로 뱉어내기 시작하였다. 1187년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함락되자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에 충격을 받아 요절하였다. 성지 이외에도 아크레, 시돈, 베이루트와 같은 주요 요충지들이 차례대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고,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이슬람에 대항하여 기독교 왕국들의 연대를 주문하였는데, 이는 확실한 효과가 있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리히 1세 바바로사,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 등 유럽의 쟁쟁한 국왕들이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개시하였는데 이가 3차 십자군 전쟁이다. 이는 비록 1차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살라딘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유럽으로 복귀한 3차 십자군의 일원인 사자심왕 리처드는 이집트가 이슬람 교도들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언급하였다. 그의 조언은 3차 십자군의 뒤를 이은 4차 십자군이 공략목표를 이집트로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201년에 4차 십자군이 출항지인 베네치아로 집결하였다. [[File:Enrico Dandolo.jpg|thumb|right|300px|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전 십자군 전쟁에서도 병사들을 수송하여 배삯을 받고, 아크레 등 십자군이 점령한 레반트 지역 거점도시의 조계를 할당받는 등 톡톡한 이득을 누려 왔으나 새로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는 4차 십자군 때 판을 크게 키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으로부터 4,500명의 기사들(&그들이 탈 말들)과 9,000명의 종자들, 그리고 20,000명의 보병들을 수송할 선단과 이들이 소비할 9개월어치 분의 군량을 요청받았고 공화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는 일개 도시국가가 감당하기에는 매우 거대한 규모였고, 따라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1년간 4차 십자군의 요청을 맞추기 위해 진력하였고,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막상 4차 십자군이 집결하자 문제가 생겼다. 제후들이 예상보다 많이 모이지 않아 베네치아 공화국 측이 요청한 품삯을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초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에 이와 같은 용역의 대가로 84,000마르크에 해당하는 은을 요구했었고,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들은 베네치아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그들의 무구를 제외한 전 재산을 내놓았다. 보니파치오는 그의 사적금고를 내놓았으며 다른 기사들이나 일개 병사들도 그들이 갖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4,000마르크 은이 부족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당황했고 그는 십자군을 한동안 베네치아에 체류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묘책을 떠올렸고, 그는 십자군이 채우지 못한 34,000 마르크에 달하는 품삯을 받지 않는 대신 출항하는 대가로 십자군에게 모종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십자군 측에서는 이를 탐탁치 않다고 여기기도 하였으나 배삯을 채우지 못해 출항하지 못하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체면도 서지 못했으므로 이를 수락하였다. 십자군과의 합의에 성공한 공화국의 선단은 그들을 승선시키고 아드리아 해를 유유히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 '''이후 항목부터는 [[리브레 위키]]의 [https://librewiki.net/index.php?title=%EB%B2%A0%EB%84%A4%EC%B9%98%EC%95%84_%EA%B3%B5%ED%99%94%EA%B5%AD/%EC%97%AD%EC%82%AC&oldid=261520 '베네치아 공화국/역사' 문서 (10월 23일자 본)]에서 포크해왔다.''' 십자군 이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동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수백척의 베네치아 함선이 도시 내에 베네치아인 거류구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양 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1202~[[1204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교역 계약을 갱신하면서 숨은 조항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는 다는 조항을 넣었다. # 그 뒤 제 4차 십자군을 위해 프랑스의 제후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고, 돈을 받고 그들을 '''당시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드랍해 주기로 한다.''' # 제 4차 십자군이 그 돈을 못내고 있자<ref>그 돈의 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 쪽수 계산 - 왕 급의 제후가 여러 명 참가한다지만 프랑스 왕이 동원 가능한 군데의 몇 배 가량은 되었다. - 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덜 오자,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인근의 섬에 틀여 박힌 채로 십자군이 공중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ref>채무 기간을 유예해 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가톨릭 교도였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하게 했다.''' 다름아닌 '''십자군'''이<ref>이때 교황 특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무것도 아닌 정보를 주고 로마로 보낸 뒤에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f> # 자다르를 점령한 뒤 동로마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가 찾아온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부탁을 하는데 그 왕자가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도(정교회라 종파가 다르기는 했지만)이자 당시 유럽권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 도시 점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동로마 제국이 대신 지불한다. #* 도시 점령시 동로마 제국의 성지 수호를 위해 천 명가량의 기사를 십자군 국가에 파견한다. #* <big>'''가톨릭과 정교회를 통합한다.'''