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아파르트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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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

과거 남헤르프리카 공화국에서 쓰인 전통적인 악법이었다.

이것뗌에 지금 남아공이 좆미개한 국가가 되었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흑인들을 반투스탄이라는 거주지역에 쳐박아놓고 백인들만 좋고 흑인들 노예로 부린 정책이다. 당시 남아공은 분명히 명목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는데 하는 짓은 나치즘이였다. 뭐 머한민국의 국부, 반신반인, 문어 시절도 그랬지만. 하지만 머한민국의 독재자들은 화교나 소수 재한일본인들을 황무지에 짱박아놓진 않았다.

흑인차별이 심한 디시위키에서 몇 안되는 좋은 문서다. 사실 워낙 악랄한 정책이라 여기서도 흑인차별하면 그건 인간임을 포기한거긴하다.

이 문서의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편집]

아파르트헤이트를 알기 위해서 우선 20세기 초까지의 남아공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보어인의 도래[편집]

지금의 남아공의 대도시 케이프타운 내에 있는 희망봉을 최초로 발견한 이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이지만 본격적으로 남아공에 식민지를 박아넣은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1652년 얀 판 리베이크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농부들 데려다가 정착시킨 이후로[1]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과 프랑스서 종교박해를 피해 빤스런한 신교도인 위그노[2]들이 남아프리카 남서부 케이프 지역에 모여 대대로 살게 되었다.

현지 흑인들과 이런저런 교류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지냈지만 아무래도 수적인 열세를 극복해내지 못했고 이는 공포로 이어졌다. 소수의 백인은 다수의 흑인을 이기지 못하고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흑백 혼혈로 피가 더럽혀져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들을 지배했고 이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원인이 되었다.

아무튼 이대로 쭉- 네덜란드의 지배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영국의 등장과 보어인의 대이주[편집]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 기
오렌지(오라녜) 자유국 기
트란스발 공화국 기
나탈 공화국 기
영국령 나탈 식민지 기

19세기 초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찌그러져 있는 사이 영국이 빈집털이에 나섰다.

얼마후에 영국 본토 의회의 결의대로 그간 남아공서 이루어지던 흑인 노예제도가 철폐되자 보어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안그래도 생판 남이었던 이들에게 지배받는게 고까웠던 보어인들은 흠칫뿡, 나 삐질꼬얌 하고 케이프 식민지를 이탈하기 시작했고 영국도 딱히 막지 않았다.

위 그림에서 소가 이끄는 마차를 아프리칸스어로 오서바(Ossewa)라고 한다. 남아공 옛 국가인 <Die stem van Suid-Afrika>에도 언급된, 보어인의 상징이기도 한다.

케이프 식민지를 떠난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상대적으로 케이프 식민지에 가까운 오렌지 강 유역에 정착한 한 부류는 오렌지 자유국을, 더 북쪽으로 올라가 발 강 너머, 림포포 강 유역에 정착한 부류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동쪽 해안지대로 우회한 나머지 한 부류는 나탈 공화국을 세웠다.

일단 영국은 보어인들의 나라를 승인하고 한동안은 평안해졌다. 그러나 영국의 욕심은 끝갈줄을 몰랐다.

보어전쟁[편집]

그림 속 인물은 아프리카를 씹창낸 세실 로즈[3]. 영국은 저 위의 만평처럼 이집트서 남아공까지 아프리카를 다 처먹을 기세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남부 내륙 지역(지금의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등)이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거기에 잠재된 다이아몬드와 금 같은 자원은 영국의 군침을 돌게 했다. 때마침 남아공 흑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줄루족이 세운 줄루왕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흑송토인인줄 알고 초콜릿을제조하려 갔더니 오히려 마시멜로를 제조해버리고는 패배해버렸다. 그러나 줄루 왕국이 총을 가지고 있어도 '근접전'을 선호함을 알고 전술을 수정해 왕국을 멸망시키고 내친 김에 나탈 공화국을 꿀꺽해 식민지로 삼았다.

