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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재앙의 시작== {{재앙}} 1948년, 운명의 총선이 치러지는 때,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득표율에서 11.5%나 밀렸지만(49.2% VS 37.7%) 반대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 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연합당을 5석 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기어이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였다.<ref>이 좆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건 게리맨더링 때문이다. 득표율은 밀려도 선거구를 많이 차지하기만 하면 장땡이니까</ref> 그리고 남아공에 헬게이트가 펼쳐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파일:DFMalanPortret.jpg]] 총선에서의 승리로 총리가 된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ref>참고로 이새끼 2차대전때 친나치 활동벌이다 콩밥먹었다</ref>. 이새끼가 한 일으로 인종간 혼인 금지법(1949), 배덕법(흑백간 성관계 금지)(1950), 인종별 시설 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 등 이 있고 이로 인해 흑백혼혈 가정들이 박살나고 백인들도 흑인 창녀와 섹스하다 걸려 철창신세지는 등 반발이 끊이질 않았지만 응 좆이나 까잡숴 하고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총선에서도 이겨 정권재창출을 이뤄내었고. [[파일:JG Strijdom.jpg]] 말란 후임으로 총리가 된 요하너스 스트레이돔은 유색인종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박탈시키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도 존나게 지저분한게 법을 통과시키려한 걸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의 의석이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 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는 동안 야당인 연합당은 국민당에 밀려 만년 야당 쩌리 신세가 되었고 빡친 몇몇 의원들은 진보당으로 탈당하고 나탈 주만 간신히 건져내는 2019년 현재 자한당 수준에 머물렀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는 그때까지 남아공 국민당은 좆본의 자민당마냥 존나게 폭주했다. [[파일:Hendrik Verwoerd official photo 1958.jpg]] 스트레이돔이 지병으로 사임(하고 얼마안가 뒈짖)한 후로 헨드리크 페르부르트가 총리가 되었다. 이 새끼야말로 아파르트헤이트에 쐐기를 박아 남아공이 욕받이가 되는 원흉이다. 우선 보어인이 영국계보다 젊은층의 비중이 큰 걸 노려서 선거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당시 남아공의 속령이었던,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를 남아공의 한 주로 편입시켜 그곳의 살던 보어인들을 끌어모았고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등 통과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너의 평생의 숙원이던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1961년 영연방을 이탈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수립했다.<ref>이전까지는 주민들이 뽑는 남아공 총독이 영국 국왕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본토에서 의례적으로 인정해왔는데 마지막 총독인 찰스 로버트 스와트는 여왕 좆까하며 충성맹세따위 스킵해 보어인들의 지지를 받고 훗날 초대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다. 이 당시 남아공은 의원내각제라 대통령은 그냥 의전상 높으신 분이고 그 전부터 총리였던 페르부르트가 유임하여 북치고 장구치는 체제였다.</ref>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누그러지는 마당에 역주행하는 남아공에 넌더리난 영국이 그래 잘 꺼져 해서 독립되었고<ref>독립 전에 영국의 총리였던 [[해롤드 맥밀런]]이 남아공을 방문해 페르부르트가 있는 자리에서 남아공,시대가 변화하는데 자꾸 그러면 재미 못본다 하고 일장연설했다.</ref> 1960년대 초 아프리카의 국가 대부분이 독립되는 그때부터 고립이 시작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흑인 국가들은 남아공을 보이콧하였다. 스포츠에서도 왕따신세라서 FIFA에서 1954년에 IOC에서 1970년에 각각 추방당했다. 그러니까 월드컵, 올림픽 다 못나간다는 소리다. 그나마 럭비대회 정도나 참가하긴 했지만. 페르부르트는 이런 국제적인 고립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직 가까이에 포르투갈이 식민통치하고 있던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있고 북쪽의 영국 식민지였던 로디지아 땅에 이언 스미스라는 영국인이 한줍도 안되는 백인들 데리고 로디지아 공화국을 멋대로 선포하였고 그나마 국경을 접한 보츠와나와 레소토, 에스와티니 등은 딱히 남아공과 대립각을 세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공을 표방하였지만 소련과 중공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큰 걱정은 아니었고 서방국가들도 비록 자신들을 비난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보이콧까지는 아니었다. 앗싸 개꿀이다! 앰흑들 깔아뭉개고 우리 백인들끼리 잘먹고 잘살아 보자! 국제적 고립으로 가즈아-! 그렇게 남아공의 독립과 동시에 고립을 이뤄낸 페르부르트의 말년은 영 좋지 않았다. 워낙 개독 수구꼴통이라(대표적으로 텔레비전을 악마의 선물이라고 지껄여서 남아공엔 1975년에야 TV가 도입됨) 전혀 머국적으로 정치하지 않은 탓에 같은 백인들에게서도 원망과 증오를 사고 말았다. [[파일:200px-Assassination attempt on Hendrik Verwoerd 2.jpg]] 1960년 영국계 백인 농부였던 데이비드 프렛이 페르부르트의 농업정책에 불만품고 22구경 피스톨로 저격했으나 미수에 그쳤고<ref>프렛은 즉시 체포되어 정신병 판정받고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자살했다.</ref> [[파일:Verwoerd geskiet.jpg]] 1966년 경비원인 드미트리 차펜다스에게 푹찍푹찍 사시미를 뜯겨 과다출혈로 뒈짖하였다. 사후 우상화되어 남아공의 공공시설 등지에 이름이 새겨졌다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름이 지워졌다. 그나마 무덤은 멀쩡하게 남았다. [[파일:Dimitri t.jpg]] 페르부르트를 죽인 드미트리 차펜다스는 그리스와 포르투갈 혈통의 백인이긴 한데 먼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던 모양인지 외모에 약간 흑형스러운 면이 있었다. 일단 서류상으로 백인으로 분류가 되어 백인들만 이용하는 시설을 쓸 수 있었지만 백인들은 그에 관해 뒷담깐걸 모욕으로 여겨 페르부르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내 몸안에 있는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진술한게 정신질환으로 인정되어서 사형을 면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지 몇년 지나도록(1999년) 정신병원에 평생 수감되어 살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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