</big><ref>이 때문에 자다르를 점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에 처한 교황도 이때에는 다른 가톨릭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는 길에 가톨릭교도의 도시는 없었으니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었던 셈</ref> #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은 대포 발명 전까지는 함락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함선들을 이용해 금각만 쪽으로 공격한 것. # 하지만 전임 황제가 돈을 흥청망청 써대서 빚 변제도 못하고, 군대도 못 보내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니...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본 십자군은 베네치아 거류구와 군사 주둔지가 큰 화재를 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 한다.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도 이때 가져온 것이다. # 그 뒤 성립된 것이 라틴 제국.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코르푸 섬,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필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였던 제노바나 피사 등의 나라를 동지중해 무역에서 격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라틴 제국이 존속할 때까지 '동로마제국의 3/8의 주권자'란 칭호도 덤. # 그렇게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 15세기 === 1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내륙부와 달마티아 연안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밀라노 공국을 쳐서 포 강 연안을 따라 유럽행 교역로를 완성하는 한편, 헝가리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알바니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을 장악하였다. [[1489년]], 십자군 왕국 중 하나였던 키프로스 왕국 전역을 흡수한다 ==== 15세기 말의 대 오스만 전쟁 ==== [[1463년]] 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모도네에서 오스만 소속의 함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오스만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르고스<ref>http://ko.wikipedia.org/wiki/아르고스</ref>를 함락 당하였으나, 헝가리, 알바니아,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라라 제후국의 에스테 후작을 고용하여 오스만을 공격한다. 하지만 [[1468년]] 알바니아 군의 지도자였던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에 의해 [[1469년]]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에우보이아가 함락된다.<ref>이때 베네치아의 수뇌부가 받았던 타격은 꽤나 되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적에게 오는 보급을 막음과 동시에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 때리면 상대가 먼저 GG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해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만 하자, 그대로 함락되어 버린 것. 그때 해군 제독은 종신 추방형 및 전 재산 몰수를 받았다.</ref> [[1472년]]에 사실상 용병화<ref>당시 헝가리는 이슬람 교도 침략을 막는 방파제라는 명목하에 베네치아와 교황청이 받는 돈으로 정예화되어 있었다.</ref>되어 있던 헝가리 군이 오스만 제국과 강화 협상을 체결하였으며, [[1473년]]에는 페르시아가 오스만에게 크게 깨지는 바람에 전선에서 탈출 하였다. 그 뒤 [[1474년]]에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의 알바니아 거점이던 스쿠타리(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위치한 슈코더르)<ref>http://ko.wikipedia.org/wiki/슈코더르</ref>를 공격하나 실패한다. 동시에 이스켄테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군 기병대가 이탈리아 내륙부를 공격하여 프리올리(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를 공격한다. 그 불길이 성 마르코 대성당의 종루에서 보일 정도였다고... 제1차 스쿠타리 공방전 이후, [[1475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 결과로 6개월 간의 휴전 을 얻었으나, 그 도중에 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의 타나(현재의 러시아 돈 강 삼각주에 위치했던 도시로 당시 베네치아령)<ref>http://en.wikipedia.org/wiki/Tanais</ref>, 카파(현재크림 반도에 위치한 페오도시야로 당시 제노바령)<ref>http://ko.wikipedia.org/wiki/페오도시야</ref>가 오스만군에 함락되어 러시아-흑해 교역 루트가 막힘과 동시에 강화 역시 물 건너 가게 되었다. [[1476년]] 헝가리가 재 참전하였다. [[1477년]]에는 이스켄데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 기병대가 베네치아 본토 속령을 다시 유린하기 시작했으며 오스만군이 스쿠타리를 두 번째로 공격하나 실패하고 만다. [[1477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의 첩보는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손을 잡아 오스만 제국과 강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해 서안을 장악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에 의해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이 막히게 되고, 또한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 각각 에게 해 방면과 달마티아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단독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협상은 1년 간 난항을 격었고, 중간에 오스만군이 다시 스쿠타리를 공격하였으나, {{날짜/출력|1479-1-25}} 강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 베네치아는 필로폰네소스 반도 내륙 지방, 에우보이아, 그리고 스쿠타리를 포함한 알바니아 지방을 오스만령으로 인정한다. #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코르푸, 모도네와 코로네(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위치한 도시, 각각 현재의 메소니와 코로니)<ref>http://en.wikipedia.org/wiki/Methoni,_Messenia <br/> http://en.wikipedia.org/wiki/Koroni</ref>의 기지, 그리고 크레타를 포함한 에게 해 상의 섬을 제공한다. # 베네치아는 과거 오스만령에서 발굴한 백반광의 전매료 미불에 대한 배상으로 15만 두카토 중 10만 두카토를 2년 이내로 분할상환으로 지불한다. 