남아있는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은 영국에 맞서 연합했고 결국 영국과 두 차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영국은 쪽수가 적은 이 보어인들의 나라를 좆밥으로 보고 오랫동안 재미를 못봤던 영국인들의 국뽕을 크게 들이키려고 군대를 파병했는데 결과는?


완전히 개쪽을 탔다.

딱봐도 영국군은 눈에 다 띄는 레드코트 입고 싸우고 자빠졌고

반대로 보어인들은 카키색 비슷한 옷으로 치고빠지는 전술을 사용하여 영국을 골탕먹였다.

1차전쟁에서 피맛본 영국은 이를 전훈으로 삼아 군복을 바꾸는 등 단단히 준비하고 2차 전쟁에서 겨우겨우 이겨 보어인들을 굴복시켰다.[4]

그 와중에 보어인 게릴라를 차단한답시고 민간인들의 집과 농장을 싸그리 불태우고 남은 주민들을 강제수용소에 투옥시켜 상당수 많은 이들이 굶어 죽는 최악의 참사가 터져 욕을 바가지로 처먹었다. 참고로 저 위의 뼈가 앙상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사진의 주인공은 7살배기 소녀로 촬영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겨우겨우 남아공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지만 보어인들의 분노[5]와 세계인들의 비난을 무마시키려고 1910년 남아공 전체를 자치령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남아공에 힘을 너무 많이 쏟아부은 나머지 원래 견제하려 했던 러시아를 제어하는데 힘이 달려 일본을 푸시하게 되고...씨벌

전조[편집]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는 1917년에 훗날 총리가 되는 얀 스머츠의 연설로부터 등장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리라는 개념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케이프와 나탈에서 실시된 통행법(pass law)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거주 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우스운 것은 흑인들은 보어인보다 영국인과 친한 편이고 이전의 보어 전쟁때 영국편에 섰는데도 이랬던거다.

흑인뿐만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에 으레 따라오기 마련인 인도인들도 차별받는 실정이었다. 간디가 젊었을 적에 한 일이 남아공 내 인도인 동포들의 처우 개선과 차별 철폐를 위한 캠페인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차별 정책이 법으로 구체화되가고 있었고 이를 가속화한 정당이 국민당(머만의 정당 아님)이었다.

국민당은 보어인(아프리카너)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 당시만 해도 임금법(1925년), 연금법(1927년)등으로 백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동시에 당시 보어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인종차별적인 가치관에 의거하여 풍기문란법 등을 제정하는, 한마디로 우익 포퓰리즘 정당이었다.

그러다가 세계 대공황 이후 1933년 경에 얀 스머츠가 이끄는 남아프리카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고 나중에 합당하여 연합당으로 당명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등 몇몇 의원들이 이탈해 국민당을 다시 세웠고 연합당과 대립했다.

바닥을 치던 남아공 경제가 2차세계대전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아직 영국의 자치령의 지위에 있는지라 영국이 참여하는 큰 전쟁(1,2차 세계대전, 6.25전쟁[6])에 영국따라 참전하면서 백인 남성들의 공백을 흑인들이 메꾸는 등으로 흑인들의 지위가 향상되가고 있었고 정부는 차별정책 함 완화해 볼까? 하고 슬쩍 간봤지만 이는 아프리카너들을 격분케했고 연합당은 지지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운명의 1948년 총선이 펼쳐지게 되고...

본격적인 재앙의 시작[편집]

서는 재앙에 대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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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운명의 총선이 치러지는 때,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득표율에서 11.5%나 밀렸지만(49.2% VS 37.7%) 반대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 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연합당을 5석 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기어이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였다.[7]

그리고 남아공에 헬게이트가 펼쳐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총선에서의 승리로 총리가 된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8]. 이새끼가 한 일으로 인종간 혼인 금지법(1949), 배덕법(흑백간 성관계 금지)(1950), 인종별 시설 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 등 이 있고 이로 인해 흑백혼혈 가정들이 박살나고 백인들도 흑인 창녀와 섹스하다 걸려 철창신세지는 등 반발이 끊이질 않았지만 응 좆이나 까잡숴 하고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총선에서도 이겨 정권재창출을 이뤄내었고.

