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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과 폐지== 흑인들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이전부터 시민단체로 활약했던 ANC가 흑인 민권을 위한 정치단체로 격상하여 [[넬슨 만델라]] 등 많은 흑인 운동가들이 反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벌이게 된다. 일반 흑인 대중들도 시위를 통해 투쟁해나갔지만 번번히 국민당 정권의 앞잡이인 남아공 군경<ref>이 당시 사진이나 영상 보면 흑인들도 간간히 보이는데 6,70년대부터 흑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긴 했는데 대개 잡졸이나 하사관 정도였다. 땅은 넓은데 인구가 모자라다보니 이렇게 된 거다. 오늘날 남아공 군대와 경찰은 이 시절부터 복무한 흑인들이 고위직을 차지한 반면 백인들의 비중은 점점 줄다 못해서 거의 없다시피한다.</ref>에게 돈좌되었다. [[파일:Sharpeville Massacre 1960.jpg]] 1960년 3월 21일 트란스발 주 샤프빌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反 아파르트헤이트 시위는 남아공 경찰의 집단발포로 쑥대밭이 되었고 이는 그간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따르던 만델라가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조 슬로보 등과 함께 국민의 창(Unmkhonto we Sizwe)<ref>흑인들만 참여하던 ANC와 달리 이 조직은 진보적인 백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ref>을 조직하여 국민당 정권에 대한 테러와 사보타주를 벌이다 체포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지 직전까지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파일:sowetouprising.png]] 1976년 7월 16일 요하네스버그 서남쪽 소웨토란 동네에서 다시 시위가 터졌다. 영어 대신 아프리칸스 어만 가르치려는 국민당의 정책이 그 이유였다. 역시 숱한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youtube|-kwNh1lMU-w}} 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물을 향해 달려가는 중에도 항쟁은 계속 이어졌다. [[파일:P.W.Botha.jpg]] 남아공 마지막 총리<ref>1984년 헌법을 수정하여 의원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고치면서 총리직을 폐지. 그리고 지가 대통령이 되었음</ref> 겸 6대 대통령을 역임한 [[피터르 빌럼 보타]]. 이 새끼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둘러싼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집권하여 초창기에 대내외에 좋게 보이려고 인종간 결혼금지 폐지정책과 컬러드와 아시아계 의회 개설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건 매한가지였으며, 투표권을 요구하는 흑인들에게 잔혹하게 대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는 등 어마무시한 기만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남아공은 더 힘들어졌다. 영원할 줄 알았던 포르투갈의 앙골라, 모잠비크 지배도 결국 1975년에 종식되었고 로디지아마저 1980년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했다.<ref>[[로버트 무가베|근데 문제는 권좌에 오른 새끼가 하필...]]</ref> 안그래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민당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해서 남아공 항공의 자국의 영공 통과마저 금지때렸던 판국에 남아공 인접국들의 정세 변화는 더더욱 고립을 심화시켰다. 국제적 고립이 더 심해지자 1979년 핵무기 6기를 제조하면서 기어이 핵무장에 나섰다. 레알 북괴 {{youtube|yJ3i5rS7m9o}} 1986년 6월 12일, 보타는 국영방송 SABC 텔레비전에서 연설을 통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당시 흑인들의 집회에 무력으로 대응했지만 되려 흑인들의 저항만 거세졌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만델라]]에게 '''폭동과 무력행위를 하지 않겠다면''', 석방을 고려해 보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명분도 실리도 없는 탄압정책만 계속하다보니 이젠 아프리카너나 영국계나 엥간한 백인들도 지쳐서 언어가 통하는 영국이나 호주, 네덜란드 등으로 탈남아공하기 시작했고<ref>조상이 라틴계인 사람들은 스페인이나 중남미로도 갔고 냉전 종식 이후 심지어 러시아나 조지아로 갔다. 주로 농업 이민으로</ref>, 안그래도 정체된 경제는 더 엉망이 되었다. 그간 남아공을 뒤봐줬던 미국과 영국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마당에 같은 반공진영이라도 꼴통이나 진배없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등을 돌렸다. 그 와중에 "큰 악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보타도 1988년 건강이 악화되어 "늙은 악어"라고 존나게 까이게 되자 결국 이듬해 빤쓰런 하게 된다. [[파일:Frederik Willem de Klerk 1990.jpg]] 보타가 병으로 빤쓰런한 이후 취임한<ref>정확히는 얀 크리스티안 회니스가 권한대행으로 2개월 역임한 후에 취임했다.</ref>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ref>고모부가 저 위에서 서술한, 아파르트헤이트에 일조한 스트레이돔 총리라고 한다.</ref>는 유화책으로 돌아서 1990년 만델라를 전격 석방, 협상 과정을 거친 뒤 2년 뒤인 1992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정확히는 만델라와 ANC와 협상을 계속할지)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했다. 문제는 투표힐 떼 백인들만 하도록 되어서 ANC가 반발했지만, 놀랍게도 투표율 85퍼센트에 찬성이 68퍼센트 이상 나오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관짝에 처넣고 대못을 박는 격이 되었다. 그만큼 한 때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했던 백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지쳤던 것이다. {{youtube|wcQ9GqJUiDY}} ㄴ1992년 국민투표 당시 어쨌든 유색인종에게도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이 통과되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1994년에 반투스탄이 해체되고 국민당 정권과 유착하던 흑인 기득권층과 백인 극우층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진압되었고, 동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ANC가 압승을 거두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파르트헤이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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