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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의 신사참배 ==== 이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결국 1936년 5월 18일에 가톨릭이 먼저 꺾였는데, 교황청은 일본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훈령을 내렸고, 일본 주재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에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통첩을 내리고 신사참배를 직접 권고하였다. 이후 1938년 2월부터 총독부 경무국에서 기독교지도대책을 마련하고 친일화를 독려함에 따라 9월 10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차원에서 개신교 역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이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는 국가신토의 신토 비종교론에 근거해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하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혀 어긋날 것이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교계 차원으로 신사참배 의결을 강제로 밀어붙였다.[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7855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89047&code=23111111&cp=du #] 실제로 한국의 개신교 교파 기준으로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은 교단은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ref>아예 강제해산당한 침례회, 장로회에서는 당시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감옥에 갔다가 나온 사람들이 모인 예장고신이나, 아예 일제강점기 이후에 들어온 루터교회 등이 있다. 예장고신은 광복 이후 신사참배를 회개하라고 주장했다고 오히려 쫓겨났다. </ref>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교단들은 진짜로 교단 자체가 사라진 경우가 많은데, 전체 기독교 비율로 보면 이들은 결국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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