말란 후임으로 총리가 된 요하너스 스트레이돔은 유색인종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박탈시키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도 존나게 지저분한게 법을 통과시키려한 걸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의 의석이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 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는 동안 야당인 연합당은 국민당에 밀려 만년 야당 쩌리 신세가 되었고 빡친 몇몇 의원들은 진보당으로 탈당하고 나탈 주만 간신히 건져내는 2019년 현재 자한당 수준에 머물렀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는 그때까지 남아공 국민당은 좆본의 자민당마냥 존나게 폭주했다.

스트레이돔이 지병으로 사임(하고 얼마안가 뒈짖)한 후로 헨드리크 페르부르트가 총리가 되었다. 이 새끼야말로 아파르트헤이트에 쐐기를 박아 남아공이 욕받이가 되는 원흉이다.

우선 보어인이 영국계보다 젊은층의 비중이 큰 걸 노려서 선거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당시 남아공의 속령이었던,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를 남아공의 한 주로 편입시켜 그곳의 살던 보어인들을 끌어모았고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등 통과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너의 평생의 숙원이던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1961년 영연방을 이탈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수립했다.[9]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누그러지는 마당에 역주행하는 남아공에 넌더리난 영국이 그래 잘 꺼져 해서 독립되었고[10] 1960년대 초 아프리카의 국가 대부분이 독립되는 그때부터 고립이 시작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흑인 국가들은 남아공을 보이콧하였다.

스포츠에서도 왕따신세라서 FIFA에서 1954년에 IOC에서 1970년에 각각 추방당했다. 그러니까 월드컵, 올림픽 다 못나간다는 소리다. 그나마 럭비대회 정도나 참가하긴 했지만.

페르부르트는 이런 국제적인 고립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직 가까이에 포르투갈이 식민통치하고 있던 앙골라모잠비크가 있고 북쪽의 영국 식민지였던 로디지아 땅에 이언 스미스라는 영국인이 한줍도 안되는 백인들 데리고 로디지아 공화국을 멋대로 선포하였고 그나마 국경을 접한 보츠와나와 레소토, 에스와티니 등은 딱히 남아공과 대립각을 세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공을 표방하였지만 소련과 중공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큰 걱정은 아니었고 서방국가들도 비록 자신들을 비난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보이콧까지는 아니었다.

앗싸 개꿀이다! 앰흑들 깔아뭉개고 우리 백인들끼리 잘먹고 잘살아 보자! 국제적 고립으로 가즈아-!

그렇게 남아공의 독립과 동시에 고립을 이뤄낸 페르부르트의 말년은 영 좋지 않았다. 워낙 개독 수구꼴통이라(대표적으로 텔레비전을 악마의 선물이라고 지껄여서 남아공엔 1975년에야 TV가 도입됨) 전혀 머국적으로 정치하지 않은 탓에 같은 백인들에게서도 원망과 증오를 사고 말았다.

1960년 영국계 백인 농부였던 데이비드 프렛이 페르부르트의 농업정책에 불만품고 22구경 피스톨로 저격했으나 미수에 그쳤고[11]

1966년 경비원인 드미트리 차펜다스에게 푹찍푹찍 사시미를 뜯겨 과다출혈로 뒈짖하였다. 사후 우상화되어 남아공의 공공시설 등지에 이름이 새겨졌다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름이 지워졌다. 그나마 무덤은 멀쩡하게 남았다.

페르부르트를 죽인 드미트리 차펜다스는 그리스와 포르투갈 혈통의 백인이긴 한데 먼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던 모양인지 외모에 약간 흑형스러운 면이 있었다. 일단 서류상으로 백인으로 분류가 되어 백인들만 이용하는 시설을 쓸 수 있었지만 백인들은 그에 관해 뒷담깐걸 모욕으로 여겨 페르부르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내 몸안에 있는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진술한게 정신질환으로 인정되어서 사형을 면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지 몇년 지나도록(1999년) 정신병원에 평생 수감되어 살다가 죽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실태[편집]

크게 대(大)아파르트헤이트와 소(小)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었다.

