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베네치아 공화국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4차 십자군 전쟁=== 서방의 기독교도들은 1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동의 주요거점들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1180년대에 접어들자 십자군 측은 그들이 차지한 거점들을 차례로 뱉어내기 시작하였다. 1187년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함락되자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에 충격을 받아 요절하였다. 성지 이외에도 아크레, 시돈, 베이루트와 같은 주요 요충지들이 차례대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고,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이슬람에 대항하여 기독교 왕국들의 연대를 주문하였는데, 이는 확실한 효과가 있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리히 1세 바바로사,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 등 유럽의 쟁쟁한 국왕들이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개시하였는데 이가 3차 십자군 전쟁이다. 이는 비록 1차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살라딘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유럽으로 복귀한 3차 십자군의 일원인 사자심왕 리처드는 이집트가 이슬람 교도들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언급하였다. 그의 조언은 3차 십자군의 뒤를 이은 4차 십자군이 공략목표를 이집트로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201년에 4차 십자군이 출항지인 베네치아로 집결하였다. [[File:Enrico Dandolo.jpg|thumb|right|300px|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전 십자군 전쟁에서도 병사들을 수송하여 배삯을 받고, 아크레 등 십자군이 점령한 레반트 지역 거점도시의 조계를 할당받는 등 톡톡한 이득을 누려 왔으나 새로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는 4차 십자군 때 판을 크게 키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으로부터 4,500명의 기사들(&그들이 탈 말들)과 9,000명의 종자들, 그리고 20,000명의 보병들을 수송할 선단과 이들이 소비할 9개월어치 분의 군량을 요청받았고 공화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는 일개 도시국가가 감당하기에는 매우 거대한 규모였고, 따라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1년간 4차 십자군의 요청을 맞추기 위해 진력하였고,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막상 4차 십자군이 집결하자 문제가 생겼다. 제후들이 예상보다 많이 모이지 않아 베네치아 공화국 측이 요청한 품삯을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초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에 이와 같은 용역의 대가로 84,000마르크에 해당하는 은을 요구했었고,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들은 베네치아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그들의 무구를 제외한 전 재산을 내놓았다. 보니파치오는 그의 사적금고를 내놓았으며 다른 기사들이나 일개 병사들도 그들이 갖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4,000마르크 은이 부족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당황했고 그는 십자군을 한동안 베네치아에 체류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묘책을 떠올렸고, 그는 십자군이 채우지 못한 34,000 마르크에 달하는 품삯을 받지 않는 대신 출항하는 대가로 십자군에게 모종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십자군 측에서는 이를 탐탁치 않다고 여기기도 하였으나 배삯을 채우지 못해 출항하지 못하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체면도 서지 못했으므로 이를 수락하였다. 십자군과의 합의에 성공한 공화국의 선단은 그들을 승선시키고 아드리아 해를 유유히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 '''이후 항목부터는 [[리브레 위키]]의 [https://librewiki.net/index.php?title=%EB%B2%A0%EB%84%A4%EC%B9%98%EC%95%84_%EA%B3%B5%ED%99%94%EA%B5%AD/%EC%97%AD%EC%82%AC&oldid=261520 '베네치아 공화국/역사' 문서 (10월 23일자 본)]에서 포크해왔다.''' 십자군 이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동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수백척의 베네치아 함선이 도시 내에 베네치아인 거류구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양 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1202~[[1204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교역 계약을 갱신하면서 숨은 조항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는 다는 조항을 넣었다. # 그 뒤 제 4차 십자군을 위해 프랑스의 제후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고, 돈을 받고 그들을 '''당시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드랍해 주기로 한다.''' # 제 4차 십자군이 그 돈을 못내고 있자<ref>그 돈의 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 쪽수 계산 - 왕 급의 제후가 여러 명 참가한다지만 프랑스 왕이 동원 가능한 군데의 몇 배 가량은 되었다. - 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덜 오자,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인근의 섬에 틀여 박힌 채로 십자군이 공중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ref>채무 기간을 유예해 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가톨릭 교도였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하게 했다.''' 다름아닌 '''십자군'''이<ref>이때 교황 특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무것도 아닌 정보를 주고 로마로 보낸 뒤에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f> # 자다르를 점령한 뒤 동로마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가 찾아온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부탁을 하는데 그 왕자가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도(정교회라 종파가 다르기는 했지만)이자 당시 유럽권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 도시 점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동로마 제국이 대신 지불한다. #* 도시 점령시 동로마 제국의 성지 수호를 위해 천 명가량의 기사를 십자군 국가에 파견한다. #* <big>'''가톨릭과 정교회를 통합한다.'''</big><ref>이 때문에 자다르를 점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에 처한 교황도 이때에는 다른 가톨릭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는 길에 가톨릭교도의 도시는 없었으니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었던 셈</ref> #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은 대포 발명 전까지는 함락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함선들을 이용해 금각만 쪽으로 공격한 것. # 하지만 전임 황제가 돈을 흥청망청 써대서 빚 변제도 못하고, 군대도 못 보내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니...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본 십자군은 베네치아 거류구와 군사 주둔지가 큰 화재를 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 한다.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도 이때 가져온 것이다. # 그 뒤 성립된 것이 라틴 제국.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코르푸 섬,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필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였던 제노바나 피사 등의 나라를 동지중해 무역에서 격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라틴 제국이 존속할 때까지 '동로마제국의 3/8의 주권자'란 칭호도 덤. # 그렇게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