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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의외로 헬조선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 ~ 한사군 === [[고조선]]의 왕검성이 [[평양직할시|평양]]에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의 [[한무제]] 때 멸망하고 [[한사군]] 중 하나였던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 ~ 고려=== 그러다가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쓸어버리고 [[장수왕]] 때는 국내성에서 [[평양직할시|평양]]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와 [[신라]]의 사이에 껴서 완충지대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고려]]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키워준 덕분에 한동안 다시 성장했고 제2의 도시 지위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1135년 [[묘청]]의 난을 통해서 본격적인 지역 차별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순수하게 평안도만 차별 받았는데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서북이라는 이름으로) 개성까지 차별 영역이 넓어진다. 고려의 수도였던 게 뭔 죄라고. ===조선 왕조=== {{지역감정}} ㄴ 조선 시대에는 가장 심한 차별을 겪은 지역이다. [[서북인-기호인 관계]] 참조 ㄴ 그런데 일종의 전화위복인지, 관직을 못 나가니까 그 대신에 다른 걸 많이 하면서 돈 만지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농공상' 중에서 '공상'이 8도 중에서 제일 왕성했다. 덕분에 이북 요리 레시피 보면 식재료의 클래스가 ㅎㄷㄷ 하다. 다만 이 조선 왕조가 평안도가 돈 많다고 애국심을 츄라이하더니 세금도 마이 거두어갔더랬디. {{인용문|평안도는 맹호출림(猛虎出林, 숲에서 나오는 사나운 [[호랑이]])|[[정도전]]}} {{인용문|[[태조(조선)|태조]]가 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 까닭에 이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없으며 벼슬에 오른 자가 있어도 현령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택리지}} 한마디로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절대 요직에 앉히지 말라." {{인용문|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요하게 여겨 [[사대부]]는 서북 지방의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삼지 않았다.|택리지}} {{인용문|서북양도(평안도, [[함경도]])<ref>평안도의 이명이 관'서'고 함경도의 이명이 관'북'이라서 서북양도라고 부른다. 넓게 잡으면 황해도(해'서')까지 넣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황해도은 중부지방이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평안도랑 세트로 묶여서 차별당했다.</ref> 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가 거기로 가서 살지 않는다.|택리지}} {{인용문|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왕조|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 양반들은 매우 적고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 그들을 [[조선 왕조|왕조]]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샤를르 달레의 조선 교회사}} {{인용문|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똥]] 땅(糞土, 분토)과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홍경래]]의 격문}} [[조선 왕조|조선]]에서는 북쪽 사람들의 등용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았고 급기야 [[홍경래]]를 필두로 평안도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전쟁터에는 항상 제일 먼저 내보내면서 평안도 출신의 장군 한 명도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던 당시 현실이란... 얼마나 평안도에 대한 지역드립이 심각했으면 [[홍경래]]가 타지의 노비들마저 평안도 사람들을 놀린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이니 조선시대의 국교나 마찬가지였던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서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라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국에서 양반 집안이 제일 적은 곳이 여기였다. === 일제강점기 이후 === {{인용문|서울의 잘 알려진 가문에서 [[평양]] 출신의 사위를 맞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이다.|[[윤치호]]}} {{인용문|신사적 기호, 비열한 서북(평안도, [[함경도]]). [[지역감정]] 하나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윤치호]]}} {{인용문|[[안창호]] 曰 "[[일본인]]들을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 동안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윤치호]]의 일기}}<ref>다만 이건 주작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그만큼 지역감정이 심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ref> 그 지역 감정은 [[일제강점기]] 때도 이어졌고 결국 [[한국전쟁|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조선 왕조]]가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쪽에서는 여전히 [[소중화사상]]에 빠진 [[유교탈레반]] 씹[[선비]]들이 [[만동묘]]를 만들고 [[정신승리|정신 딸딸이]]나 칠 때 [[북한]]쪽은 차별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때 자강운동이 발달했고 근대화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실제로 [[함경도]] 다음으로 잘 사는 곳이 이곳이었다. 평균 신장도 [[함경도]]가 [[동북 아시아]]에서 제일 컸고 그 다음이 [[평안북도]]였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이때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 지방의 별명이 동양의 [[덴마크]]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식민지 수혜론]] 같은 개소리에 빠지지 말자. 기독교도들에게 미친 듯이 빨리던 곳이었다. 주로 [[평양]], [[개천]], [[안주]], [[선천]],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서 돈 좀 있는 개화파들만 믿어서 1949년 북괴의 종교인 인구 조사 기준으로 20만도 채 안 되기는 했지만... 그 조사에 따르면 실제 평안디언들이 가장 많이 믿은 종교는 [[천도교]](150만), [[불교]](35만)이었다. 기독교는 20만, 천주교는 12만 5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빨갱이]]들이 원래부터 기독교를 극도로 혐오했고<ref>[[소련|쏘오련]]부터 공산화 직후 [[러시아 정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을 정도로 빨갱이들의 혐기독교 정서는 무시무시했다.</ref> 평안디언의 반인반신급이었던 애국보수 [[조만식]]이 혹부리우스랑 반목을 텄기 때문에 개독, 천주교 인사들은 북괴 치하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고 [[1.4 후퇴]] 때 대다수가 월남했다. 하지만 천도교도들도 빨갱이가 좆 같은 건 마찬가지라서 1.4 후퇴 이후에도 북한에 남은 기독교도들과 함께 [[치안대]]로 활동하면서 혹부리우스의 암살을 노리기까지 하는 등 공산군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8월 종파사건]] 때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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