대(大)아파르트헤이트[편집]

파일:De466337ae5e70ed871d32c010f09cc983a07911cb15cb455c5e6f5ffeb4b8207f1a977ea4dc32630194acd59c175b8b7848e7e6e3e7eeb0578d8410d946c63f85f444353ce5588e1271d59067d69fb8d4631ee17ed742450cad95521bbf1ac9.gif

위와 같은 짓거리는 페르부르트가 해낸 일이었다. 페르부르트는 이걸 두고 너무나 다른 흑인과 백인이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파렴치한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아프리칸스어로는 퇴위스란트(Thuisland))를 만들어 거기에 흑인들을 몰빵시키려 했다. 저 위의 10개의 반투스탄 중 트란스케이, 보푸타츠와나, 시스케이, 벤다는 남아공에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독립당했다. 물론 전세계는 이들의 독립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다.

말이 홈랜드지 아무것도 없다시피한 황무지에 흑인인구의 과반이 몰렸고 겨우 해내는 산업이라곤 후진 농업과 목축업, 그리고 카지노와 창녀촌이 전부였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남아공의 국민당 정권은 개독에 크게 경도되어 금욕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백인들은 이 홈랜드에 놀러와 카지노서 한탕하고 창녀촌서 흑인 창녀와 포풍섹스를 즐겼다. 왜냐고? 반투스탄은 외국이니까! 덕분에 아비 얼굴 이름 다 모르는 혼혈 사생아들이 넘쳐나게 되어 지금까지도 남아공 사회에 문제가 되었다.

국민당 정권은 이 반투스탄을 두고 "봐라, 앰흑들은 무지몽매해서 저 모양 저 꼴이다."라며 으스대기에 바빴다. 지랄, 그딴 문제를 야기한게 누군데.

소(小)아파르트헤이트[편집]

[1]

결국 흑인들은 일자리(그것도 노동자나 관광업의 시다바리 정도)를 구하려면 "백인들의" 남아공으로 기어들어와야 했는데 함부로 들락날락하는건 절대 아니었고 위와 같은 여권같이 생긴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다. 불응하면? 바로 체포되었다. 소지하고 있어도 백인전용 시설 이용 불가.

"백인 전용. 본 공공시설과 토지는 백인만 사용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어딜가나 저런 안내판들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물론 백인 전용 시설이 흑인 전용보다 상태 좋은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미국도 이런 정책을 해왔다가 68운동과 흑인민권투쟁으로 인해 철폐한 걸 생각하면 남아공은 존나게 역주행한거다.

또한 One-drop rule에 근거하여 혼혈아들이 천시되고 백인과 타 인종간의 결합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타 인종간 통혼이 이뤄졌던 상황이라서 정부에서 신분증에 인종을 명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구분도 상당히 자의적이었다. 피부가 검은 편이면 흑인, 밝은 편이면 백인 이런식으로 ^오^

그외에 인도 등 아시아계도 차별했다. 근데 존나게 골때리는 게 일부 친서방 동아시아 국가 출신들은 명예백인 취급받아 백인과의 섹스와 결혼까지는 못해도 백인 전용 시설은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대표적으로 좆본, 섬짱깨, 홍콩, 마카오, 한국.

특히나 대만 출신 중국인은 아예 백인으로 인정하였고[12] 대만은 아예 아파르트헤이트를 인정하고 지지했다. 둘다 외교적으로 고립된건 마찬가지라 끼리끼리 논 셈이다. 거기다 남아공에 진출한 대만 기업들은 국민당 정권의 도움으로 값싼 흑인 노동력을 제공받아 마음껏 쳐굴렸다. 이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가 막을 내린 후에 좆망을 직감한 대만이 온갖 아양과 사탕발림을 내세웠으나 단교를 막지 못했고 1998년 남아공은 중국과 수교했다.(그리고 지금은 남아공에도 대륙짱깨가 바글바글하다)

일본과 홍콩 사람들도 명예백인 취급을 받았다. 반면 싱가포르는 이런 혜택을 못받고 리콴유도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여 한동안 외교관계가 없었다. 한국도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13] 6.25때 도운 우방국인데도! 거기 방문한 사람들이나 정착해 사는 교민들은 일본이나 대만, 홍콩인으로 착각한 백인정권으로부터 명예백인 취급을 개별적으로 받는 정도였다.

