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국시대에 존재했던 일반 보병을 칭한다. 통일된 국가 권력이 붕괴하고 여러 다이묘들이 난립하는 전국시대가 되자 이전과 달리 병력을 대규모로 모집할 필요가 있었고 대놓고 일반 농민을 병사로 징집하는 게 금지였던 일본의 중세 문화 때문에 탄생한 개념이다.

대규모 병력이 필요한 다이묘가 각 마을의 고쿠다카(1년의 쌀 생산량)와 인구수에 따라 일정 비율로 아시가루를 모집했는데 그러면 각 마을에서는 먼저 아시가루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자을 먼저 뽑았고, 그 다음에는 지원자를 받았고, 그래도 요구 숫자를 못 채우면 '징집'했다. 이들은 복무 기간 동안 봉록(월급이다)을 대가로 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용병대와 유사하지만, 평상시에는 원래 하던 생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시가루로 큰 공을 세운다면 아시가루의 우두머리인 아시가루코가시라까진 승진할 수 있었고 거기서 더 공을 세우면 아예 사무라이로 신분 상승하는 사례도 있었다. 다케다 신겐의 부하 장수들 중 사천왕으로 뽑히는 장수 중 1명인 코사카 마사노부가 그 실례로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으나 아시가루코가시라-아시가루다이쇼를 거쳐 사무라이가 됐다.

진군 순서는 조총병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궁병 - 창병 - 검병 - 기병 - 지휘관 순으로 진군한다. 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땐 조총병이 공격하고 적이 접근해오면 궁병이 공격하고 더 접근하면 창병이 공격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공격했다. 착용했던 갑옷은 사무라이가 사용하던 갑옷을 간략히 한 오카시구소쿠로 다이묘에게 빌려쓰는 갑옷으로 투구인 진가사(임진왜란을 다룬 매체에서 흔히 보이는 삿갓이다), 가슴, 팔, 정강이 방어구로 구성되었다. 주로 사용한 무기는 창과 활이었는데 조총은 전문병이 사용했고 칼은 비쌌기 때문에 장수들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가루의 목숨은 매우 저렴해서 도자기 한 병이 아시가루 3명의 목숨보다 비쌌다. 당연히 아시가루가 도자기를 깨면 즉석에서 참수당했다.

일본놈들이 어찌나 도자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지 현대 일본인들한테 임진왜란 왜 일으켰나고 물어보면 조선에 가서 도자기를 훔치려고 일으켰다고 대놓고 답변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일본인들끼리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실제로도 조선산 도자기는 존나 최고의 명품으로 취급되어 오늘날 Made in Italy가 찍힌 명품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임진왜란에서 왜군들이 철수할 때 수많은 도자기 기술자들을 납치해갔다.

다이묘들은 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납치해와서는 의식주 문제를 최고의 예우를 갖춰 대우해주고 자기 딸내미를 아내로 내줘서 사위로 만들어 놓은 뒤 하루에 도자기 한 개씩만 뽑아주면 아주 큰 절까지 해가면서 귀하게 모셨다. 에도 막부 초기에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이렇게 납치된 도공들 중 많은 수가 귀국했지만 그냥 일본에 눌러앉아버린 사람들도 있었다.