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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세계 === ==== 동남아 ==== ===== 남베트남 ===== [[응우옌반티에우]]가 토지개혁을 실시해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부정부패 및 무능함은 해결되지 않았고 군부와의 갈등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닉슨]]이 미군을 철수시키고 군사 원조도 줄이자 남베트남에는 미래가 없어졌고 결국 각지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게 격파당하다가 1975년 북베트남이 대공세를 펼쳤고 결국 대만으로 빤쓰런했다. 이후 응오딘지엠을 몰아냈던 1963년 쿠데타의 주역인 [[즈엉반민]]이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국 사이공이 북베트남에게 점령당하면서 남베트남은 멸망했다. 이후 즈엉반민은 조사를 받다가 그냥 집으로 되돌려보내졌고 후에 북베트남 정부로부터 망명을 허가받았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보복성 학살이 벌어졌다. ===== 북베트남 ===== [[호찌민]] 사후 [[똔득탕]]이 국가 주석이 되었다. 이후 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잠시 전투가 줄었다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다시 전면침공하면서 사이공을 점령하고 적화통일시켰다. 그리고 197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국명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면서 오늘날로 이어진다. 그리고 호치민 루트에 끼어 있었던 옆나라 라오스도 왕이 물러나면서 공산당이 집권하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같이 적화되었다. 한편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라는 작자가 반미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최종적으로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들은 [[킬링필드]]와 같은 유례없는 대량 학살 행위를 벌였고 그 불똥이 베트남까지 튀게 되자 분노한 베트남 공산당은 민주 캄푸치아를 침공해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를 날려버리고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캄보디아에 수립했다. 캄보디아를 밀어주던 짱퀴벌레들은 베트남의 행보에 부들부들거렸고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중월전쟁]]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중국이 우세했으나 결국 베트남의 저항에 못 이기고 패배하며 돌아갔다. ===== 미얀마 ===== [[네 윈]]의 사회주의 정책은 연달아 실패했고 반발이 커지자 1974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개헌해 독재를 강화했다. 이를 계기로 대학가에서 시위가 급증하고 반군부 시위가 이어졌으나 군부는 이를 무력 진압했다. ===== 태국 ===== 미국의 요구로 순순히 민주화를 추진하던 타놈 끼티까촌은 1971년에 갑자기 돌변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를 시작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며 군부와 학생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고, 군부 내부에서도 타놈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며 결국 1973년 [[라마 9세]]가 타놈을 쳐내며 타놈은 숙청당했다. 이후 민간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화되자 1976년 쿠데타가 다시 일어났고 다시 학생들을 탄압하며 독재를 벌였다. 이후 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군을 결성해 군부와 충돌하기도 했다. =====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 말레이시아는 압둘 라작 총리가 신 경제정책을 수립해 농촌 근대화와 국가의 경제 개입 정책을 밀어붙였고 일단 성공해 경제적인 대성장을 거뒀다.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독재를 하면서 동시에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 인도네시아 ===== [[수하르토]]가 독재를 벌이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나 경제적인 발전은 상당히 이루어진 편이었고 이는 독재 정치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 경제가 대부분 수하르토 일가에게 장악되었다. ===== 필리핀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개발독재를 벌이며 여하튼 초기에는 경제 성장을 거두며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를 장악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대거 탄압했다. 계엄군들의 잔혹한 진압과 이에 반발한 몇몇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리스트 전향으로 인해 필리핀은 유사 내전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 행위 때문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 인도 ==== 파키스탄에서 기득권 세력인 서파키스탄과 비교적 차별받는 동파키스탄 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 정책을 펼치며 강제 동화를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많았고 결국 역풍을 맞아 내전으로 번졌다. 이때 각을 보던 인도는 계속 벵골(동파키스탄) 난민들이 인도로 유입되자 난민을 받느니 걍 방글라데시를 독립시켜서 난민 유입을 막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결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동맹을 맺어 파키스탄을 조졌다. 이후 항복한 파키스탄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이어졌다. 여하튼 전쟁에서 승리한 인도는 1974년 4월 15일 석가탄신일에 라자스탄 지방에서 '미소 짓는 부처'라는 이름으로 첫 핵실험을 했고 인도도 핵보유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물론 핵 확산 방지 조약을 어긴 만큼 제재를 받았으나, 당시 인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 소련, 중국을 중재하는 중요한 위치였기에 미국, 소련 두 국가 모두 제재하는 척을 하거나 그냥 방관했다. 중국이야 원래부터 철천지 원수였으니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이때 인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가 부정선거를 저지르다가 뽀록이 나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력한 독재를 시작했다. 이마저도 인구 조절에서 실패해 1977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총리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새로 들어선 야당은 인디라 간디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의 연합이었던지라 오합지졸이었고 서로 내부총질하다가 무너졌다. ==== 중동 ==== ===== 이란 ===== [[팔라비 왕조]]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독재를 더욱 강화하고 대신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이란을 강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1974년에는 아시안 게임 개최국이 되었으며 1977년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한국과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경찰의 활동이 너무 심각해서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이 틈을 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팔라비 왕조를 세속주의자라며 억까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했다. 이후 이슬람과 공산당이 동맹을 맺는 희대의 일이 벌어지고 테헤란 전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란 혁명(을 빙자한 시대역행)이 일어났다. 