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1960년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대한민국 == === 4.19 혁명의 발생 === [[1960년]]이 되며 4대 대선이 다가왔고 자유당은 또 런승만을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하필 [[1875년]]생이라 85세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리 무지한 국민들이라지만 대통령 나이가 저 정도면 슬슬 안 뽑으려고 한다는 걸 자유당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기 중 죽으면 부통령에게 권력이 넘어가는데 부통령이라도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단 이승만을 당선시키되 자유당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에 부딪치는데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내세워야만 자유당이 살 수 있지만 4년 전에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된 상태라서 이번에도 망할 게 뻔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는데 마침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죽으면서 후보는 이승만만 남았고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이승만 100% 확정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이다. 신익희도 대선 전에 갑자기 죽었지 조봉암은 사형당했지 거기에 조병옥도 느닷없이 죽어버리니 국민들이 자유당에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유당은 이제 헌법을 바꾸거나 악법을 만들거나 하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렸고 결국에는 부정선거를 저지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였다. 여기서 투표함 바꿔치기, 3~5인조 투표, 완장 감독관 배치 등 별의 별 괴상망측한 방법을 부정선거 하는 데 쏟아부었고 자유당은 '부정선거 좀 한다고 저 멍청한 개돼지 국민놈들이 난리가 나겠어? ㅋㅋㅋㅋㅋ'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 때가 1960년이었다. 이놈들이 횡포를 저지르던 1950년대와 다르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학생들이 투표권까지 얻은 어른이 되면서 부산과 마산 등을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총과 칼을 학생들에게 내밀며 항쟁을 진압했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자유당은 대놓고 선을 넘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으로 반자유당 시위와 항쟁이 일어나며 [[4.19 혁명]]이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로만 진행되었으나 추후에 국민학생들과 대학 교수들, 일반 시민들까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의거를 벌였다. 결국 [[4월 26일]] 상황을 더 질질 끌기 싫었던 이승만이 하야 선언과 함께 [[내각책임제]] 실시, 선거 무효화를 알리며 항복했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를 몰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후 대한민국에는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빤쓰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제2공화국의 수립 ===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 정부는 3.15 부정선거범들에 대한 공판을 개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내각책임제 아래에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완전히 새 국회의원들을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대표인 [[장면]]이 행정부 수반인 국무총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도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 선거로 전환되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직함뿐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장면 내각은 주체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려고 했고 1961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 이 의지는 훗날 [[박정희]]가 물려받게 된다. [[1961년]]부터 장면 내각은 2대 악법으로 불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했고 4.19 혁명의 주역들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이 악법에 반대해 시위를 열었다. 나라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윤보선과 장면 간의 사이까지 나빠졌다. 또한 군에 대한 대우도 나빠져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 반발하게 된다. 군부는 4.19 혁명 1주년이 되는 날 학생들을 선동해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선동이 실패해 묻혔다. 하지만 이 사건이 묻힌 지 한 달이 지난 5월 16일에 군부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한 다음 행정부를 장악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한다. === 5.16 군사정변과 국가재건최고회의 ===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에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했으며 [[장도영]]이 의장으로 취임했고 얼마 뒤 의장이 [[박정희]]로 교체된다. 사람들은 살면서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양대 정당이 하는 꼬라지가 하나같이 정상이 없는 븅신들이라 차라리 누군가가 모조리 갈아엎고 두 당을 쓸어버린 다음 나라의 기강을 잡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한다. 당시 국민들은 병신같은 자유당을 몰아내고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민주당도 막상 집권하니 자유당이나 다를 게 없다는 감정이었다. 십몇년 후쯤이면 박정희라는 인간이 미쳐돌아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사람들이 양비론적으로 변하고 갈아엎을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군부가 짜잔~ 하고 들어선데다가 정책들이 이전 정권들의 병신들을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모조리 때려잡고 경제 개발같이 좋은 정책들은 계승하는 식이었다. 쿠데타가 잘한 일은 아니다만 합법적으로 개판인 정치보단 불법이지만 빠꾸없는 정치라는 것이 국민 감정과 딱 맞아떨어졌고 당연히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서 엄청난 지지와 러브콜을 날렸다. 