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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632 BCE에 중국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간의 전투.

성복지전, 성복대전으로도 불린다.

초나라가 주위 꼬붕을 데리고 송나라를 침략하자 진나라가 주변 꼬붕과 연합해 이를 성복에서 막아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진문공 중이는 춘추오패 중 하나가 된다.

전개[편집]

양측의 병력[편집]

양측 병력에 대한 기록은 정확치 않다.

다만 진晉의 보조군으로 투입된 진秦나라의 전투병력이 700승이고, 전투 후 초군의 피해가 전차 100승에 병력 1000명이라 기록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진秦의 병력은 전차 700승에 21,000 여명으로 추산 가능하다.[1]

삼군 중 한개 군이 2만여명이니 대략 6만에서 7만여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진晉 군의 병력이 초에 비해 열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의 첫번째 기만[편집]

진군은 초군과 조우하기 전에 초군에 사신을 보내 옛날 진문공이 초성왕에게 약속했던 바를 지키겠다고 선언, 3사舍[2] 를 후퇴하여 진을 세운다. 초군의 사령관 자옥은 진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병력열세에 따른 물러섬으로 착각해 병력을 급히 기동시켰다.

진군은 후퇴를 한 듯 보이나 초군보다 먼저 전장에 도착, 선택할 수 있었고 이는 시작부터 주도권을 쥔 셈이다. 초군은 당초 예상보다 더 먼거리를 급속기동함으로 병력 피로도가 증가했으며, 보급로가 더 길어졌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지휘관이 상대를 오판(상대를 얕잡아봄)했다는 것이다.

진나라의 두번째 기만[편집]

진의 좌군인 진秦군이 초의 우군인 채나라 군을 말에 호랑이 가죽을 씌우는 기책으로 붕괴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초군이 우세를 점한다.

갑자기 진군 전체가 방어진형을 갖춘채 후퇴를 시작한다. 이때 전차의 뒤에 나뭇가지를 달아 흙먼지를 일으킴으로, 초군이 진군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초군은 진영을 무너뜨려가며 이를 쫓는다.

초의 진영이 무질서해졌을 때 진군이 다시 반전, 초군을 압박한다. 진秦군의 일부는 초군의 배후로 기동한다. 초는 우군이 붕괴되고 배후마저 위협받자 패주한다.

결과[편집]

초의 연합군이 패배했다. 초의 총사령관 자옥은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다.

진문공은 초의 중원진출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진의 강력함을 천하제후에 알릴 수 있었고, 이후 회맹을 통해 패자의 자리에 오른다. 제환공에 이은 두 번째 패자다. 진나라는 진문공 치세에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후에 진이 조·위·한 삼국으로 쪼개졌음에도 삼국 모두 전국 시대의 강국으로 남게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초성왕은 결국 자신의 치세에 중원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로 초장왕이 등장, 초나라가 다시 패권을 쥐게 된다. 뭐 그것도 장왕 사후 얼마못가 끝나지만, 그래도 전국 시대까진 버티니 뭐...

각주

  1. 춘추 시대 초기 군제에 따르면, 전차 1승은 탑승자가 3인에, 전차에 부속되는 갑옷입은 병사(대갑帶甲)가 7인과 20여명의 보병(보졸步卒 또는 도졸徒卒이라하며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보조병)으로 구성되는10인제다. 전차에 탑승한 3인과 바로 아래 위치하는 7인은 무장한 귀족전사이며, 뒤에 딸린 보졸은 징병된 평민 혹은 천한 신분으로 구성된 보조병이다. 이렇듯 춘추시대 초기엔 전투에 동원되는 병력의 수가 많지 않았고, 이 시기 군사강국을 이르는 어휘가 '천승지국'정도로 평균 동원 병력이 3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병력 동원의 수가 증가하게 되어 춘추 말기에 이르면 이런 10인제는 군제의 가장 작은 단위가 되며, 각 국의 병력 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는 각 국이 제도적으로 토지에 기반한 징병제를 극한까지 추구했기 때문이다. 리링, 김숭호 역,『전쟁은 속임수다』,글항아리, pp.205~210.
  2. 사舍는 당시의 행정 단위이자 행군 단위로 1사는 30리를 의미한다. 춘추 시대의 군대의 하루 평균 행군거리가 바로 30리로, 진군은 3일 행군거리를 후퇴한 셈. 이에 관련된 고사성어가 바로 '퇴피삼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