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베네치아 공화국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17세기=== 17세기 초에는,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가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중해 최후의 성채, 크레타==== [[1644년]] 몰타 기사단이 동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한 뒤 크레타 남단에서 잠시동안 정박하고 간 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크레타는 동지중해(아드리아해를 제외한)의 최후의 기독교계 거점이었으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높았었다. 또한 베네치아 역시 이를 알았기에, 크레타에는 베네치아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1645년#6월|1645년 6월]], 몰타 기사단을 치는 것처럼 꾸민 튀르크 함대가 크레타에 상륙하였다. 상륙지점에 있던 성 토데로 요새는 이를 공격하려고 달라붙은 터키군 500명과 함께 '''폭☆발'''함으로써 15년간 이어지는 크레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월 22일]]에는 칸니아(현 하니아)<ref>http://ko.wikipedia.org/wiki/하니아</ref>가 함락되었다. 그 뒤 크레타를 차례차례로 정복하여 베네치아에게 남은 요새는 스피날롱가<ref>http://en.m.wikipedia.org/wiki/Spinalonga</ref>와 수다<ref>http://en.m.wikipedia.org/wiki/Souda_(island)</ref> 그리고 그람보우사<ref>http://en.m.wikipedia.org/wiki/Gramvousa</ref>, 마지막으로 칸디아(현 그리스의 이라클리오)<ref>http://ko.m.wikipedia.org/wiki/이라클리오</ref>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새들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ref>단 칸디아는 제외, 칸디아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ref> 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모여들었고, 또한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의 자유민들 역시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몰타 기사단, 토스카나,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체 보유한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으며, 유럽의 주요 왕가에서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튀르크군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크레타와 달리 주민의 지원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달마티아에서는 되려 영토를 얻기까지 한다.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5월|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ref>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9월|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ref>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ref>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또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에서 얻은 영토 역시 베네치아령으로 인정한다. ====모레아 전쟁==== 크레타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1683년]]에는 크레타 전쟁 당시 칸디아의 수비대장이던 프란체스코 모르시니를 베네치아 해군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랑 동맹을 맺고 터키 제국을 공격한다. 당시 유럽 쪽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던 터키는 에게 해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맥을 못 추렸다. [[1684년#8월|1684년 8월]]에 산타 마우라 섬(현 그리스 레프카타 섬)<ref>http://ko.wikipedia.org/wiki/레프카다</ref>을 점령한 뒤 차례로 프레베자<ref>http://ko.wikipedia.org/wiki/프레베자</ref>와 보니차<ref>http://en.wikipedia.org/wiki/Vonitsa</ref>를 차례대로 되찾는다. 그 뒤에 모레아(현재의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발을 돌리는데, [[1685년]]에는 모레아 남단의 모도네와 코로네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온(현 그리스의 나플리오)<ref>http://ko.wikipedia.org/wiki/나플리오</ref>를 다음 해에는 모레아에 위치했던 베네치아의 기지를 수중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계속 전진하여 파트라스(현 그리스의 파트라)<ref>http://ko.wikipedia.org/wiki/파트라</ref>를 함락하고 레판토도 되찾으며, 코린토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1687년#8월|1687년 8월]] 이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온 모로시니에게 국회 심의를 중지하고 의원 전원이 마중을 나가는 전례 없는 기쁨을 보여주었을 정도다.심지어 이때야말로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섬도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ㅊ|결국에는 다 일장춘몽이었지만}} 모르시니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아서 미스트라<ref>http://en.wikipedia.org/wiki/Mystras</ref>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687년#9월|1687년 9월]]에는 [[아테네]]마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ref>이때 베네치아인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성하던 중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을 보관히 두었고, 베네치아 군의 대포가 명중하여 파괴되고 말았다.</ref> [[1688년#3월|1688년 3월]]에는 모로시니가 베네치아의 도제로 선출되었고, 그 전에는 필로폰네소스인<ref>[[로마 제국|로마]] 원로원이 [[대 스키피오]]에게 주어준 칭호인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를 생각하면 편하다.</ref>이라는 칭호를 주었을 정도로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ref>참고로 그는 [[1694년]] 나우폴리온 근처에서 죽는다.</ref> 전쟁은 [[1699년]]에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인해 끝나서 필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베네치아가 손에 넣는 걸로 끝난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