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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카와 히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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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을 보고도 계속 남아있다가 히로이에에게 살해당해도 조무위키에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 그리고 모리 료센 중 한명인 깃카와 모토하루의 아들이기도 하다.

태생이 심히 안습이다. 생김새가 꽤 추한데다가 심지어는 하는 짓도 어벙한 멍청이라서 아빠가 많이 고민했다고 함. 단순한 멍청이인 것만이 아니라 예의범절도 부족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자라고 나서도 지가 멋대로 오가사와라의 양자로 들어가려고 하는 등 병크를 터뜨리긴 했지만 아니 얘는 뭔 쉴드 칠 거리가 없냐. 그래도 모토하루가 나중에 자기 곁에 두고 싶어했다는 얘길 보면 아주 얄미운 짓만 골라서 했던건 아닌듯 하다.

아버지인 모토하루가 규슈 정벌 도중 사망하고, 이어 형인 모토나가가 죽은 후 쓰네노부(히로이에)는 깃카와의 당주직을 계승했다. 이름이 히로이에로 정해진 것도 이 시기 쯤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꽤나 쓰임을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다. 아빠와 형이 싸움을 잘했던 것과는 다르게 히로이에는 머리를 쓰는데 특화 되어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출병에 참가했다. 주로 경상도 쪽에 있었으며 문경전투, 행주대첩 등에 참가하였다. 행주산성을 첨 공격할 때는 좋았겠지만 의외로 조선군의 강한 화력, 필사적인 항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며 패배하였다. 걍 패배한 것도 아니고 부상까지 입으면서 도망갔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까지도 여전히 조선에 발을 붙인걸 보면 부상이 그다지 심하지도 않았고 트라우마가 되거나 하지도 않았는듯. 울산성 전투에도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명-조선 연합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깃카와 히로이에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존나게 싫어했다. 물론 안코쿠지의 입장에서도 히로이에가 이뻐보였을리 없다. 친이에야스파였던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할 것을 확신하며 안코쿠지 에케이와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미 모리 테루모토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되어 있는 상태라 이를 무시하고 당당하게 동군으로 참가할 수도 없었다. 이에 히로이에는 몰래 구로다 나가마사 쪽에 밀약의 사자를 보냈다. 동군의 다이묘에게 ~절대적으로 서군에 참여하지 않겠다~ 라는 의사를 보인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터진 당일 날에도 히로이에의 약속은 꿋꿋이 잘 지켜졌다. 표면상으로는 서군 편에 서있긴 했지만 히로이에의 군대는 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출전은커녕 웃기게도 난구산에 진을 치고 모리의 주 본대가 출입할 길을 틀어막으며 서군을 방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개빡친 안코쿠지 에케이가 달려와 뭐해 씨발 빨리 서군에 합류해 씨발년아! 하고 화를 내자 히로이에는 ~어~허 지금 시각은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 골든타임~ 이라며 지금부터 도시락을 까먹을 것을 격렬하게 주장했다. 구라 같지만 사실이다. 결국 히로이에의 작전이 성공하고 서군이 동군에게 패하자 모리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투에서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히로이에는 테루모토가 엄연히 명목상으로만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된거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닙니다 라고 주장했지만 이에야스는 히로이에의 의견을 곧이 곧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테루모토가 능동적으로 움직인 증거가 있다면서 모리를 조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히로이에는 제발 모리라는 가문만이라도 살려달라고 빌었고, 이에야스는 히로이에의 체면을 보아 모리에 스오와 나가토의 2개국 37만석을 남기기로 결정했다.

히로이에가 세키가하라에서 벌인 행적은 이후로도 가문에서 히로이에를 괴롭혔다. 특히 히로이에와 대놓고 반목한 사람은 세키가하라 당일날 난구산에서 발이 묶여 출전하지 못했던 모리 히데모토였다. 물론 히로이에도 가만있지 않아 반 히데모토 파를 자처하며 가문내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