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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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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이탈리아 냄비들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냄비들이 식으면서 비잔틴에 대한 감정도 사그러든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비잔틴 세력은 이미 그 기반을 거의 잃어있던 상황이었다. 서쪽의 프랑크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전례없이 강해지자 당시 비잔틴 세력권과 프랑크 세력권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던 베네치아 또한 이에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 내부에서 정치파벌이 친프랑크파와 친비잔틴파로 나뉘어졌고 서로 정치질을 시전하게 되었다. 프랑크 제국이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청소해내버리자, 친프랑크파의 세력이 베네치아 정치판에서 그 세력이 막강해진다. 급기야 로마 교황이 자기를 거칠게 다루던 롬바르드족을 프랑크족이 응징해주고 상냥하게 다뤄주자 기모찌해진 나머지 프랑크 왕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하자 프랑크 왕과 잡것들이 로마제국 황제 설정놀이하는걸 못마땅해 하셨던 오리지널 로마황제가 딴지를 걸게되며 마찰이 빚어졌고, 결국 프랑크와 비잔틴 세력간 대결이 발생되게 된다.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의 응딩이에 붙어먹으려는 조짐이 일어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보내 베네치아를 점령해버리고 친프랑크파인 베네치아의 자칭 총독을 추방행시켰다. 대신 친비잔틴파 인사를 베네치아의 새로운 총독으로 앉혔고 공화국은 다시 비잔틴 세력의 속주로 편입되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프랑크 세력의 침공대상이 된다. 서기 810년, 피핀의 군대는 용맹히 베네치아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비잔틴과 베네치아 연합함대가 프랑크 해군(이라고 쓰고 수송부대라고 읽는다)을 박살내었고 프랑크 육군은 베네치아의 수상에서 소형선을 타고 석호의 거류지로 진군하다 베네치아의 습지대에 좌초되었고 결국 습지대에서 허우적거리던 와중에 베네치아 수비군의 집중포화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건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듣보잡 취급하기 힘들 정도의 공을 세우고 이후 아드리아 해와 동지중해에서 비잔틴의 골치를 썩이게 했던 해적들을 처리하는데 또 공을 세우고 비잔틴이 전쟁을 치를때마다 해군력을 파견하여 어시를 올리자 베네치아를 쩌리 똘마니취급했던 비잔틴도 점점 베네치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 2세 황제로부터 금인칙서를 받고 조약을 통해 비잔틴 내에서의 무한상업권을 보장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면세특권을 획득하게 되어 상업적 우위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경쟁국들의 함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항하려면 30솔디 금화를 물어야 할 때 베네치아의 함선은 15솔디만 물어도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서 베네치아가 비잔틴에 속한다는 것을 명문화했지만 대신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비잔틴 측에서 베네치아 해군이 아드리아 해의 치안유지활동을 할 것을 조항에 넣었지만, 사실 무역국가 베네치아로서는 지중해를 통하는 유일한 관문인 아드리아 해의 해적소탕이 옵션이 아닌 필수이행사항이었기 때문에 전-혀 손해보는 일이 아니었다. 이 기념비적인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서유럽 최강의 상업세력으로 부상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베네치아의 비잔틴 세력권에서의 특권은 약 1세기 후 더 강화되는데,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단을 쳐묵한 노르만 족이 비잔틴 제국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이피로스 지방을 공략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즉각 120척의 갤리선 함대를 보내 혁혁한 공을 세워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또 하나의 황금칙서를 받게된다. 이로 인해 제국 전체에서 무관세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금지했던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미 베네치아인들은 9세기부터 이슬람과의 교역을 개시하였고, 이 덕분에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유물도 이집트에서 도굴해 올 수 있었다. 이미 초창기부터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제적인 활동을 해 온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슬람에게 '통'수를 시전하기도 하는데 이슬람 정벌을 메인 퀘스트로 하는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베네치아는 이미 1차 십자군 전쟁때부터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아무짝에 쓸모없는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의 '통'치권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면에서 나서지 않는 치밀함과 외교술수를 구사하여 이슬람과의 무역관계는 십자군 전쟁 도중에도 계속 유지하였다. 이렇게 동지중해 곳곳에 상업제국을 구축한 베네치아이지만, 주요 상업적 부의 원천인 비잔틴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122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2세가 공화국의 무역특권을 부정하자 베네치아는 이에 빡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비잔틴과 3년간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이와같은 대결상태는 소강국면에 진입하여 베네치아와 비잔틴의 무역관계는 지속되지만 양국간 관계불화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사건에 의해 양국간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업세력은 잡세력들이 정리되어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양강구도로 세력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에 필연적으로 두 나라는 라이벌-적대관계가 되었는데, 이 적대관계는 오늘날 헬조선-일본 관계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험악한 관계였다.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제노바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적극적으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대규모의 베네치아인 조계와 제노바인 조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계의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인 구역을 침범하고 이에 공격을 가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열받은 비잔틴 조정은 베네치아인들에 대한 구금령과 자산동결령을 내리게 된다. 사실 이와 같은 라틴 지구의 폭동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이와 같은 조치는 참다가 쌓인걸 분출한 것으로 봐야한다. 어쨌든 비잔틴이 이와 같은 강경조치를 내리자, 딥빡한 베네치아 공화국 평의회는 대규모 선단을 꾸려 비잔틴을 공격했고, 이로 인하여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상업으로 인해 축적한 부를 토대로 의기양양하게 비잔틴 제국령으로 진군하여 해상전과 상륙전을 병행한 베네치아이지만 해상전에서 비잔틴 제국해군에게 쳐발리고 상륙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첩보를 입수한 비잔틴 제국육군의 매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만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군을 보내 지속적인 해적질 레이드를 벌이고 이탈리아 본토에 남아있던 비잔틴 떨거지세력을 공략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지만 이마저도 막히고 역강간당한 끝에 결국 비잔틴에 항복해버리고 만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비잔틴에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후 베네치아와 비잔틴 간 무역관계는 재개되었지만, 이와 같은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었고 얼마 후에 일어난 라틴인 학살사건은 그 불편한 관계에 쐐기를 박게된다. 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폭동이 일어나 베네치아인 거주지의 거류민들이 대학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난다. 그런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권정부는 이를 대놓고 방관해버렸다. 이 때문에 학살의 피해가 눈덩이만큼 불어났음은 추기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이렇듯 비잔틴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한 베네치아지만 아직은 비잔틴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묵묵히 예전의 관계를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뒤로는 베네치아인의 특기인 잔머리를 굴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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