왜 이랬냐면 이들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경제적으로 교류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의 기업 상사원이 방문중 차별받아 피해보면 되려 남아공 지들이 손해니까 그거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는거다 ㅋㅋㅋ 더 가관인건 나중에 가면 해외에 잘나가는 흑인 운동선수나 가수들도 명예백인으로 선전하고 자빠졌다 ㅋㅋㅋ

더불어 흑인들이 줄루족, 코사족[14], 은데벨레족, 스와지족, 부시먼족, 벤다족, 츠와나족 등으로 나눠진 걸 이용해 이들의 갈등을 부추겼지만 백인 정권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이들 부족들은 자기네들끼리의 갈등을 뒤로하고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전선에 한데 모였다.

그렇다면 백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편집]

냉정히 말해, 아니올시다였다.

전술하다시피 남아공 국민당이 내세운 고립주의, 종교 근본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서서히 백인들 사이에서도 정권에 대해 불만이 많았었다.동성애[15] , 음란물, 도박[16], 낙태[17] 등 사회적, 종교적으로 불온하다 판단되는 것들을 모조리 금지시켰고 일요일에는 안식일이라는 하여 백화점이나 극장 등에 대한 휴무를 강제했다.

냉전시대의 흐름에 따라 극단적인 반공을 내세운 것 땜에 같은 백인이라도 좌파나 흑인과 함께하는 운동가들은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유신시절의 머한민국을 뺨친다.

만델라 등 흑인 민권 운동가들을 변호했던 브람 피스허르[18], 역시 흑인들을 위해 투쟁한 루스 퍼스트와 조 슬로보 부부[19]같은 인물들이 그 예. 그 외 딱히 좌파적이지 않은 리버럴한 백인들도 국민당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

애시당초 이 국민당의 정치인들 중 앞서 소개한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발타자르 포르스터 등 거물들이 친나치 조직이던 포장마차파수대(Ossewabrandwag)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나치즘에 빠져들었고 그런 주제에 딱히 이렇다할 처벌도 안 받고 반공 지도자로 변신하면서 권위주의를 내세워가면서 통치했으니 이모양 이꼴난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과 폐지[편집]

흑인들이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이전부터 시민단체로 활약했던 ANC가 흑인 민권을 위한 정치단체로 격상하여 넬슨 만델라 등 많은 흑인 운동가들이 反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벌이게 된다. 일반 흑인 대중들도 시위를 통해 투쟁해나갔지만 번번히 국민당 정권의 앞잡이인 남아공 군경[20]에게 돈좌되었다.

1960년 3월 21일 트란스발 주 샤프빌에서 벌어진 흑인들의 反 아파르트헤이트 시위는 남아공 경찰의 집단발포로 쑥대밭이 되었고 이는 그간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따르던 만델라가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조 슬로보 등과 함께 국민의 창(Unmkhonto we Sizwe)[21]을 조직하여 국민당 정권에 대한 테러와 사보타주를 벌이다 체포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지 직전까지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1976년 7월 16일 요하네스버그 서남쪽 소웨토란 동네에서 다시 시위가 터졌다. 영어 대신 아프리칸스 어만 가르치려는 국민당의 정책이 그 이유였다. 역시 숱한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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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물을 향해 달려가는 중에도 항쟁은 계속 이어졌다.

