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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 예천군지역 === ==== 예천읍 ==== 면적 47.38㎢, 1914년 동읍면 7개리, 남읍면 4개리, 서읍면 5개리등 자잘한 지역들을 마개조해서 만들어졌다.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대의 사찰이었는데 탑만남은 개심사, 동본리의 삼층석탑, 석조여래입상, 동악사석조비로자나불상, 덕봉산흑응산성, 대심리 고분군, 백전리 석실고분, 예천향교, 신천서원과 청단놀음 궁도, 통명농요등 즈언통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2015년에는 전체인구가 1만 7337명이었는데 2017년 12월 31일 인구조사기준으로 1만 6413명으로 인구가좀 줄었다. 지내리에 뚜또 본사가 있다. 남본리? 쪽에 예천에서 가장 큰 골목 시장이 있다. 물론 젊은이들 놀 것은 없고 어르신들이 놀 것 위주로 있다. 여기 먹자골목이 있어서 주변 상점 분위기가 꽤 좋다. 이외에도 예천농협, 축협 등이 있고 '한천' 이라는 천이 흘러 틀딱들이 조깅 정모를 가지기도 한다. 우리 할아버지 피셜로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이 주변에 우흥~ 하고 우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쪽이 소백산 바로 밑에 있고 당장 그곳도 '남산' 이라는 꽤 높은 산 아래에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천 주변에 큰 운동장이 하나 있다. 이외에도 낡은 아파트들, 예천초/중/여중/고/여고 가 있는 예천의 중심이다. 다만 최근은 도청신도시가 생기며 인구가 줄어드는 편. ==== 감천면 ==== 면적 65.03㎢, 인구 2,888명. 원래 감천현이라는 독립된 현으로서 [[안동]]의 월경지였는데 1895년 예천군으로 옮겨졌다. 1914년 보문면에서 일부지역을 편입했다. 구릉성산지(동부, 남부)와 소백산맥으로 이뤄진 산악지대, 내성천으로 생긴 충적평야로 구성되있다. 덕율리에 천문관과 예천어린이우주과학관, 관현과천향리일대에 예천온천이 있다. ==== 개포면 ==== 면적은 36.24㎢, 인구 1,728명. 면소재지인 신음리가 이상한 이름을 가진 지명 드립이 돌때 조명된 적이 있었다. 1914년 용궁군의 북상면을 스까해서 만들어졌다. 북부<ref>100m이하의 구릉지대.</ref> 와 남부<ref>200m의 구릉성산지.</ref> 간의 고도차이가 큰편에 속한다. 면남쪽에 내성천이 있긴한데 남쪽에 있는 구릉지대때문에 범람원은 좁은편이다. 신안주씨 집성촌이 있다. ==== 보문면 ==== {{석기시대}} 면적은 64.83㎢, 인구 1,777명. 1914년 승도면, 동음면의 일부, 감천면의 일부를 스까해 본면에 있던 보문사라는 절의 이름을 따 보문면이 되었다. 내성천 이북지역은 사실상 서로 월경지이고 내성천 이남의 경우 남쪽에는 학가산, 보문산의 산악지대로 구성되어있다. 내성천외에도 지류인 옥계천이 흘러서 남서쪽경계에 집단범람원을 이루고 있지만 전체면적에서 경지면적은 20.4%밖에 안되고 임야가 68.2%이다. {{인용문|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논문과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 · 충북 단양 · 경기 · 강원 지역 폭격사건 조사보고서 등은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 확산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 ...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 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초, 미 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김태우, 폭격중}} 1951년 1월 [[미국|갓조국]]의 [[에드워드 알몬드]]쉐프님은 보문면 산성리에 공산군이 진격할 것이라 예상, 초토화작전을 목적으로 18대의 폭격기를 산성리에 보냈다. 이 18대의 폭격기는 [[네이팜탄]]으로 산성리를 고온의 열기로 불살라주셨고 이에 130명의 민간인을 [[지쟈스]]곁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문제의 공산군은 산성리 근처에도 가지 않아 애먼 양민들만 죽는 꼴이 되었다. 이로인해 알몬드 쉐프님의 부하였던 7사단장 데이비드 발 장군이 중지를 날리고 [[뉴욕타임스]]도 어 이건좀...하고 미 8군과 제5공군도 자체조사를 할 정도로 대형사고가 되고 말았다. ==== 용문면 ==== 면적 71.27㎢, 인구 2,540명. 1914년 맛질의 이름을 딴 저곡면과 유리동면이 통합되고 용문사의 이름을 따 용문면이 되었다. 북부의 산지와 남부의 구릉지+평지로 구분되는데 평지에는 한천이 동부를 흐르면서 남부에 넓은 평야를 형성한다. 지금도 용문사는 잘만 남아있고 청룡사도 있다. ==== 유천면 ==== 면적은 38.72㎢, 인구 2,897명. 1914년 유등천면, 당동면, 지서아면이 스까되어 만들어졌다. 남부의 구릉성산지와 북부의 그냥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산간침식분지지형으로 한천의 지류인 유천(柳川)이 북부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류, 하계망을 펼쳐 산지를 개석하고 있다. ==== 호명면 ==== {{신분상승}} 면적 62.32㎢. 인구 9,463명. 2015년에는 2,669명밖에 안되는 깡촌이었는데 인근에 있는 풍천면으로 도청이 옮겨지고 본면에도 도청신도시가 건설되어 인구가 늘고 있다. 당연히 발전되는 곳인지라 착실히 인프라가 쌓여서 기존 예천군 읍내인 예천읍보다도 인프라가 더 좋아지고 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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