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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곤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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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드립허용}}{{고인}}{{매국노}}{{친일파}}{{천수누린새끼}} {| class="wikitable" border="1" rules="none" |- |align="middle" colspan=2|[[파일:Lee Jae-gon Portrait.jpg|300픽셀]]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 colspan=2|<big>'''이재곤(李載崑)'''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이명''' | 아호 동원(東園)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출생''' | 1859년 4월 8일 [[조선]] [[경기도]] [[양주시|양주]]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사망''' | 1943년 7월 11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가족''' | 아버지 이신응, 형 이재완, 차남 이원용, 삼남 [[이관용]]<ref>정미칠적인 이새끼와 달리 이관용은 독립운동가이다.</ref>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본관''' | [[전주 이씨]]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학력''' | 1880년 증광시 급제. |- |align="middle" style="background:#1C1C1C;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소속''' | 종친, 관료, 권신, '''[[정미칠적]]''' |- |} == 개요 == [[이완용]], [[송병준]], [[박제순]]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지옥의 20세기]]의 신호탄을 쏴제낀 개씨발새끼중 한명이다. 프로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종친에 금수저라서 과거 급제이후 승정원 가주서(1880~1882.6), 홍문관 교리(1882.6~1886), [[거창군|거창부]]사(1886), 동부승지(1891.8 ~ 1895.5), [[진주시|진주부]]관찰사(1895.5 ~ 1895.8), [[공주시|공주부]]관찰사(1895.8~1896.8), 비서원승(1896.8 ~ 1898.1)까지 엄청나게 많은 관직을 존나 빨리 거쳐 올라가면서 권신으로 성장했고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의 마누라 여흥대부인이 죽었을 때 장례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후 태복사장, 내부폅판, 의정부 찬정, 회계원경, 홍문관 학사 + 평식원 총재, 궁내부 특진관, 관제 이정 의정관, 내장사장, 중추원 찬의, [[경상북도]]관찰사, 제실회계 심사국장등 엄청난 요직들을 거쳐가는 거물로 까지 올라갔다. 이때까지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대한제국이라는 이름과 건양이라는 연호를 추천하는등 왕의 환심을 사는데 모든것을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답도없이 무너져내리니까 태세를 전환해서 1907년 5월 [[이완용]]내각이 만들어졌을 때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지 직속상관이랑 같이 [[고종 (대한제국)|왕]] [[순종|갈아치우기]] + 군대해산을 동반하던 한일신협약체결에 적극 협력했고, 이때문에 정미칠적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에 [[일본 제국]]의 똥꼬를 열심히 빨아제낀 덕분에 훈1등 욱일대수장(1907.10.18), 대한제국 훈1등 팔괘장(1907.9.7), 태극대수장(1907.10.25)을 받았고 1907년 12월 27일에는 종1품으로 가자되었다. 1907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 제국의 후장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빨아제끼면서 [[의병]]활동을 하던 유림들을 구워삶기 위해 만들어진 대동학회의 활동을 지원했고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박제순]]등과 함께 한자통일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경술국치]]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1911년 1월 13일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한국병합기념장(1912.8.1), 대례기념장(1915.11)<ref>[[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여해서 받았다.</ref> 를 받고 1912년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그리고 1910년 10월 1일부터 1920년 5월 10일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내고 1917년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었다. [[3.1 운동]]때는 정미년때 보여준 태세전환력을 이용해서 탈줗해볼려고 작위반납을 시도했다가 빠꾸를 먹자 바로 이전까지 했던 좆본 부역자일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쇼와대례기념장(1928.11)을 받았고 정4위(1925.12), 종3위(1933.12.28)에 승서되었다. [[중일전쟁]]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출석하고 1939년 11월 어용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7월 11일, 8死세의 나이로 자연사해서 뒤져버렸고 그의 작위는 손자 이해국이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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