남아공 마지막 총리[22] 겸 6대 대통령을 역임한 피터르 빌럼 보타. 이 새끼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둘러싼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집권하여 초창기에 대내외에 좋게 보이려고 인종간 결혼금지 폐지정책과 컬러드와 아시아계 의회 개설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건 매한가지였으며, 투표권을 요구하는 흑인들에게 잔혹하게 대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는 등 어마무시한 기만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남아공은 더 힘들어졌다. 영원할 줄 알았던 포르투갈의 앙골라, 모잠비크 지배도 결국 1975년에 종식되었고 로디지아마저 1980년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했다.[23] 안그래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민당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발해서 남아공 항공의 자국의 영공 통과마저 금지때렸던 판국에 남아공 인접국들의 정세 변화는 더더욱 고립을 심화시켰다. 국제적 고립이 더 심해지자 1979년 핵무기 6기를 제조하면서 기어이 핵무장에 나섰다. 레알 북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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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12일, 보타는 국영방송 SABC 텔레비전에서 연설을 통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당시 흑인들의 집회에 무력으로 대응했지만 되려 흑인들의 저항만 거세졌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만델라에게 폭동과 무력행위를 하지 않겠다면, 석방을 고려해 보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명분도 실리도 없는 탄압정책만 계속하다보니 이젠 아프리카너나 영국계나 엥간한 백인들도 지쳐서 언어가 통하는 영국이나 호주, 네덜란드 등으로 탈남아공하기 시작했고[24], 안그래도 정체된 경제는 더 엉망이 되었다. 그간 남아공을 뒤봐줬던 미국과 영국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마당에 같은 반공진영이라도 꼴통이나 진배없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등을 돌렸다. 그 와중에 "큰 악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보타도 1988년 건강이 악화되어 "늙은 악어"라고 존나게 까이게 되자 결국 이듬해 빤쓰런 하게 된다.

보타가 병으로 빤쓰런한 이후 취임한[25]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26]는 유화책으로 돌아서 1990년 만델라를 전격 석방, 협상 과정을 거친 뒤 2년 뒤인 1992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정확히는 만델라와 ANC와 협상을 계속할지)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했다. 문제는 투표힐 떼 백인들만 하도록 되어서 ANC가 반발했지만, 놀랍게도 투표율 85퍼센트에 찬성이 68퍼센트 이상 나오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관짝에 처넣고 대못을 박는 격이 되었다. 그만큼 한 때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했던 백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지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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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1992년 국민투표 당시

어쨌든 유색인종에게도 백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는 법안이 통과되어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1994년에 반투스탄이 해체되고 국민당 정권과 유착하던 흑인 기득권층과 백인 극우층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진압되었고, 동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ANC가 압승을 거두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파르트헤이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폐지 이후[편집]

만델라가 집권하자마자 경찰이나 군대, 기타 공공기관에 근무하던 백인들이 알아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간 흑인들을 핍박하며 살아왔기에 흑인들의 보복을 무척이나 두려워했고 실제 남아공 외부에서도 그런 예측이 나돌았는데, 왠걸? 만델라 가라사대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 그간의 잘못을 솔직하게 자수하면 봐주겠음.

이러면서 되려 남아공 내의 백인들이 떠나려는 생각을 고쳐먹고 남아 경제력을 잃지 않았다.[27] 만델라는 누구와는 달리 백인들과 함께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이런 수를 둔 것이다. 여담으로 한때 500만에 육박했던 백인 인구가 계속되는 인구유출로 인해 430만까지 떨어지...다가 이후 회복해 460만까지 늘긴 했다.

더불어 아직까지 살아있던 아파르트헤이트의 총책임자인 피터르 빌럼 보타에게도 사면을 내렸다. 그래도 청문회에 오라고 했는데 되려 보타가 씹고선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한 조치였다."라고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2006년 90의 나이로 뒈짖했다. 만델라는 그래도 나름 용서하긴 했지만 다른 흑인들과 컬러드 등 혼혈인들은 왜 이제야 뒈지냐며 분통을 터뜨리거나 기뻐했다고.

