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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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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귀족제도===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 출신들 혹은 전쟁, 외교 등 국가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영웅들의 후손들로 공화국의 '황금의 서'에 등록된 가문 일원들이었고, 대평의회 시대부터는 이들만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공화국의 특권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귀족의 명성에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할 시 언제든지 귀족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라할지라도 전횡을 일삼을 수 없었으며 항상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베네치아의 계급제도는 유연했고 누구든 귀족이 될 수도 있고, 평민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참정권 이외의 권리를 귀족이 더 갖는 것도 아니었기에 귀족제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베네치아 시민들은 평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단지 가진 재력의 차이만 있었을 뿐.(물론 그게 엄청난 것이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력 산업인 무역업에 종사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쥔 상업 귀족들이나 16세기 후반부터는 테라 피르마(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리아 본토 영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전원 귀족화되었다. ===여성=== [[File:베네치아 카니발.jpg|300px|right|thumb]] 중세 이탈리아에서 여성들은 폭넓은 사회적인 규제를 받았었고, 베네치아 여성들도 이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사순절 축제나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장을 볼 때를 제외하면 외출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극도로 순결을 강요받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경제패권이 시들해진 17세기 무렵부터는 환락적인 문화가 이 도시국가를 지배하게 되었고 여성들도 중세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문란해졌다. 이 시기 베네치아에는 매춘부들이 우글거렸고 그녀들간의 경쟁이 심해서 일부 거리에서는 남자가 옷소매를 뜯기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특히 크리스마스와 사순절 사이의 베네치아 카니발 시즌에는 전 유럽으로부터 (주로 남성)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사랑과 출산의 광란클럽이 되었다. 베네치아가 낳은 세계적인 난봉꾼인 카사노바(Casanova)가 활약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유대인===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업국가답게 종교적으로 관대한 나라였고, 유대인들이 공화국령 곳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이자 중심지인 베네치아 시가지에 한해서는 유대인의 입주를 엄격히 금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공화국이 유대인의 능력을 공화국의 국력 신장에 이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상업을 주름잡던 베네치아인들조차 유대인들을 강력한 경쟁상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큰 타격을 입은 키오자 전투 이후인 1384년에 최초로 유대인들의 베네치아 시가지 입주가 허용되었다. 이 결정은 1395년에 번복되었으나 1516년에 다시 유대인들의 베네치아 거주가 전격적으로 허용되었다. 이 결정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1492년, 그레나다를 정복하고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은 자국령 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상업적인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로 대거 몰려들었다. 게다가 16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유럽의 양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대가 판을 치고 있었다. 베네치아 군대가 이탈리아 본토의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군에게 참패하자 이탈리아 본토의 유대인들이 대거 석호로 몰려들었다. 결국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수준이라고는 보기 힘든 숫자의 유대인들이 도심지에 들어왔고, 결국 공화국 당국도 이들의 베네치아 시가지에서의 거주를 공식적으로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베네치아 당국은 따로 유대인 거주지구를 설정하여 그 곳에서만 거주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먼저 요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격리수용이 단순히 차별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중세 시대에는 그것이 일종의 안보장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베네치아인들은 유대인이 오기 오래 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알렉산드리아같은 이교도들의 도시에 유대인 거류구역과 비슷한 형태의 집단거주구역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아오곤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유대인들이 집단거류하게 된 구역은 과거 대포 주조공장들이 있어서 금속을 던지(gettava / 제타바('던지다'의 베네토어))곤 했던 지구였고, 그 역사에 유래하여 베네치아 유대인 거류구역을 제토(Getto)라 부르게 되었다. 베네치아의 제토는 세계 최초의 게토(Ghetto)로 알려져 있다. 게토(Ghetto)는 독일계인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연자음 발음을 하지 못해 Getto를 '게토'로 부르던 것에 그 어원을 두며, 훗날 비극의 단어가 된다.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업과 제조업, 무역업에 종사하여 보신주의적인 투자활동으로 경제활동노선을 바꾼 베네치아의 기존 귀족들을 대신해 베네치아 경제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다. 비록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가 유대인의 시가지 거류권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악감정은 존재했는데, 셰잌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당시 사람들의<ref>당시 잉글랜드와 베네치아는 국가간 관계가 좋았다.</ref> 유대인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들도 돈냄새 때문에 베네치아에 온 것이지 딱히 베네치아가 좋아서 온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무렵 공화국의 경제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말엽 베네치아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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