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프랑스 대혁명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결과 및 의의 == 나폴레옹이 비록 유배를 가서 독재는 끝났지만, 이후에도 프랑스의 죽창은 아직 날카로웠기 때문에 유럽의 국가들은 이를 무서워하였다. 그리하여 혁명 뽕에서 [[하일성|역으로 가는]] 복고주의, 보수주의가 싹트는데 이걸 [[오스트리아]]가 주도했고 이러한 체제를 [[빈 체제]]라고 한다. 존나 잘생긴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가 1814~1815년 빈 회의에서 이끌었다. 프랑스를 견제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혁명 후 19세기의 이야기이이고 혁명의 의의로는 경제적으로는 봉건제도의 폐지와 함께 시장경제 및 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전제왕권이 시민계급(부르주아이다)에 의해 타도되고, 권력이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귀족들은 살기 위해 자신들에게 죽창을 찔러댔던 부르주아와 결탁하여 다시 사치를 부리게 된다. 그리고 이 귀족들은 1848년 혁명으로 다시 박살나게 된다. 사회 전반으로는 악폐습과 불평등이 해소되기도 했다. 아 물론 여성이랑 유색인종은 해당 없음 ㅇㅇ 하지만 이를 위해 프랑스가 치룬 댓가는 엄청 컸는데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하도 많이 죽고 혁명 정신으로 사람들의 계몽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급감하게 된다. 결국 프랑스는 국력에서 경쟁국인 영국, 그리고 무섭게 치고 올라온 독일한테도 밀리는 신세가 되며 이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1863년에 이미 프랑스는 고령화 사회에 들어갔다. 또한 1805년 3100만, 유럽 2위, 서유럽에선 압도적으로 1위였던 인구가 1914년에는 4000만도 도달 못했다. 같은 기간 동안 영국은 인구가 4배, 독일은 3배로 늘었다. 똑같은 산업화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폭증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구 구조는 다시 한 번 박살. 이를 메꾸기 위해 한 때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 대거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에 융화되지 않고 게토 꾸리고 사고 치고 다녀서 고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부르봉이라는 [[여우]]를 도살했더니 보나파르트라는 [[호랑이]]가 나타났다. 나폴레옹은 루이 16세가 당한 것을 교훈 삼아 백성들을 쉬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프랑스에 징병제를 도입하고 그걸로 여기저기 막 들쑤시고 다녔다. 특히 [[러시아]] 쪽에 많이 쳐들어갔다. 보나파르트 집권기의 프랑스 백성들은 부르봉 집권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헬[[지옥]]을 맛봤다. 부르봉 왕조는 혹승지옥밖에 안되었는데 극락 가고 싶어서 그 혹승지옥을 없앴더니 보나파르트 왕조라는 아비무간초열지옥이 떡하니 나타나 버렸다. 물론, 프랑스 혁명의 주동자가 훌륭한 사람이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문제는 프랑스 혁명의 주동자라는 새끼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병신이라는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라는 데에 있다. [[분류:유럽사]]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