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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 === 박정희 VS 김대중 === [[1970년]]이 되자 산업화의 부작용([[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남영호 침몰사건 등)이 조금씩 터져나왔지만 [[경부고속도로]] 완공 등 여전히 국가산업 발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낙후된 지방에 산업화의 기반을 깔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새마을 노래|새벽좆이 울렸네 새아침이 발기했네~]] [[1971년]]이 되어 대선과 총선이 모두 다가왔다. 애초에 3선 개헌을 한 목적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또 이기려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했고, 신민당에서는 새로 뜬 루키 스타인 [[김대중]]이 [[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이때 김대중이 처음으로 지역감정 조장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원래 전라도는 경상도와 함께 박정희에게 몰표를 몰아주던 지방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전라도 출신임을 내세워 전라도 사람이면 신민당 찍읍시다! 한 끝에 전라도가 김대중 편이 되었다. 하지만 호남이 자기를 따르면 영남 지역도 따를 것이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영남에서는 대국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고 결국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승리했다.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또 승리했다. 그리고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며 곧 있을 유신 헌법의 모태를 깔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 7.4 남북 공동 성명 === 3번씩이나 대통령을 해먹게 된 박정희는 제대로 삘 받았는지 [[1972년]]부터 종신집권의 토대를 다졌고 내적으로는 강압통치를 하고 대외적으로는 친절한 척 하는 천재적인 독재 수법을 사용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자기를 죽이려 했던 북괴 김일성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 원래 친구였음! 한민족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친구 먹어야지~' 똥꼬쇼 퍼포먼스를 부리며 자기 이미지를 개선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박정희도 전쟁 분위기만 조성하면 지 목숨이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법은 평화를 가장한 쌩쇼뿐이었다고 판단, 북괴가 자기 목을 따러 올 여지를 완전히 끊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국민 지지도 얻고. 이제 대외관계까지 정리했으니 남은 건 하나다. === 10월 유신 ===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대놓고 독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체육관 ㅂㅅ ㅅㅂ ㅉㅉㅉ 파티를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뭐하니 교묘하게 부정선거 좀 섞어서 유신 헌법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강압적인 분위기 조성 덕을 봤는지 압도적인 찬성 표가 나왔고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다. 직선제는 폐지되었고 대통령은 무제한 출마 가능에 박정희의 어용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니 박정희만 영원히 100%로 당선될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를 국민회의에서 치뤄 100% 표를 받고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지만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1/6만 확보해도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한 박정희는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고 다니던 김대중을 조지려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천조국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인맥이 있었고 김대중을 건드린 박정희는 당시 경제강국 탑에 들던 미국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받았고 결국 gg쳤다. 어쨌든 평소부터 박정희를 고깝게 보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를 압박했다. === 긴급조치 === 하지만 박정희도 한 가지 쫄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권 세력이었다. 김대중을 조지는 것이 실패했으니 운동권 세력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또 공격을 당했고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카드를 꺼낸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어 개헌 논의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10년 전에 물거품이 됐던 중앙정보부의 작품 인민혁명당 사건을 한 번 더 꺼내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가짜 사건을 만들어내고 긴급조치 제4호를 발령시켜 민주계 인사들을 모조리 민주청년학생연합이라는 가상의 종북단체로 분류해 잡아넣었다. 하지만 [[문세광]]이라는 빨갱이가 반인반신 박정희의 와이후 [[육영수]]를 골로 보냈다. 그리고 빡친 반인반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 긴급조치 제9호 ====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가 발령되며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 금지'라는 사상 최악의 악법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반신욕'을 하면 남산으로 보내진다. 1975년부터 반 박정희 인사들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대중가요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고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 처리를 받았다. 이제 노래만 불러도 남산을 방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인 [[장준하]]도 등산하다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지면서 독재 분위기는 더욱 세졌다. 하지만 유신으로 북괴와 사이가 또 나빠진 데다 북은 남보다 더 심한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빅똥을 메인카드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더 미친놈인 덕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다. 참고로 이때 북괴의 만행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병사 중 한 놈이 현재 청와대의 빅 적폐이신 디재스터 문프시다... {{문베읍읍}} 하지만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고리 원전]]이 세워지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78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뻔하지 뭐. 다들 알잖냐? 또 박정희가 이긴다. === 유신 정권의 몰락 === {{쌤통}} 한편 [[1973년]] 중동에서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터져 석유 수출이 중단되어서 세계 경제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1978년]]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고 [[1979년]]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또 석유가 막히고 세계경제가 침체되었다. 이 사건을 [[오일 쇼크]]라고 부른다. 박정희의 집권은 지속되었지만 세계 경제가 흔들리면서 국내 경제도 침체되었다. 마침 [[1979년]]에 오원춘 농민 납치 사건이 터져 민심이 나빠지고 국내 경제 침체는 YH무역 농성 사건을 일으켰다. 유신 정권의 한계가 전국적으로 터져나오자 [[김영삼]]이 유신을 디스했다. 그리고 헬조선도 이란 꼬라지가 난다고 또 깠다. 노발대발한 반인반신은 사상 최초로 김영삼 국회의원을 제명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터져나왔고 먼저 반발한 곳은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지지기반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확히는 들고일어난 곳은 PK이고 박정희 지지기반은 TK라는 차이기 있긴 하지만 믿었던 경상도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한 반인반신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기로 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은 분명히 20년 전만 해도 자유당 떨거지들을 쓸어버리고 찬사를 받았던 박정희가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과 다른 최후를 맞이했다. ==== 10.26 사태 ==== {{대국적}} 이때 정부의 관료들과 박정희가 부마민주항쟁을 처리하기 위해 의논했으나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 박정희를 애널써킹하던 [[차지철]]이 탱크를 들고 모조리 찍어누른 다음 절대독재체제로 가자는 헛소리를 하자 [[김재규]]가 반사적으로 차지철의 대가리를 총으로 날리고, 뒤이어 박정희까지 쏴서 죽였으니 바로 [[10.26 사태]]이다. 멀쩡하던 머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나라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고 [[최규하]]가 권한대행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 세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26으로 긴급조치들이 전부 해제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회의에서 개최되어 최규하가 당선되며 나라가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 12.12 군사반란 === {{폭동}}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의 군 내 애널써킹 좆목회인 [[하나회]]의 주역들 [[전두환]], [[노태우]]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는... 그 하나의 탱크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장태완]]이 반란군노무 쉐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군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은 5.16처럼 확실한 명분도 없어서 정권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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