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유득공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개요 == {{인용| ...그러나 끝내<발해사> 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 <발해고> 서문 中 - }} {{인용|“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中 - }}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이다. 서얼 출신임에도 정조의 중용에 힘입어 3사 언관직에 준하는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유학자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주로 시인, 역사연구가로 활동하였다<ref>조선 학자들이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글짓기(사서)보다는 성리학 경전 읽기(경학)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 후기에 유득공 같이 시인이나 역사연구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17C-18C를 거치면서 조선에 학문적, 사상적 경향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ref>. 발해사를 민족사로 인식하여 최초로 남북국시대라는 말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