한편 아파르트헤이트의 주범인 국민당은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다가 백인, 컬러드의 정당인 민주동맹(DA)에 흡수되었다. 나중에 극우 백인들이 재건하긴 하지만 응 원외따리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의 이론을 뒷받침해온 남아공 개신교(네덜란드서 건너온 개혁교회)도 된서리 맞고 뒈짖...하다가 유색인 신자 모으면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여담으로 흑인들은 진작에 카톨릭이나 성공회, 영국의 개신교 일파인 감리교를 믿은 지 오래고 신심도 대단하다. 반면 백인들은 서서히 더 이상 종교에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도 하는 인간도 있지만.[28]

폐지 이후 사반세기 가량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남아공은 나름 흑백간 그럭저럭 지내고 경제도 그럭저럭 발전하긴 했다.

하지만 워낙 반세기 가까이 시행되어 온 애미뒤진 정책때문에 존나게 많은 폐해를 낳게 되고 지금까지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 채로 유산으로 남았다. 여기에 만델라 이후 ANC가 지금까지 오래 집권하는 주제에 병신짓거리만 해댄 탓도 있다.[29]

(좋든 나쁘든 간에) 대표적인 유산으로

1.워낙 백인들 위주로 경제를 꾸려가고 흑인은 앰창인생을 살아가야만 해서 인종간 빈부격차가 장난아니게 벌어졌다. 비록 ANC집권 이후 BEE(Black Economic Enpowerment)라는 흑인 우대정책을 실시해서 어느 정도 흑인 중산층들을 양성해냈지만 성과는 미진한 편이고[30] 되려 백인들이 역차별이라 주장하게 했다.
2.19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올림픽, 월드컵에 예선조차 못나가는 바람에 스포츠 수준이 개판이다. 축구의 경우 FIFA 랭킹도 아프리카에서 중하위권에 머무르는 수준이고 2010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개최국 최초로 16강 진출 실패라는 좆같은 기록만 세웠다.
3.대표항공사인 남아프리카 항공이 A340이나 보잉 747같은 대형기 위주로 굴러갔는데 이게 다 아파르트헤이트 때문. 타 아프리카 국가들이 영공 통과를 허용 안해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려면 대서양으로, 아시아나 호주로 가려면 인도양으로 우회해서 가야했던게 그 이유였다.
4.지금은 거의 안쓰는 석탄액화기술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남아공에 대한 제재로 인해 석유조차 마음껏 수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5.무기도 자체적으로 개발해야만 했다. 서방이고 공산권이고 남아공에 이렇다할 무기 하나 주지 못하긴 해도 그래도 남아공 백인이 배운 것도 있고 상대는 AK-47정도나 다루는 흑인들이 전부라서 가능한 일이다. 국토는 적은 인구(그것도 백인만)에 비해 엄청 넓어서 이스라엘 비슷하게 생존성에 무게를 두었다.