결국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시위대에 못 이겨 빤쓰런했고 이 틈을 타 꼴통 개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이란에서 석유 수출이 급감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 쇼크를 맞이했고 이는 한국, 소련 등의 나라에 영향을 끼쳐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 아랍, 팔레스타인 ===== 1970년 9월 28일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기존의 이집트 대통령들과 다르게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를 일부 개선했고 이스라엘과도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만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에서의 철수를 거부하자 사다트 대통령은 술책을 쓴다. 바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여러번 뇌절하듯이 구라를 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속아넘어가서 사다트가 계속 전쟁 협박을 해오자 그냥 허풍쟁이 취급을 했다. 그런데 1973년 10월 6일(욤 키푸르)에 이집트가 정말로 쳐들어오면서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다. 이번에는 이집트가 각 잡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이었기에 이스라엘이 의외로 초기에 밀렸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당시 미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돕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걍 내버려뒀으나, 이스라엘이 너무 불리해지자 결국 닉슨 대통령이 직접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전세를 회복해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을 역관광시켰으나 시리아 전선에서는 소련이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지 말라는 강요를 하자 일단 멈췄고, 이집트도 제압하면서 이스라엘은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 다만 이집트도 초기의 강력한 공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압박할 카드를 얻은 셈이 되었고 이들은 1974년에 수에즈 운하를 다시 얻어내면서 전략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그냥 얻은 것 앖이 날라갔다. 여하튼 두 나라는 향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전쟁 동안 아랍 국가들이 담합을 벌여 석유 가격을 올려버렸고, 이로 인해 전 세계가 기름 부족이라는 큰 타격을 입어 제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났다. 이는 한국의 경제 개발을 방해했고 일본의 발전 속도를 침체시켰으며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나라들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팔레스타인 외의 아랍 지역에서는 영국령 아랍 에미리트가 독립해 7개 토후국이 뭉친 아랍 에미리트가 건국되었다. 여기서도 석유가 발견되었고 아랍 에미리트는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석유 산유국으로 지위가 올라가 두바이 등의 초고속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 북아프리카 =====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라는 양반이 독재를 벌였고 모로코는 스페인이 사하라 식민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이곳에 대규모 이주 정책을 펼쳐 모로코인들이 살도록 하였다. 스페인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프랑코가 뒈지자 모로코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폴리사리오 전선과의 분쟁이 커지면서 서사하라는 아프리카의 대표적 영토 분쟁 지역이 되었다. ==== 아프리카 ==== 에티오피아에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에티오피아 제국]]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민심이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황제가 의문사했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라는 빨갱이 새끼가 정권을 장악해 에티오피아를 공산화시키고 잔혹한 독재를 시작했다. 이후 오가덴 지방에서 소말리아와 영토 분쟁이 일어나 오가덴 전쟁이 발발했고 에타오피아는 소말리아를 격파해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결국 두 나라 모두 좆됐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가 상식을 넘어선 괴랄한 행보를 보이더니 1976년에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나폴레옹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는 하렘을 만들어 아내를 17명이나 따먹었고 자신의 그림이 새겨진 교복을 초딩들에게 구매하도록 강요하자 초딩들은 이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고 그 초딩들을 학살하면서 세계적인 비판을 받았다. 이후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몰래 돕고 있었던 프랑스도 이건 좀 아니라며 특사를 보내 뇌절 좀 그만하라고 말했으나 되려 보카사는 특사를 구타하며 추방했고, 이에 분노한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침공해 보카사를 날려버리고 다코 대통령을 앉혔다. 우간다에서는 [[이디 아민]]이라는 미친 놈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대학살을 벌였다가 큰 비판에 직면했고 이놈은 독재를 계속 벌이다가 탄자니아를 우연히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좆만한 우간다와 다르게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의 강대국 중 하나였고 이디 아민은 순삭당해 리비아로 튀었으나 리비아에서도 쫓겨나고 이라크로 튀었다가 또 쫓겨나고 결국 사우디로 빤쓰런했다. 한편 남아프리카 지방에서는 포르투갈이 식민지 독립전쟁 진압 과정에서 패배하고 카네이션 혁명으로 날아가면서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를 포기했고 이 두 나라는 공산화되어 다시 독재 시대가 열렸다. 남아공의 경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IOC]]의 제명으로 올림픽 참가도 금지되었다. 결국 이들은 몰래 핵개발을 시작했다. 흑인 인권 투사였던 [[넬슨 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계속 인권 투쟁을 이어나갔다. ==== 스페인국 ====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점차 늙어가면서 후계자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미 1969년에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여하튼 스페인에서도 배운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후 프랑코는 통제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당시 불법이던 민주주의를 일부 허용하는 쪽으로 노선을 선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시위대가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자 입 싹 닫고 강력한 독재를 시전했다. 결국 스페인은 다시 국제적 왕따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 9월에 마침내 프랑코가 뒈졌고 스페인은 다시금 혼란 속에 빠진다. 이때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으로 즉위하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는 프랑코 체제가 자신의 왕정을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해 프랑코 세력들을 몰아내고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임명해 점차 믽화 개혁을 이루었다. 1977년 6월 드디어 40년만에 총선이 이뤄졌고 의회가 수립되어 새 스페인 헌법을 제정했다. 결국 1978년 최종적으로 껍데기만 남아있던 프랑코 체제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득권층의 일부 프랑코파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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