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이재곤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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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들도 죽창과 발터에는 한방이무니다. 죽창...죽창을 가져와라데스...
파일:Latest?cb=20120929182437.jpeg 이 대상은 천수를 누린 쓰레기들입니다!!
이새끼들은 죽을죄를 저질러 놓고 풍요롭게 살다간 인간말종들입니다.
이런 새끼들은 하루 빨리 부관참시를 시전합시다.
파일:Lee Jae-gon Portrait.jpg
이재곤(李載崑)
이명 아호 동원(東園)
출생 1859년 4월 8일 조선 경기도 양주
사망 1943년 7월 11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가족 아버지 이신응, 형 이재완, 차남 이원용, 삼남 이관용[1]
본관 전주 이씨
학력 1880년 증광시 급제.
소속 종친, 관료, 권신, 정미칠적

개요[편집]

이완용, 송병준, 박제순등과 함께 지옥의 20세기의 신호탄을 쏴제낀 개씨발새끼중 한명이다.

프로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종친에 금수저라서 과거 급제이후 승정원 가주서(1880~1882.6), 홍문관 교리(1882.6~1886), 거창부사(1886), 동부승지(1891.8 ~ 1895.5), 진주부관찰사(1895.5 ~ 1895.8), 공주부관찰사(1895.8~1896.8), 비서원승(1896.8 ~ 1898.1)까지 엄청나게 많은 관직을 존나 빨리 거쳐 올라가면서 권신으로 성장했고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의 마누라 여흥대부인이 죽었을 때 장례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후 태복사장, 내부폅판, 의정부 찬정, 회계원경, 홍문관 학사 + 평식원 총재, 궁내부 특진관, 관제 이정 의정관, 내장사장, 중추원 찬의, 경상북도관찰사, 제실회계 심사국장등 엄청난 요직들을 거쳐가는 거물로 까지 올라갔다. 이때까지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대한제국이라는 이름과 건양이라는 연호를 추천하는등 왕의 환심을 사는데 모든것을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답도없이 무너져내리니까 태세를 전환해서 1907년 5월 이완용내각이 만들어졌을 때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지 직속상관이랑 같이 갈아치우기 + 군대해산을 동반하던 한일신협약체결에 적극 협력했고, 이때문에 정미칠적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에 일본 제국의 똥꼬를 열심히 빨아제낀 덕분에 훈1등 욱일대수장(1907.10.18), 대한제국 훈1등 팔괘장(1907.9.7), 태극대수장(1907.10.25)을 받았고 1907년 12월 27일에는 종1품으로 가자되었다. 1907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 제국의 후장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빨아제끼면서 의병활동을 하던 유림들을 구워삶기 위해 만들어진 대동학회의 활동을 지원했고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박제순등과 함께 한자통일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경술국치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1911년 1월 13일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한국병합기념장(1912.8.1), 대례기념장(1915.11)[2] 를 받고 1912년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그리고 1910년 10월 1일부터 1920년 5월 10일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내고 1917년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었다. 3.1 운동때는 정미년때 보여준 태세전환력을 이용해서 탈줗해볼려고 작위반납을 시도했다가 빠꾸를 먹자 바로 이전까지 했던 좆본 부역자일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쇼와대례기념장(1928.11)을 받았고 정4위(1925.12), 종3위(1933.12.28)에 승서되었다. 중일전쟁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출석하고 1939년 11월 어용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7월 11일, 8死세의 나이로 자연사해서 뒤져버렸고 그의 작위는 손자 이해국이 물려받았다.

  1. 정미칠적인 이새끼와 달리 이관용은 독립운동가이다.
  2.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여해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