각주

  1. 보어(Boer)인의 어원이 여기서 나왔다. 농부라는 뜻
  2. 이들 중에 와인 제조업자들도 있어서 오늘날 남아공은 와인시장에서 한가닥 하는 나라다.
  3. 짐바브웨 이전 로디지아라는 나라가 이 새끼의 이름을 딴 거다. 잠비아도 원래 이름이 북로디지아였다. 지랄염병이지.
  4. 이 시기 참전한 윈스턴 처칠도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바 있다.
  5. 지금도 보어인과 나중에 들어온 영국계 백인과의 사이는 서먹서먹한 편이고 노년층은 더 심하다고
  6. 사실 에티오피아 말고도 한국에 파병한 아프리카 국가가 남아공이었다. 공군 비행기 몇 대 보냈다고 함
  7. 이 좆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건 게리맨더링 때문이다. 득표율은 밀려도 선거구를 많이 차지하기만 하면 장땡이니까
  8. 참고로 이새끼 2차대전때 친나치 활동벌이다 콩밥먹었다
  9. 이전까지는 주민들이 뽑는 남아공 총독이 영국 국왕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본토에서 의례적으로 인정해왔는데 마지막 총독인 찰스 로버트 스와트는 여왕 좆까하며 충성맹세따위 스킵해 보어인들의 지지를 받고 훗날 초대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다. 이 당시 남아공은 의원내각제라 대통령은 그냥 의전상 높으신 분이고 그 전부터 총리였던 페르부르트가 유임하여 북치고 장구치는 체제였다.
  10. 독립 전에 영국의 총리였던 해롤드 맥밀런이 남아공을 방문해 페르부르트가 있는 자리에서 남아공,시대가 변화하는데 자꾸 그러면 재미 못본다 하고 일장연설했다.
  11. 프렛은 즉시 체포되어 정신병 판정받고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자살했다.
  12. 다만 중국대륙 출신 중국인은 유색인종 취급 ^오^
  13. 거기다 여행제한국가 딱지
  14. 넬슨 만델라가 코사족, 그것도 부족장 집안 출신이다.
  15. 이미 이 당시 남아공은 개독이 좌지우지하던 동네라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탄압받았다. 어떤 식이였냐면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서 "치료"를 받고 만일 미진하다고 "판정"받은 게이는 강제로 성전환수술 받고 레즈비언은 교정강간을 각오해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여당이 된 ANC(아프리카 국민회의)는 국민당에게 탄압받은 모든 이들은 우리의 형제라는 모토로 1996년 동성애 처벌법을 폐지했다. 아, 물론 남아공 내에서 동성애가 딱히 좋게 취급은 받지 못한다. 아프리카 치곤 낫다지만.
  16. 그래서 백인들이 반투스탄에 놀러간 거다
  17. 1996년 낙태죄 폐지한 이후 남아공서는 13주 이내에 본인선택에 의해서, 그 이후는 건강상 이상이 있을 경우에 한해 낙태가 허용된다.
  18. 이 양반은 가히 천룡인급 아프리카너임에도 불구하고 만델라와 함께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남아공의 거물 정치인의 후손인지라 추방과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 제의를 한 국민당 정권에게 답하길 "나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너이고, 나의 조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내 정부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내가 조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옥사했고 남아공 내 백인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19. 루스 퍼스트는 무려택배를 받고 끔살당하고 조 슬로보는 개처럼 고생하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만델라 아래서 장관이 되었지만 오랜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
  20. 이 당시 사진이나 영상 보면 흑인들도 간간히 보이는데 6,70년대부터 흑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긴 했는데 대개 잡졸이나 하사관 정도였다. 땅은 넓은데 인구가 모자라다보니 이렇게 된 거다. 오늘날 남아공 군대와 경찰은 이 시절부터 복무한 흑인들이 고위직을 차지한 반면 백인들의 비중은 점점 줄다 못해서 거의 없다시피한다.
  21. 흑인들만 참여하던 ANC와 달리 이 조직은 진보적인 백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22. 1984년 헌법을 수정하여 의원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고치면서 총리직을 폐지. 그리고 지가 대통령이 되었음
  23. 근데 문제는 권좌에 오른 새끼가 하필...
  24. 조상이 라틴계인 사람들은 스페인이나 중남미로도 갔고 냉전 종식 이후 심지어 러시아나 조지아로 갔다. 주로 농업 이민으로
  25. 정확히는 얀 크리스티안 회니스가 권한대행으로 2개월 역임한 후에 취임했다.
  26. 고모부가 저 위에서 서술한, 아파르트헤이트에 일조한 스트레이돔 총리라고 한다.
  27. 물론 지금도 교외의 백인 농장주가 흑인들을 부려먹다가 보복살해당하는 일이 잊을만 하면 터지곤 한다.
  28. 자녀가 페북쓰는 것도 금지한단다
  29. 만델라는 1번만 대통령하고 비교적 훌륭한 업적 남기고 물러났는데 후임인 타보 음베키나 제이콥 주마 등은 병신짓만 일삼다 제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퇴갤했다. 심지어 주마는 닭근혜마냥 개짓거리하다 탄핵 위기에 몰렸는데 닭과 달리 알아서 그 전에 빤쓰런 했다.
  30. 더군다나 경제 개판된 짐바브웨 등 주변국에서 오는 흑인 노동자가 바글바글하는 바람에 취업난이 장난아니게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