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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 그리고 어떤 좆문가새끼들은 과학이 발달 어쩌고 하는데 과학의 발달이 늦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시아에 넘어온 과학기술들을 급속도로 개량한 것도 중세 유럽이었다. 종교적 교리에 의해 움직이긴 했으나 우리가 흔히 알듯이 자연철학(당시엔 과학자들을 자연철학자라 불렀다.)을 탄압한 것도 아니었다. 중세 중기까지는 실험 시설을 죄다 수도원에서 진행했는데 과학을 탄압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구는 돈다 이지랄은 후세 창작이었고, 갈릴레이가 실험한 장소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도 수도원 안의 탑이다. {{인용문|"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br>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벨라르미노 추기경'''}} 천동설 지동설 논란도 현재로 치면 "기존의 A이론과 현재 새로이 발표된 B이론 중 어디가 맞는가"로 논의가 있었던 거였다. 상대성 이론이 처음에는 "니미 씹 개소리 자제좀."이라고 했지만 후에 증명이 이루어 지며 인정 받듯이, 초기엔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쪽으로 나가며 결국 중세 후기의 자연철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계산에 성공하면서 천동설은 폐기 되었다.<ref>당시 갈릴레오가 말년에 종교재판을 받은 적은 있다. 근데 그건 당시 종교개혁이 불타오르며 "씨발 좌빨새끼들이 교회를 뒤집어 엎으려 하네?"라며 골머리를 앓던 교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건 1633년인데, 지동설이 옳다는 걸 발표하고 교황청이 대학자를 직접 로마로 초빙한게 1610년이었다. 만약 지동설이 진짜 교회에서 좆같이 여겼다면 한동안 "캬 갈릴레오님 지리구여. 님 존나 똑똑한듯."이라며 개빨아주다 20여년이 지나서 깜빵을 쳐넣을 리가 있을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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