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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치연혁 == [[발해]]멸망이전까지 연혁은 알 수 없다. [[고려]]초 군의 전신인 영원진(寧遠鎭)이 설치되었는데 1041년 [[최충]]에 의해 영원성이 축성되었다. 하지만 고려 중후기 치소가 [[평원군]]으로 옮겨졌다. 이후 1396년 영청에 합해져 영녕현(永寧縣)으로 불리다가 1466년에 원래위치로 돌아가 군이 설치되고 그대로 진이 설치되었다. 1525년 군의 치소를 남쪽 소초역(所草驛)으로 옮기고 잉목진(仍木鎭)으로 칭했다가 이후 몇차례 치소가 옮겨졌다. [[정묘호란]]이후 1633년 둔전이 설치되었고 1684년 청성부원군 [[김석주]]의 요청에 따라 영성진이 되었다. 하지만 폐단때문에 2년도 안되서 진이 폐지되고 영원둔으로 재설치되었다가 1686년 국방의 요지라고 하여 독진으로 격상되고 첨사가 파견되었다. 1823년 영성진이 폐지되고 군수가 행정을 보게 되었다. 1895년 군으로 승격되면서 치소가 성룡면 고읍성에서 영원면지역으로 옮겨졌다. 1896년 4등군으로서 [[평안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군면리 대폐합]]당시엔 별 일이 없었고 1917년 쾌락면 + 영청면 = 영락면이 되고 읍내면이 영원면이 되었다. 북괴치하로 잠시 넘어갔다 [[6.25 전쟁]]초기 [[국군]]이 북진함에 따라 [[대한민국]]에 수복되었고 [[유재흥]]이 지휘하는 [[8사단]]이 주둔했다. 하지만 거대한 땅덩이를 1개 사단에게만 맡긴 결과 전선 곳곳에 구멍이 생겼고 결국 이 구멍을 파고든 중공군의 기습으로 8사단은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맥아더]], [[월튼 워커]], [[유재흥]]중 누가 저딴 병신같이 전력을 배치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평안남도지역 상당부분을 수복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거대한 면적, 그 면적에 걸맞지 않게 매우 비좁은 평지와 산악지대 때문에 포기할 법도 한데 문제는 여기서 동쪽으로 산 넘어가면 바로 동해안에 위치하고 또 하필이면 평야지대라 방어에도 불리한 [[정평군]]이고 정평이 따이면 함흥을 포함해 [[함경도]] 전체가 좆되는 터라 함흥과 함경도 전체를 지키려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를 제대로 지키려면 여기 북쪽의 평안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해발 2000m 급의 고지들<ref>묘향산(1909m), 천쾌산(1927m), 낭림산(2014m), 웅어수산(2019m), 동림산(2096m), 소백산(2184m) 등등 </ref>을 반드시 확보해야 되기 때문에 휴전 직전까지 강원도 산동네에서 벌이는 고지전 따윈 좆밥으로 보이는 미친 [[고지전]]으로 피똥을 쌌을 것이다. 암튼 [[청천강 전투]]이후 북괴군이 수복하게 되었다. 북괴가 수복한 뒤 1952년 [[군면리 대폐합]]때 성룡면, 대흥면, 소백면, 신성면, 온화면 5개리, 덕화면 3개리, 금성면 2개리를 스까해 대흥군을 신설했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심화조 사건]]당시 [[뽀그리우스]]에게 숙청당한 사람들의 유가족들을 기존 [[개천#정치범수용소|북창 수용소]]에 넣을려다가 수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되니까 대흥군에 새로 [[정치범수용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심화조 사건이 끝난뒤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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