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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짱깨 ==== [[대약진 운동]]을 통해 참새도 조졌지, 철도 고물로 만들었지, 산도 싹 다 밀어버려서 온갖 자연재해들이 중국을 덮쳤다. [[마오쩌둥]]의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인 발언과 이를 받아들이던 무지성 짱개들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나락 끝까지 떨어져버렸고 결국 마오쩌둥은 입지를 잃어버리고 자리도 잃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오랜 동지였던 [[류사오치]]가 주석으로 집권했는데 그는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펼쳐서 망한 중국을 그나마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찌질한 마오쩌둥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칼을 갈았다. 그러던 도중 [[1965년]] [[11월 10일]] 중국 만악의 근원 4인방 중 하나인 야오원위안이 명나라 [[해서]]를 주제로 한 연극 해서파관을 마오쩌둥을 감히 비판하는 반동의 연극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쩌둥이는 노를 저었고 1966년 5월 16일 개방주의자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르며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며 선동했다. 결국 1966년 8월 쩌둥이의 선동에 동참한 [[홍위병]] 폭도들이 난을 일으켜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쩌둥이를 부추긴 건 4인방, 특히 그 중 하나인 쩌둥이의 아내 [[장칭]]이었고 문화대혁명 선동을 부추기면서 온갖 개꿀을 싹 다 빨아먹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홍위병 폭도들은 공자와 만력제의 무덤을 파묘하고 종교 관련 자료 및 도서들을 모조리 불태우며 연극, 영화, 소설 등의 대중매체들도 모조리 탄압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도 이 시기에 숙청당해 인민재판을 당했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 간 국경 분쟁으로 중소 양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미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에게 접근하는데, 그렇게 미제 반동 타령하던 쩌둥이는 미국이 러브콜을 보내자 언제 욕했냐는 듯이 미국의 접근을 받아들이고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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