또한 관세<ref>사실상의 연공금이었다.</ref>로 매년 1만 두카토를 지불한다. 엄청나게 굴욕적인 결과였다. 아직 빼앗기지 않았던 스쿠타리를 주어야 했고...<ref>이때 스쿠타리 인들은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서 정착한다.</ref>그리고 베네치아는 이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욕을 오질나게 퍼먹는다. 자기랑 같이 평화협상을 준비하던 헝가리에게마저도. 그래도 베네치아로써는 동방 무역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던 셈. ===캉브레 동맹 전쟁, 키프로스 함락, 그리고 레판토 해전=== [[1499년]]에서 [[1503년]]까지의 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의 걀과로 코로네와 모도네를 상실하였으나 케팔로니아 섬<ref> http://ko.wikipedia.org/wiki/케팔로니아_섬</ref>과 이타카 섬<ref>http://ko.m.wikipedia.org/wiki/이타카</ref>을 얻었다. 그리고 [[1508년]]에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한다. 기존의 로마냐 지방을 두고 교황령과 경쟁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돌린 적국만 해도 [[교황청|'''교황청''']],[[신성 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프랑스|'''프랑스''']],[[스페인|'''스페인''']],페라라 공국 등. 당대 유럽의 슈퍼파워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다 모여서 순식간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을 상실하였다. 그 뒤 베네치아가 외교력을 총 동원하여 먼저 아풀리아(현 이탈리아 풀리아 주)의 항구를 스페인에게 할양하여 전쟁에서 나가게 하였다. 그 뒤 교황청이 베네치아 공화국이 사라질 시 스페인과 프랑스가 교황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는다. 그 결과 [[1509년]]에는 교황청,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였고, 다시 본토 속령을 수복하게 된다. 그리고 [[1570년]], 키프로스제 포도주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셀림 2세는 당시 베네치아 령이었던 키프로스를 공격한다. 이에 넓은 키프로스에서 튀르크 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ref>http://ko.wikipedia.org/wiki/파마구스타</ref>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선다. 그 뒤 유럽 국가들과 함께 신성 동맹<ref>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우르바노 공국, 몰타 기사단, 사보이 공국, 교황청</ref>을 발족하여 터키를 공격한다. 주요 국가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교황청인데, 목표<ref>스페인의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의 키프로스 구원이 대립하여 결국 튀르크 함대의 격멸로 결정 되었다.</ref>, 함대장<ref>스페인은 그들의 용병대장인 안드레아 도리아를, 베네치아는 또 그들의 해군제독인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를 추천하였고, 교황청은 대안으로 자기네 마르칸토니오 콜론나를 추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 공 돈 후안으로 결정되었다.</ref>, 함대수<ref>당장 급하던 베네치아는 자기네 조선소를 총동원 하여 목표량을 맞추었으나 스페인은 당초 약속의 절반만 가지고 왔다.</ref>로 대립하였고, 그 와중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되고 말았다. 2개월 후 오스만 해군을 [[레판토 해전|레판토에서 무찌르기는 하지만]] 스페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베네치아는 튀르크와 단독으로 강화한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 17세기 초에는,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가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중해 최후의 성채, 크레타==== [[1644년]] 몰타 기사단이 동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한 뒤 크레타 남단에서 잠시동안 정박하고 간 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크레타는 동지중해(아드리아해를 제외한)의 최후의 기독교계 거점이었으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높았었다. 또한 베네치아 역시 이를 알았기에, 크레타에는 베네치아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1645년#6월|1645년 6월]], 몰타 기사단을 치는 것처럼 꾸민 튀르크 함대가 크레타에 상륙하였다. 상륙지점에 있던 성 토데로 요새는 이를 공격하려고 달라붙은 터키군 500명과 함께 '''폭☆발'''함으로써 15년간 이어지는 크레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월 22일]]에는 칸니아(현 하니아)<ref>http://ko.wikipedia.org/wiki/하니아</ref>가 함락되었다. 그 뒤 크레타를 차례차례로 정복하여 베네치아에게 남은 요새는 스피날롱가<ref>http://en.m.wikipedia.org/wiki/Spinalonga</ref>와 수다<ref>http://en.m.wikipedia.org/wiki/Souda_(island)</ref> 그리고 그람보우사<ref>http://en.m.wikipedia.org/wiki/Gramvousa</ref>, 마지막으로 칸디아(현 그리스의 이라클리오)<ref>http://ko.m.wikipedia.org/wiki/이라클리오</ref>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새들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ref>단 칸디아는 제외, 칸디아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ref> 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모여들었고, 또한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의 자유민들 역시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몰타 기사단, 토스카나,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체 보유한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으며, 유럽의 주요 왕가에서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튀르크군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크레타와 달리 주민의 지원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달마티아에서는 되려 영토를 얻기까지 한다.