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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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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File:도제 궁.jpg|thumb|right|300px|베네치아 도제 궁]]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가지 정치유형 -군주정, 참주정(과두정), 민주정(다수 정치)- 을 융합한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였다. 초창기 베네치아는 도제(Doge<ref>라틴어 Dux의 베네토어 방언으로, '공작'에 해당.</ref>)에 의해 전제적으로 통치되는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인만큼 일반적인 영토국가의 전제군주제와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 다른 점이란 바로 베네치아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일반 시민들에게 정치권은 없었다 하더라도, 대중 집회(Concio)를 통해 정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고, 도제도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초창기의 정치제도는 수 세기간 이어졌으나 도시규모가 전례없이 방대해 지고 국력이 신장한 12세기를 기점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계는 보다 더 세련스러워졌다. 먼저 기존의 대중 집회는 잠깐 동안의 과도기인 현자 평의회 시절을 거쳐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라는 상설기구로 진보하였는데, 대평의회는 베네치아 6개의 시스티에리(구역)에서 각각 2명씩 선출된 선거위원이 1인당 40명씩 선출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의회였다. 초창기의 정원은 물론 480명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원의 수는 증가하였는데, 이는 특히 제노바 공화국이나 [[오스만 투르크]]같은 적국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자금을 확충하기 위해 황금의 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명부) 빈칸을 팔아먹은 탓이었다. 대평의회는 훗날 정원이 2000명을 넘기기도 하였다. 대평의회가 도시의 다수 정치를 대표하는 기구였다면 각 시스티에리에서 한명씩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6인의 소평의회(Minor Consiglio)는 과두정치를 상실하는 기구로서 신설되었다. 소평의회는 엘리트 집단으로 도제의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 14세기 초인 1310년 티에폴로의 난을 계기로 10인 평의회가 새로이 신설되어 이 두 기구가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의 자문기구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도제의 권력을 견제하는 기구로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한편으로 12세기 후반에는 공화국에서 사법권의 독립도 이루어져, 40인회가 현대의 대법원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대평의회 의원으로 뽑힌 부유한 시민들은 도제직이 세습되는 것과 부정선거가 공화국에서 자행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평의회의 도제 선출방식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대충 설명하자면 두칼레 궁전의 대평의원회실에 비치된 의원들의 수만큼 공이 들어있는 단자에서 의원들이 공을 뽑는 것으로 도제선출식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당첨 공을 뽑은 의원들이 선출인단을 뽑았는데, 이 선출인단은 도제 선출인단이 아니라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이었다. 이 선출인단의 선출인단들이 선출인단을 뽑고, 또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이 다른 선출인단들을 뽑는 것을 몇 번 반복한 끝에, 최후의 도제 선출인단 41인이 다수결로 도제를 뽑았다. 이 복잡한 선거제도는 13세기 후반에 도입되었는데, 도제선출과정에 다수결과 운빨 요소가 첨가되어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여하튼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으로 인해 도제의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어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전례없는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고, 보다 더 국가기능이 유기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대평의회가 공화국의 실세가 됨에 따라 도시의 중하층민들이 총독 선출과정에서의 배제됨은 물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도로 약해져 베네치아가 귀족 공화국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 개혁을 추진한 비탈레 미키엘 2세는 한 베네치아 서민에 의해 암살당했고, 대평의회 제도를 없애고 이를 초창기의 대중 집회 제도로 환원시키고자 한 마린 보코니오와 같은 정치적 불만분자도 등장했다. 이러한 평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의 일종으로 베네치아에서는 선거일에 정부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부조를 베푸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독특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정교분리국가로, 성직자들이 정치기구의 결정에 참견할 수가 없었다. 종교인들조차도 세레니시마의 정치에 입김을 뿜기 위해서는 정식절차를 거쳐 의원이 되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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