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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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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의 인물은 주니치 드래건스 그 자체입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고 있는 인물은 주니치 드래건스의 영웅입니다.
놀랍게도 아이치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시 용의 일격을 온몸으로 맞을 것입니다.
가쿠 겐지
郭源治/佳久 源治

Kenji Kaku

기본 정보
생년월일 1956년 10월 5일
출생지 중화민국 타이둥 현 타이둥 시
국적 일본 일본
신장 178cm
체중 75kg
선수 정보
입단 1980년 주니치 가계약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투수
학력 푸런 대학
경력 주니치 드래건스(1981~1996)
퉁이 라이온스(1997)
허신 웨일스(1998~1999)

소개[편집]

이름을 짱깨식 발음으로 읽으면 궈위안즈, 우리식으로 읽으면 곽원치

궈타이위엔과 동시대를 함께한 머만 출신의 투수. 은퇴 후 자국에서 활동하는 궈타이위엔과 달리 이쪽은 아예 일본으로 귀화를 했다. 참고로 핏줄이 머만 원주민에 속하는 아미족의 혈통이다.

100승-100패-100세이브, 일명 트리플백 달성자

현역시절 무지막지한 스태미나가 돋보여서 그런지 주니치시절 마무리로 뛸 때 많은 이닝을 굴렀다. 7회 등판 세이브도 종종 기록했다.

느프브 시절[편집]

1981년 머만에서 군바리로 구르고 있을 때 일본 사회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뒀고 그해 3월 곧바로 주니치와 가계약을 체결하고 느프브에 진출했다.

하지만 궈타이위엔과 달리 첫해엔 그닥 인상적인 성적을 못 올렸다. 일본생활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니 그럴만도

1982년엔 본격적으로 선발 로테를 돌면서 9승을 챙겼고 이후 3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주니치 선발진의 일원이 되었다.

1987년부턴 마무리로 기용되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비록 호시노 감동님이 ㅈㄴ굴렸지만(91년엔 다시 선발투수로도 뛰었다) 1990년 부상으로 부진한것과 일본생활 말년에 다소 주춤한거 제외하면 ㅅㅌㅊ 마무리투수로 활동했다.

1996년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조국에서 뛰고 싶다는 명분 하에 주니치를 퇴단하고 머만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그해 11월 22일에 퉁이하고 계약했다. 이듬해 3월 18일 시범경기를 은퇴경기로 치렀고 이치로를 우익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16년 일본 생활을 정리했다.

NPB통산 496경기 1971이닝 106승 106패 116세이브 1415K ERA 3.22

대만야구 시절[편집]

어째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첫 시즌부터 승부조작이 터져 마음이 몹시 아팠다고 한다.

퉁이에서 1년 뛰고 허신 웨일스로 이적한 뒤 그곳에서 40을 넘은 나이로도 2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말년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은퇴했다. 은퇴 후 허신 구단측에선 감독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가족들하고 살겠다며 도로 일본으로 튀었다.

CPBL통산 52경기 293.1이닝 28승 11패 204K ERA 2.67

은퇴 후[편집]

은퇴 후에는 일본에 귀화해서 유소년 야구 지도, 야구 해설, 레스토랑 사업(현재는 폐점) 등을 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엔 대만 야구 우수 유망주 육성에 힘쓰고 있다.

기타[편집]

귀화를 주니치에서 뛰던 당시에 했다. 당시 본인은 대만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 대만 내 여론도 반대의견이 넘쳐 흘러서 고민이 많았다고 했지만 일본에 있는 자식 생각, 그리고 귀화를 통해 자신이 외국인 신분에서 내국인으로 바뀌면 소속팀 주니치의 용병 운용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팀 전력이 좋아져서 호시노 감독님이 일본체고에 오를 수 있다 판단해 귀화를 결심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말년에 퉁이에서 뛸 때는 출생지는 대만인데 선수등록은 외국인으로 되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한때 대만 국대에서 이 사람의 배번인 33번이 영구 결번이었는데 최근엔 영결이 풀렸는지 33번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