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5월|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ref>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9월|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ref>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ref>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또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에서 얻은 영토 역시 베네치아령으로 인정한다. ====모레아 전쟁==== 크레타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1683년]]에는 크레타 전쟁 당시 칸디아의 수비대장이던 프란체스코 모르시니를 베네치아 해군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랑 동맹을 맺고 터키 제국을 공격한다. 당시 유럽 쪽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던 터키는 에게 해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맥을 못 추렸다. [[1684년#8월|1684년 8월]]에 산타 마우라 섬(현 그리스 레프카타 섬)<ref>http://ko.wikipedia.org/wiki/레프카다</ref>을 점령한 뒤 차례로 프레베자<ref>http://ko.wikipedia.org/wiki/프레베자</ref>와 보니차<ref>http://en.wikipedia.org/wiki/Vonitsa</ref>를 차례대로 되찾는다. 그 뒤에 모레아(현재의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발을 돌리는데, [[1685년]]에는 모레아 남단의 모도네와 코로네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온(현 그리스의 나플리오)<ref>http://ko.wikipedia.org/wiki/나플리오</ref>를 다음 해에는 모레아에 위치했던 베네치아의 기지를 수중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계속 전진하여 파트라스(현 그리스의 파트라)<ref>http://ko.wikipedia.org/wiki/파트라</ref>를 함락하고 레판토도 되찾으며, 코린토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1687년#8월|1687년 8월]] 이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온 모로시니에게 국회 심의를 중지하고 의원 전원이 마중을 나가는 전례 없는 기쁨을 보여주었을 정도다.심지어 이때야말로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섬도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ㅊ|결국에는 다 일장춘몽이었지만}} 모르시니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아서 미스트라<ref>http://en.wikipedia.org/wiki/Mystras</ref>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687년#9월|1687년 9월]]에는 [[아테네]]마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ref>이때 베네치아인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성하던 중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을 보관히 두었고, 베네치아 군의 대포가 명중하여 파괴되고 말았다.</ref> [[1688년#3월|1688년 3월]]에는 모로시니가 베네치아의 도제로 선출되었고, 그 전에는 필로폰네소스인<ref>[[로마 제국|로마]] 원로원이 [[대 스키피오]]에게 주어준 칭호인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를 생각하면 편하다.</ref>이라는 칭호를 주었을 정도로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ref>참고로 그는 [[1694년]] 나우폴리온 근처에서 죽는다.</ref> 전쟁은 [[1699년]]에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인해 끝나서 필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베네치아가 손에 넣는 걸로 끝난다. === 쇠퇴 및 멸망 ===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결국 일장춘몽으로 끄탄게 된다. [[1714년]] 시작된 전쟁으로 카를로비치로얻었던 땅을 다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레타의 수다와 스피날롱가 등의 크레타 쪽 영토도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서 모든 발판을 잃은 베네치아는 그나마 코르푸 섬 공방전으로 아드리아 해를 베네치아의 만으로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알바니아와 달마티아 쪽에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는 점? 이시기에 베네치아 미술은 더욱도 고급지게 된다. 그 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베네치아군은 당시 질적이나 양적으로(특히 육군은)매우 뒤떨어져서 베네치아가 비무장 비동맹을 펴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군이 침공하였고, 중과부적이라 여긴 베네치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본토 대부분과 그리스의 섬은 프랑스에게 본토 일부와 달마티아, 이스트리아 지방, 그리고 베네치아 시가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게 된다. === 멸망 이후 === [[1814년]]에 베네치아 전역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며, 이듬해 밀라노, 만투나 공작령을 합쳐서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공식 작위중 하나가 되었다.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양도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통일된 이탈리아의 일부로 편입된다. 그리고 현재 [[2014년]]에 유럽 전역에 불어 닥친 분리독립의 바람이 베네치아에도 미쳤다.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좆망하고, 북부 지방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남부 지방에 돈을 갖다 바친다는 생각도 있어서 그런 듯.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스코틀랜드의 것처럼 공식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베네토 주<ref>구 베네치아령 본토 중 일부</ref> 주민 전체 중 69.7%가 투표하여 약 88%가 찬성한다고 나왔다.<ref>http://en.m.wikipedia.org/wiki/Venetian_independence_referendum,_20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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