또한 [[혁명재판]]으로 3.15 부정선거범들의 모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가자 민주당보다 군부가 훨 낫네! 하는 반응이 더 쏟아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62년]]에 들어서면서 [[만 나이]], [[서력기원]], [[SI 단위]] 등의 도입으로 나라 자체를 뜯어고치고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껍데기만 남은 2공 잔재들을 쓸었다. 그 다음에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 대통령제 임기 4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 제3공화국 수립과 박정희의 집권 === [[1963년]]부터 민간인 정치참여 허용 등 군정을 완화시키고 박정희도 김종필과 함께 새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군부에서 물러나고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인간성 하나는 쩔었던 [[윤보선]]과 맞장을 깠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친일 및 친북 전적을 들어 '빨갱이에게 나라를 맡겨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박정희는 역으로 윤보선을 수구꼴통이라며 깠다. 뭔가 포지션이 바뀐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한국 내에 암암리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은 박정희가 자기네 편인 줄 알고 박정희를 지지했다. 또한 기존의 빨갱이몰이 이념 탄압에 지친 사람들이 윤보선을 이승만의 재림으로 보고 박정희에게 표를 줬다. 결과는 박정희가 근소한 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또한 윤보선의 민정당도 같이 욕을 얻어먹으면서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1963년]] [[12월 17일]]에 박정희가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7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어 군정이 종식되었다. 물론 민주공화당이 군부놈들 넘어온 거긴 하다만... ===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한일기본조약 === [[1964년]] 당시에는 슬슬 일제강점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한일 수교를 의해 한일회담이 활발하게 열렸으나 여러 트러블로 계속 결렬되었다.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또다시 매국하는 행위로 여겨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이것이 절정에 달한 사건이 바로 6.3 한일회담 반대 항쟁이다. 이 당시에 학생 시위자 중 한 명이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이다. 한편 [[중앙정보부]]의 또라이 [[김형욱]]은 [[인민혁명당 사건]]과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 등을 조작하며 관종짓을 하려고 했지만 믿고 있던 민주공화당에게까지 씹히며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항쟁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 경제 개발 ===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했으며 이때 경공업 부문이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민주공화당에서 4대 비리 축출이라는 것을 내세웠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1966년]]에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비리는 느그들 아니냐? 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박정희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한국독립당의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떨거지들에게 똥을 뿌리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조폭과 정치인생을 끝내고 중정에서 뒈지게 쳐맞으며 반병신이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성공적인 경제개발은 그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 [[1967년]]에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하였다. 한편 [[1967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다시 돌아왔는데, 민주당계는 흩어져 있어서 윤보선이 [[신민당]]을 창당하며 모조리 집합시켰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박정희가 맞붙었으나 윤보선은 막상 내세울 것이 없는 데다가 매카시즘 때문에 인식이 나빠졌고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잘해서 박정희가 더 낫다는 국민들의 선택으로 윤보선이 전보다 더 심하게 쳐발리고 박정희가 압승했다. 또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압승했다. 그런데 자신을 싫어하는 호남 표가 두려워서 7대 총선에서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 북한의 도발 === 박정희가 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북괴의 군부는 잠시나마 박정희에게 가졌던 호감이 각종 반공 정책들을 지켜보며 비호감으로 바뀌었다. 결국 북괴 군부는 박정희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간첩 [[김신조]] 등이 서울로 침투해 박정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1.21 사태]]가 일어났다. 박정희가 이때 존나 빡돌아서 [[684부대]]를 창단하는 등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까지 갔다. 여기서 북괴는 한 술을 더 떠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을 일으켜 민간인까지 살해했다. 이때 전 국민들은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분노했으며 이때 김일성놈도 전쟁 터질까봐 쫄아서 부랴부랴 개짓거리 철회하려고 했다. === 3선 개헌 === 이제 박정희도 단순히 민주적으로만 집권하면 신변이 불안해질 것 같아서 이승만의 독재 방법을 따라한다. 바로 선거 출마 기회를 늘린 다음 또 당선돼서 독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침 국회는 [[민주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1969년]]에 3선 개헌안을 내놓고 신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켜 대통령을 3번씩 할 수 있게 하는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때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등을 일으켜 신민당 당원들을 계속 방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