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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세계 === ==== 미국 ====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미군 철수를 감행했고 대신 남베트남군이 직접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서 남베트남군의 양질을 향상시켰다. 이후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되지만 민주당 선거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한 것이 드러나면서 [[워터게이트]]가 이슈로 떠올랐고 결국 닉슨의 망언들이 여럿 공개되면서 그는 탄핵되기 전에 제 발로 하야했다. 이후 부통령인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닉슨의 똥을 치워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닉슨을 사면해 욕을 먹었고 1975년 최종적으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멸망시켰으며 키프로스 전쟁도 말아먹어 결국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는 인권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개선하기는 했으나 현실성이 부족하고 이중잣대가 심해 이란 혁명이라든가 전두환의 쿠데타라든가 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사건이 크게 번지도록 한 책임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석유 파동(오일 쇼크)이 일어나 경제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실패로 인해 1980년대에는 공화당이 쭉 집권하게 된다. ==== 일본 ==== 초고도 성장기를 유지하며 엄청난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1970년 오사카에서 만국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며 일본의 경제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했다. 1973년에 제1차 오일 쇼크와 금본위제 폐지를 통해 일본은 안정성장기를 맞이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성장 속도가 더 안정화되었다. 한편 [[적군파]]와 같은 좌파 테러단체들은 [[아사마 산장 사건]]을 분수령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부정적 인식이 단단히 박혀버렸고 이는 일본에서 [[자유민주당]]이 더 오래 해쳐먹는 원인이 되었다. ==== 중화민국 ====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중화민국은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1971년 UN에서 대만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중공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상임이사국 자리를 잃었다. 대만은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결국 UN에서 제발로 걸어나가며 조금씩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975년 쑨원의 후계자로 오랜 정치 인생을 살아오며 중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장제스]]가 마침내 사망했고 부총통 [[옌자간]]이 임시 총통직을 맡았다가 1978년 국민대회에서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 서독 ====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집권한 독일은 동독과 수교를 맺은 국가와 수교하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한 후 동구권과 대화 및 협력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폴란드에 방문해 유대인 추념비에 무릎을 꿇으며 나치의 학살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해 전 세게인들에게 독일의 반성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독일 내부에서는 매국 행위라는 비판이 솓아지기도 했다. 이후 브란트 내각에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1972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에서 테러를 일으키면서 난리가 났고 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터져 경제에 타격을 입었고 1974년 브란트의 비서인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으로 밝혀지면서 브란트는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얼마 후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 본인의 성추문이 쏟아져나왔고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총리로 [[헬무트 슈미트]]가 집권했는데 그가 취임한 당시 독일은 좌파 테러단체들의 궐기와 납치, 암살, 테러 행위, 오일 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침체 등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앞서 말한 간첩 사건으로 좌우갈등도 매우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슈미트 내각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강경 대응을 펼치고 케인스주의 경제 이론에 기반해 실업률을 낮추려고 시도했다. 1975년에는 소련에게 인권 보장을 내세워 헬싱키 협약을 서명하게 하기도 했다. 외교 정책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극좌 테러단체들도 진압하는 데 성공하자 총선에서도 연이어 승리했다. 하지만 훗날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확장 재정 정책이 독일 경제성장률의 하락과 재정 적자 증가로 이어져 발목을 잡게 된다. ==== 이탈리아 ==== 독일이나 일본처럼 좌파 테러단체들의 패악질이 심각해져갔으며 여러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고 다녔다. 결국 이탈리아의 전직 총리인 알도 모로가 이탈리아 극좌 테러단체 [[붉은 여단]]에 의해 피랍 후 살해당하면서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6세]]의 만류에도 붉은 여단은 알도 모로를 살해했고 결국 바오로 6세는 충격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얼마 후 미 육군의 도지어 장군도 납치당하자 미국도 붉은 여단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좌파들의 패악질 외에도 이탈리아 왕국 시절부터 있었던 정경유착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 프랑스 ====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취임 이후 드골 시대보다 더 유화적이고 대외 관계 개선에 힘을 쓰게 되었는데, 여전히 파국을 맞고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간 관계도 개선했고 영국의 유럽 경제 연합체에 가입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연합 기구의 초기 형태를 구성했다. 하지만 오일 쇼크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징병제 반대 시위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다가 1974년 패혈증으로 죽게 되었다. 이후 드골 세력들은 점차 프랑스 역사에서 사라져가게 되었고 좌파 vs 중도 vs 우파의 정치 구도가 확립되었다. 퐁피두 다음 대통령으로는 자유주의 우파 성향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취임했다. 여전히 드골파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였기에 총리로 드골파인 [[자크 시라크]]를 임명했다. 하지만 둘 간의 갈등이 심해져 결별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를 포함한 6대 선진국들의 공동체인 G6을 창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듬해 캐나다가 가입하여 오늘날의 [[G7]]이 되었다. 하지만 물가 규제와 부가가치세 감축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겠다는 '바르 플랜'이 실패하고 몇몇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인기를 잃었다. ==== 영국 ==== 이 당시의 영국은 이미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고 2류 강대국으로 내려온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영연병 경제 블록이 무너지고 유럽 경제 공동체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 또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영국병]]이 심각해졌는데, 지금도 케인스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들 간에 갑론을박이 침튀기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겠다. 아무튼 영국병 때문에 대규모 파업이 연달아 일어났고 복지 체제가 붕괴하면서 70년대 후반에는 노동당 정권이 발리고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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